백제 말기의 정세 그리고 매도
사극 '계백' 다시 읽기 [2편]
많은 전문가들이 말기의 백제가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삼국항쟁이 격화된 6세기 후반 백제는 경쟁국인 고구려나 신라보다 그 입지랄까 행동반경이 매우 좁았다. 즉 한강 유역을 송두리째 신라에 빼앗긴 뒤부터 백제는 줄곧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라는 말까지 나온 바 있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당시 백제와 신라의 분쟁에서는 백제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대부분 백제 쪽에서 선제공격을 했을 뿐 아니라, 백제의 공세 상당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무왕 때부터 신라의 주요 거점들을 빼앗으며 압박하다가, 의자왕 초기에는 40성을 차지했다. 이 부분도 드라마에서는 순전히 계백의 능력 때문인 것처럼 묘사하는 바람에 의자왕의 능력을 묻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실제 역사 기록에는 이 과정에서 계백의 이름이 나오지도 않는다.
무왕과 의자왕 때 백제가 심하게 압력을 넣으면서 위기에 몰렸던 쪽은 신라였다. 기록에 노골적으로 그 점은 인정하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라 진덕여왕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軍主)로 있었을 때, 진덕여왕에게 "백제를 쳐서 대량주 전쟁에 대해 보복을 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진덕여왕의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
신라 왕의 입에서 '큰 나라 백제'에 대한 두려움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백제에 대한 두려움은 당시 신라의 외교에도 반영되어 있다. 자신의 힘으로 백제의 침략을 극복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지원을 호소하다가 결국 당(唐)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상황까지 간 것이다. 특히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왕이 된 김춘추가 그런 외교를 이끌었던 중심인물이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부터 적극적으로 백제에 반격하려는 시도에 주변 세력을 끌어들이려 외교에 매진하고 있었다. 심지어 충돌을 빚고 있던 고구려와 전통적으로 적대 성향이 강했던 왜에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갔을 정도였다. 신라가 주도권을 쥐고 있을 정도로 우위에 있었거나, 하다못해 독자적으로 버틸 수 있는 상황만 되었더라도 이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쓴 외교를 할 필요가 있었을 리가 없다.
특히 태종무열왕 6년의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라고 되어 있다. 당에 요청한 군사원조에 대한 회답이 없는 사실만으로도 왕의 근심이 두드러질 정도였다는 얘기다. 당시 신라가 이렇게까지 근심을 할 만큼 압박을 했던 나라는 물론 백제였다.
그런데도 결국 이긴 쪽이 신라라는 데 대한 변명을 위하여, 마치 백제가 신라를 압박하는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국력을 소모하며 멸망의 길로 접어든 것처럼 몰아가기까지 한다. 물론 근거는 없다. 어떤 백제사 전문가는 의자왕 때 백제가 어려워졌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으니까, 엉뚱하게 동성왕 때와 아신왕 때 백제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친 사례를 갖다 붙여 놓고 의자왕 때의 백제가 이렇게 파탄을 맞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신라가 이겼다는 편견에 전문가라는 사람들까지 놀아났다고 할 수 있다.
또 어떻게든 백제가 망하게 된 원인을 내부에서 찾아보려고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의자왕이 독선적인 정치를 하다가 인심을 잃고 능력있는 신하들과 등졌다는 식의 이야기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 상당수도 역사가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좌평이었던 사택지적(沙宅智積)의 은퇴 문제다. 사택지적의 은퇴가 '귀족세력의 견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몰아가는 것이다. "양심적인 재상 성충(成忠)이 옥사하고 흥수(興首)가 귀양을 간 것도 이 같은 난정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사택지적(沙宅智積)의 정계은퇴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이들의 논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몰아가는 근거가 무엇이었을까? 근거는 그 점을 시사하는 내용이 당사자의 묘비인 사택지적비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사택지적비의 내용을 보면 그렇게 볼만한 내용이 없다. 그런데도 있지도 않은 내용을 근거로 삼아 '의자왕의 정치적 한계'를 제멋대로 만들어내 버린 것이다. 지면의 한계 때문에 사례는 이 정도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외에도 황당할 정도로 근거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의자왕을 독선적인 정치를 하다가 나라를 망친 장본인으로 몰아가는 논리는 많다는 점은 밝혀둔다.
이희진 박사
고려대학교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 서강대학교 박사.
주요 저서 <식민사학과 한국 고대사(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