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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2011.11.23  조회: 2544

작성자 : 관리자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지난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실질적으로 침탈당한 을사조약(1905)이 늑결(勒結)된 날인 11월 17일을 전후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국하였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법정기념일로 제정, 1939년 11월 21일 공표하였다. 광복 후 광복회 등 민간단체의 주관으로 추모행사를 거행하다가 1997년 5월 9일 정부기념일로 제정하였다. 특히 17일 이 날은 우당 이회영(1867~1932)선생이 일제의 고문 끝에 명을 달리한 순국일이기도 하다. 우당의 형제들은 이항복의 후손으로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부를 정도로 조선 제일 명문세가였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기자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급히 환전한 600억 원 재산(현 시가 2조원 추정)을 투척하여 형제, 가족, 식솔 60여 명이 낯설고 물설은 이국땅으로 망명을 떠난다. 이후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신산고초로 단군의 터전인 만주 땅에 석주(石洲)이상용(李相龍)과 김대락(金大洛)가계와 함께 신흥무관 학교를 세워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운 공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조선에서 3ㆍ1운동이 터지고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자 상해 임시정부 측과 불편해진 우당은 베이징으로 떠나지만 이미 가산을 독립운동에 모두 쏟은 우당의 가족들 앞에는 처절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먹기보다 굶기를 더하고, 단 한 벌의 외출복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입고 외출할 정도로 빈곤이 날로 더해 간다. 보다 못해 조선으로 돌아온 지체 높았던 우당의 부인께서는 기생들의 빨래를 하여 번 돈을 모아 베이징의 남편에게 보낸다. 그런 와중에도 우당은 신민회 창립, 신흥무관학교와 만주 한인촌 동시 건설, 고종의 중국 망명 추진, 아나키즘운동 전개 등 나이를 먹을수록 열렬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결국 이국땅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영하 40도의 살인적인 추위와 허기진 삶을 불꽃같은 단심으로 일관하면서 6형제 중 단 한 명 이시영 선생만이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 왔다. 자진해서 죽음이 기다리는 적군을 향하는 프랑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인 '칼레의 시민'보다 더욱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 우당 이회영 6형제의 기나 긴 형극의 가족 여정이다.

1910년, 결국 나라가 망국에 처하자 2월 24일 경북 영주 출신 이교영 의병장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중국 땅 뤼순(旅順)에서는 3월 26일 안중근께서 순국하시고 전라남도 구례 땅에서는 매천(梅泉) 황현(黃玹)이 "나는 죽을 마음이 없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순국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느냐"고 지성인으로서 책임을 무섭게 자문하면서 절명시 4편을 남기고 1910년 9월 7일 자결한다.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무궁화 나라는 이미 사라졌구나./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을 돌이켜보니/문자 안다는 사람 인간되기 어렵구나.” <매천야록(梅泉野錄)>

이 기운이 전국을 돌아 많은 지사들이 함께 국외로 기반을 옮겨 무장 투쟁을 지속하거나 목숨을 던져 항거하니 1910년 10월 10일 스스로 굶어 죽은 경북 안동의 향산 이만도와 거룩한 사업을 이어받은 아들 이중업, 며느리 김락, 그의 손자 동흠, 종흠, 손녀 사위 등 일족이 있다. 그러나 결국 나라는 속절없이 36년간 일제의 마수 속으로 빨려들어 갔고 결국 2차 세계대전 끝에 1945년, 외국의 힘에 의한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1945년 9월 8일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상륙했다. 하루 뒤 9월 9일 오후 4시, 조선 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 조선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1853~1953년)는 미국 제24군단의 사령관 하지 중장과 제7함대 사령관 킨케이드 제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문서에 서명을 한다. 잠시 후, 총독부 앞뜰에서는 8월 15일 일왕의 항복 선언 뒤에도 23일간이나 날리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가면서 요동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시작되었다. 9월 12일 아베노부유키 총독은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업무연설을 한다.

“우리는 패배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릴 것이다.우리 일본은 조선 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

과연 아베의 말대로 우리는 남과 북이 남의 사상으로 분단되더니, 지역과 지역이, 보수와 진보가, 사용자와 노동자가 분단되어 가고 있다. 우리 스스로 아베노부유키와 당태종 이세민과 청 태종 황태극, 위안스키(袁世凱)를 다시 초청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을사늑약 106년을 맞은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가 이행순 선생 등 75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는 이행순 선생은 곽재구ㆍ박응천 선생과 함께 3인의 의병 결사대를 결성하고 1908년과 1909년에 결쳐 전남 나주에서 의병활동을 염탐하던 밀정을 처단하고 응징했다. 1917년 체포돼 징역 12년의 형을 받고 1924년 숨졌다. 이러한 선열들의 순국과 의로운 사업을 선양하는 일은 인류 모두를 사랑해야 마땅할 우리 홍익 겨레에게 걸맞지 않는 남의 정신과 사상을 다시는 이 땅에 불러들이지 않는 엄중한 방법이다. 대한민국이 존속 하는 날까지 전 국민이 바로 알고, 세계에 바로 전달해야 가장 귀중한 국본(國本)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가르치심이기 때문이다.

 

(사)국학원 원장(대), 한민족역사문화공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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