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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우주와 맞닿는 공간, '여수 진남관' 2012.02.02  조회: 2266

작성자 : 관리자

텅 빈 우주와 맞닿는 공간, '여수 진남관' 
김개천 교수의 건축물로 본 한국미_3

 


뱃길이 훤히 보이는 남해 오동도 앞 언덕 위에 4백여 년 조선 수군의 좌수영이 있었다. 그러나 본영의 건물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읍성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임금의 전패를 모시던 신전과 같은 객사 건물 한 동만 있다.


높이 14미터, 둘레 2.4미터의 거대한 기둥 68개와 지붕 밖에 없는 75칸의 장대한 건물은 창호나 벽체가 없는 통칸의 건축으로, 욕망도 없고 의도도 없는 듯한 텅 빈 몸으로 남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하지만 그 한 채만으로도 우주의 심연이 느껴지는, 그 어떤 엄격하고 장중한 권위도 이곳에서는 무색하게 되는 신성한 장소이다.

 

 


이 성스러운 장소는 군사적 건물로 전쟁을 치르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 남해 바다에 비친 달빛이 건물 천장에 은은하게 되비칠 때면, 한때 이곳에서 전라 좌수사로 있던 이순신의 삶과 죽음, 그리고 고노와 비애의 흔적들이 건물 곳곳에 묻어 있는 듯하다. <선조실록>이나 <난중일기> 속에 드러나는 그는 욕망이나 명예와는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지인이었던 영의정 류성룡 외에는 중앙 정부의 아무와도 연이 없었고 관심 또한 없었다. 전쟁이 깊어질수록 나라의 운명이 그 하나만 바라보게 되면서 부과된 정신적 긴장과 고독은 더 깊어 갔다. 어머니가 죽고 막내아들이 전사한 뒤로는 삶에 대한 애증조차 없이 달 아래서 번민하던 날이 허다했다.


<난중일기>에는 “홀로 빈 마루에 앉아” “혼자서 높은 다락에 기대어” “수루에 혼자앉아”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전쟁의 허무감과 무기력 속에서 무패상상의 그는 달빛 아래 수루에서 밤을 샜던 것이다. 그 시간의 빈 마루는, 전장에서 피폐해진 한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공적의 안식과 평온함을 주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회의하며 삶을 반추하는 시간마저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너무 잔인한 것이다. 아마도 진남관은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상태를 제공했을 것이고, 그의 허무는 우주적 비움으로 치유되었을 것이다.

 

 

자연과 우주가 실로 물질적·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유기적인 통합 관계에 있다고 봤을 때, 인간의 번민과 우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숨’을 불어넣음으로 생명을 갖게 되는 창조의 원형은 인간과 무생물의 관계를 신과 인간의 관계처럼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감성과 인식으로 생명을 가지게 된 많은 예술품들이 그렇게 신이 된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극도로 광막하고 무심한 우주와 자연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어야만 했나보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알랭 샤르티에는 "모든 것이 신들로 가득찼다. 그러나 신들은 현신하기를 거부한다. 신앙을 주는 이 은밀한 존재를 만들어 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종교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산물이다. 어떤 간절한 소망 없이도 평온한 동물이나 저 아름답게 흔들리는 나무에게 종교라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우주는 인간의 행복과 불행에 관심이 없다. 우주 차원에서 인간의 감정과 소망이란 부질없다. 그러기에 그 자체로 아무런 욕망도 없고 어떤 의미도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위대한 우주와 같은 실체를 지상에서 인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진남관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곳은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로 지어진 곳으로, 진실한 의미의 신전이다. 모든 욕망을 없애 버리고 적의도 호의도 없는 비어 있음으로 영원한 것만을 확보한 공간이다. 질량과 간극을 초월한 이 관대한 단순함이 만들어 낸 우주, 그것이 진남관이다.

 

 

 김개천 교수

 2009년 Red Dot Design Award
 2005년 문화관광부 올해의 우수도서상
 2004년 한국건축가협회상 (백담사 만해마을)
 2001년 한국건축가협회상 (무량수전)
 현재 국민대 건축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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