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비춤의 절대 추상-법주사 팔상전
김개천 교수의 건축물로 본 한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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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주사 팔상전 아래로 퍼지는 듯 위로 솟아오르는 상반된 힘과 형태는 장중하면서 유연하나 분산되지 않는 균형으로 화하여 부처님을 상징한다. |
속리산 초입 마치 자연으로 추상이 된 듯한 큰 바위 사이의 석문을 지나면 굴참나무 그늘 아래 고려 초 마애불이 가는 허리와 대비되는 도톰한 손과 발의 생동감으로 선견(禪見)을 드러낸다. 정면으로는 팔상전이 양 옆의 속리산 자락을 협시불로 하고, 구름을 후불탱화로 삼아 천상에서 방금 내려온 듯 의연히 서있다. 불탑의 탑륜에 드리워진 햇살과 함께 세상은 원래 있는 그대로 맑게 다가선다. 한국 건축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5층 목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무덤에서 발전하여 부처님을 나타내는 추상적 상징이 된다. 높은 탑이 만들어내는 건축적 경관은 자연으로 둘러싸여 그 어떤 장식보다 장엄하게 불세계를 표현하며 금강문에서부터 팔상전으로 유도하고 대웅전 너머 빈산으로 나아가게 한다.
추상은 단지 상징만이 아닌 추상만으론 설명을 다할 수 없는 듯 실제에 맞닿아 있을 때 그 숭고함이 빛난다. 상상과 사실을 넘는 비사실적 형태 체계로 깨달음을 유도한다는 것은 추상이 삶 속에서 그 기능과 효용을 발휘하는 것이다. 건축이 이룬 이 역할은 실은 모든 유기체가 지닌 특질이기도 하다. 심미적 측면과 실용적 측면은 정신적 주관성과 실용적인 객관성의 조화이다.
법주사 팔상전은 추상 정신과 공간이라는 두 가지 지주가 빛으로 발하고 존재하는 곳이다. 공간으로 표현된 추상은 생생한 본연의 장소로 사람을 거부하지 않는다. 대상으로서의 부처는 보지 못하지만 어떤 조각보다 생생하게 추상으로서의 불성을 느끼게 한다.
5층 지붕의 장중함은 추녀 끝을 들어 올린 처마의 선으로 육중하나 가볍게 보이며 균형을 이룬다. 상반된 힘과 형태가 만드는 장중함과 가벼움은, 불성이라는 관념적 형상으로 상징된 신의 내부로 들어가게 하며 꽉 짜여진 내부는 빛과 어두움을 혼합해 놓아 건축 구조와 골격들은 서로 아무 상관없는 체계처럼 영원의 실상을 체감하게 한다. 신의 순수한 주관성을 자기 사유로 실현케 하는 형태를 벗어버린 추상이다. 모든 것이 정신적인 중심에서 동시에 만나며, 실재하는 것들과 관념적인 표상들이 미광으로 서로 의미를 갖는 내적 조합이 이루어진다. 황홀함 속의 고요한 감동이 빛과 함께 우주의 흐름으로 움직이며, 그 자체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절대 추상이기에 더 이상 다른 것으로 이야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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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팔상전 내부 꽉 짜여진 건축 구조와 골격들은 아무 상관없는 체계처럼 영원을 체감하게 하며, 사방에 계신 불상과 빛과 어두움이 혼합되어 공간으로 불성의 실재를 느끼게 한다. |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의미가 추상적 미로서 전달되는 것이듯 추상은 숭배를 원치 않으며 깨달음을 유도한다. 여러 표상적 장치들로 드러나는 전능한 힘에 대한 의지와 숭배는 결국은 힘이 가치라는 말로 설명되지만, 지배함 없이 평온을 주는 역할로 절대를 체현하게 하고 숭고한 상징을 아름다움으로 정화시킨다. 인간의 모든 설명과 이야기 속에서 미 그자체로 이해되는 팔상전은,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고 살아있는 본성만으로 아름다움을 획득한 듯한 속리산 입구의 정이품 소나무의 숭고함과 같다.
신에게는 철학과 목적이 필요 없으나 모든 존재자에게 완벽히 작용하듯 팔상전은 무용으로 우아한 아름다움을 이루는 묘유위용(妙有爲用)의 건축이다. 형태를 넘어 모든 모방형식을 탈피한 순수함과 그것 자체의 정신적 영역만을 주장하지 않고 내부에 모셔진 불상의 자비로움에도 공양을 올린다. 인간의 일상까지도 수용하여 진지한 예술적 추구뿐 아니라 삶 전체를 포용하고 추연(推演)한다. 이는 보다 아름다운 통합체를 만드는 절대 추상으로서 고요함과 비춤의 빈 탑이 된 건축이 구하는 표징이다.
김개천 국민대 교수
2009년 Red Dot Design Award
2005년 문화관광부 올해의 우수도서상
2004년 한국건축가협회상 (백담사 만해마을)
2001년 한국건축가협회상 (무량수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