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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무(無無)의 건축 거조암 영산전 2012.11.17  조회: 2651

작성자 : 관리자

무무(無無)의 건축 거조암 영산전

김개천 교수의 건축물로 본 한국미


 
 동양 예술의 희구는 끝내 궁극에 도달할 수 없어야 한다. “우러러 볼수록 더 높아지고 뚫을수록 더 단단해지고 앞에 있어 쳐다보면 어느덧 뒤에 있는” 끝이 없으며 심원하고 아득한 신(神)의 경지로서 말로는 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추구는 형태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고 소리 나지 않아 조용하며 텅 빈 것 같으나 희미한 상태가 없는 상태, 즉 형상이 없는 형상으로 그 신비함을 절로 나타내야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조사당,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몇 안 남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건축 중의 하나인 거조암 영산전은 남아있는 동시대의 다른 건축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창적인 건축적 공간을 성취하고 있다. 그 표현 방법은 지극히 평범하여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은 듯 여겨지는 건축이다. 건축이기보다는 선(禪)의 현시이며 즉물적 표현으로 인하여 사물 그 자체이다. 미의 형상에 대해 충실하려다 보면 긴장을 요하고 결국 그 긴장의 해소를 지향하려 하겠지만 영산전은 이미 일체와 화해하여 실체와 허공, 부처와 중생, 그리고 건축과 사물의 구분은 없다.

원래 건물의 좌우와 뒷면의 세면을 흙의 둔덕에 묻혀 있는 듯 만들어 화려하고 웅장한 측면과 배면을 숨겨서 일부러 보여주지 않았다. 오로지 작은 마당을 통한 정면의 일부만을 느끼게 되어 있었는데, 정면이라는 것도 부처님을 모신 금당인데도 불구하고 창고와 같이 허술하고 밋밋하기 그지없었다. 창고나 강당 등의 용도로 지어졌으나 개축을 통해 금당으로 재창조된 것이기에 그러할 수도 있겠으나 개축 후에도 철저하게 없는 것 조차 없는 무무(無無)의 건축으로 있으려고 하였다.

특히 건물 앞의 좌우에 있던 2칸짜리 초라한 건물과 또 다른 요사체는 거대한 창고와 같은 영산전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왜소하여 일견 부조화로 잘못 지어진 건축인 듯 보였다. 건축이라고 하면 훌륭한 외관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영산전은 나타내려고 한 것이 없다. 오히려 건물을 인공적 둔덕 뒤에 숨기고 한적하고 쓸쓸한 마당의 작은 석탑과 함께 영산전의 평범한 출입문만 보여줄 뿐이다. 모든 것이 작고 초라한 듯 아무 것도 느끼게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추상적인 충동 가운데 가장 깊은 충동이라는 어둠을 이상으로 여기는 예술과 비슷하다. 일관성 있는 예술 작품 속에서는 작품의 정신이 가장 무미건조한 현상 속에서도 나타나 현상을 감각적으로 살려 놓듯,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영산전 앞마당의 무위적 적조는 일체에서 자유로워 말 한마디 건넬 수 없게 한다.

무위도 벗어버린 마당을 통과하여 영산전의 내부로 진입하게 되면 왜소하나 담대히 미소짓는 듯한 부처님과 함께 526분들의 작은 나한들을 만나게 된다. 초라한 듯 한 외관과는 달리 옆으로 그리고 위와 아래로 어둑어둑한 장대한 공간에 여기저기 절제되어 들어오는 것 같은 빛은 다양한 어둠의 깊이와 광대무변 (廣大無邊)한 우주의 적묵(寂默)아래 정지되어 있는 것 같다. 모든 나한은 흰색의 옷과 얼굴을 하고 있어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받아들이고 흰색 하나로만 허공 속의 황홀함으로 가지가지 표정과 색색의 불성으로 선좌(禪座)하고 있다.

완전한 작품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한다면 각 요소가 ‘화해되지 않은 상태 속에서 실제로 화해가 가능한 상태’ 라 할 수 있다. 영산전은 산만하거나 모순에 찬 요인들을 경험하거나 은폐할 필요도 없고 화해 안 된 상태로 내버려둘 필요조차 없다. 가지지 않으면서 모든 부처를 만나게 한다. 그 태허와 같은 내연의 고요함은 건물의 모든 부재속에 스며들어 외연으로 다시 드러나게 하는 침묵조차 없는 공간을 통해 건축은 없고 없고 부처가 된 조사 (祖師)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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