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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이야기21 - 동학은 민족 주체성의 원형 2009.10.06  조회: 2088

작성자 : 이형래

국학이야기21 - 동학은 민족 주체성의 원형

 

19세기 민족주의의 목표는 체제개혁과 조국수호

‘봉건적 왕조체제의 개혁과 외세침략으로부터 조국의 수호.’
이 두가지는 19세기 후반 조선 민족이 해결해야 할 2대 과업이었다. 고민은 이 두가지 중 어느 하나에 치중할 수 없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데 있었다. 체제개혁을 우선하면 조국수호가 소홀해지고 조국수호에 치중하면 그 명분 때문에 봉건적 왕조의 체제모순개혁이 밀려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황사영 백서’에서 보듯이 외국의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체제를 전복하고 종교의 자유를 얻겠다는 개혁의 발상은 어떤가? 1000여 대의 군함과 5만~6만명의 정병으로 조선을 침공하기를 요청한 황사영의 탄원은 반국가, 반민족의 행위밖엔 될 수 없다.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 등 개화운동도 외세를 빌려 정치개혁을 시도한 예에 속할 것이다. 외세침략에서 국가수호를 외치면서 사회개혁을 미루면 왕조체제의 유지로 일부 지배계급만이 이득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민족의 이익과 지향점이 담긴 국가수호는 아니다.

동학의 실패가 뼈아픈 이유

19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는 사회적 차별과 정치적 억압, 경제적 수탈(삼정의 문란) 등으로 민중에게 저주스러운 세상이었다. 민중의 동의나 참여를 결여한 어떤 운동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동도서기(東道西器)’나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때문에 체제개혁과 사회변혁이란 양대 과제를 동시적으로 수행했어야 했다. 이것이 19세기 한민족이 실현해야 할 민족주의의 목표였다.

“오늘날의 신하된 자는 보국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부질없이 녹위(祿位)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간(忠諫)하는 말을 요언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匪徒)라 하여,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학대하는 관리가 많도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흐트러져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아가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도다…. 공경 이하 방백수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위난은 생각지 않고 부질없이 일신의 비대와 가문의 윤택만을 꾀하고 과거(科擧)의 문을 돈벌이의 길이라 생각하고 응시 장소는 매매하는 저자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일지라도 나라에 몸 붙어사는 자라 국가의 위망을 앉아 보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조선 사람끼리라도 도는 다르나 척왜와 척화는 그 의(義)가 일반이라…. 각기 돌려보고 충군우국지심(忠君憂國之心)이 있거든 의리로 돌아와 상의하여 같이 척왜척화하여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않게 하고 동심합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올세라.”

1894년 동학군의 ‘창의문(倡義文)’ 내용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봉준의 동학혁명은 당시 민중이 바라던 두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동학혁명군의 호소에도 관군은 왜군과 합세해 동학군을 참살했다. 전봉준 장군의 접사 노릇을 하던 김경천과 한인현이 전장군을 잡아 일본군에 넘겼다. 동학혁명의 실패가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혹독한 불행을 안겼는지는 우리는 똑똑히 알고 있다. ‘창의문’에서 보인 전봉준의 모습은 우리가 실현해야 할 민족 주체성의 원형이다.

이형래 [세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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