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이야기22 - 높 낮이 없는 세상을 향한 투쟁
뿌리가 같기에 인간은 평등한 존재… 동학은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려는 몸부림
‘시천주(侍天主)’. “내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신다”는 동학의 근본사상이다.
그 하느님은 신분과 성, 인종의 차별 없이 하나이신 임이다. 역사하는 임이 다를 바가 없다. 임금님의 하느님, 종놈의 하느님이 다를 수 없다. 다르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지 하느님이 아니다.
왜 한민족은 한울, 하늘하며 크다, 넓다, 많다는 뜻을 ‘한’과 ‘하’로 나타냈을까? 천부경은 하나(一)로 시작해 하나로 끝난다. 무한과 유한이 물고 물리는 고리의 연속이다. 유한 속에 무한이, 무한 속에 유한이 있다. 하나가 다자(多者)로 되고, 다자가 하나로 되는 과정이 창조의 생성원리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다.
하느님은 다르게 만들지 않아
우리의 한님은 우주 생성 이전의 본성이라 했다. 그것은 우주만물에게 내재하는 얼이다. 그것은 하나였기에 차별이 없다. 나타난 현상은 ‘한’의 용변(用變)일 뿐이다. 우주에 있는 것은 숨을 쉬는 것이든 아니든 그들을 있게 한 원인자는 하나다. 한 뿌리에서 나온 가지는 다를 바가 없다. 생성의 과정에서 위치가 달라졌을 뿐 시작은 하나였다. 모두가 하나에서 나왔다는 같은 뿌리생각의 실현노력이 동학운동이었다. 그래서 계급제도의 타파와 먹이 사슬의 나쁜 습성을 안고 있는 사회제도의 개혁을 동학은 투쟁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한’은 곧 ‘공(空)’의 자리다. 그것은 반야심경이 말하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의 것이다. “낳는 것도 꺼지는 것도 아니며, 때 끼지도 깨끗지도 않으며,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의 역(逆)이다. 생성의 역순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현상이 ‘공(空)’으로 표현된 본성의 자리며 그 본성의 자리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계라는 말이다.
우리의 ‘한’ 그리고 ‘하나’라는 소리가 담고 있는 의미는 ‘같다’이다. 한 가지라는 뜻이다. 한 가지 한통속에 위아래가 있을 수 없다. 역할이 주는 직책이 다를 뿐이다. 현상계는 관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관리는 체계요 기능이다. 이런 삶의 고리에서는 자리가 지위다. 하지만 한 가지 본성이다. 마음속에 모신 그 본성이라는 신령(內有神靈)은 누구에게나 같다. 우주에 가득한 ‘기(氣)’는 그 자체로서 다를 게 없다. 그 기가 지극한 기로 될 때 그것은 내 맘 속의 한울님이요, 하느님이 되는 것이다. 다 같은 한 가지 임을 모시는 인간에게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는 것 그리고 앞뒤가 안 맞는 것이 부조리다.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몸부림이 동학이다. 동학운동을 ‘평등을 위한 피압박민의 해방운동’이라 규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학의 평등사상은 역사의 한 순간에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초의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면서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자리한 가치관이며 인생관이며 세계관을 창출한 사유의 틀이었다. 어떤 사상이 나오려면 사회적 토양이 조성되고 가꿔져야 한다. 세종대왕이 “백성이 하늘이어늘(民者王所天)”이라고 ‘용비어천가’에서 말한 것이 바로 한민족의 평등에 대한 전통적 인식과 의식의 전형이다. 임금의 하늘, 백성의 하늘이 다를 바가 없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격없는 어우러짐이 우리가 생각하는 평등이었다. 하늘땅이 하나인데 하물며 사람 사이에서의 높낮이는 한민족적이 아니다.
이형래 [세계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