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통일운동의 기초
대립을 해소하는 조화와 협동의 지혜 담긴 ‘국학’
나는 행복한가? 그리고 나는 평화로운가?
이 질문에 “예”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행복하지 못한 평화도, 평화롭지 못한 행복도 있을 수 없다. 평화란 대립과 갈등이 없는 균형과 형평이 이뤄진 질서의 상태다. 이런 상태가 행복이다. 평화나 행복은 빛과 그림자의 관계다. 때문에 만나는 대상과의 조화로움, 그리고 상생의 상태를 평화로움이라 규정할 수 있다.
나의 육체와 내면의 관계는 평화로운가? 가족과의 관계는 행복한가? 사회생활 속에 만나는, 혹은 부딪는 온갖 대상과의 관계는 평화스럽고 조화로운가? 나와 국가와 민족 간에는 갈등이나 불만이 없는가? 나아가 자연환경과는 상생적인가? 다시 말해 나의 가치관과 앞서 지적한 대상 간에는 갈등이 없는가? 종교와 이념과의 관계에서 나는 평화로운가? 국제 정치에서 대한민국과 타국 간에는 대립이나 갈등이 없는가? 이런 관계에서 대립과 갈등이 없는 관계를 지탱해주는 질서가 정착된다면 평화와 행복은 성취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적 능력이 자유로이 실현되고 홍익적 인격형성의 가능성이 보장되는 상태다. 참된 평화의 질서는 폭력에 의해 강요된 질서가 아니다. 힘의 균형이 만들어내는 평화는 영구적일 수 없다. 조화와 상생의 질서가 보장되는 삶만이 행복한 평화다.
힘으로 만든 평화는 ‘불완전’
천지인(天地人)이 모양새는 다르지만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동근이형(同根異形)의 삼원(三元)사상은 평화의 기본 틀이다. 천지인이라는 삼재(三才)가 융합된 우주의 질서는 평화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준다. 우주의 운행만큼 평화적 질서를 보여주는 것은 없다. 이런 상생과 조화 그리고 창조의 얼이 담긴 것이 천부경이며 ‘홍익정신’이다. 윤리적 배려를 대상에게 베푸는 마음이 홍익정신이다.
그 대상은 우리가 접하는 하늘, 땅, 사람이다. 하늘 속에 땅과 사람의 얼이, 땅 속에 하늘과 사람의 얼이, 사람 속에 하늘과 땅의 얼이 담겨 있다. 여기에 땅위의 모든 사람은 하늘 지붕 아래 한 식구라는 ‘지구인 의식’이 나오는 것이다.
국학의 사명은 오늘의 한민족에게 우리의 역사를 통해 평화를 만들어내는 ‘평화기술학(peace technology)’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학이 통일의 사상적 공감대를 제시할 수 없다면 무의미하다. 통일운동과 평화운동은 불가분이다. 그 이유는 남북의 분단과 갈등이 이 땅의 불안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통일을 열망한다. 지금의 남북관계는 평화가 아니다. 분단과 대립이 상호간 군사적 위협을 파생시키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고 이 때문에 안보제일 우선주의라는 ‘힘’의 논리가 등장했다. 이런 상황은 모든 가치를 안보 아래 두었다. 안보 논리에 바탕한 정권은 ‘인권(人權) 안보’를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다.
과거 정권이 단군 이래의 민족적 숙원인 보릿고개를 이겨내고도 역사의 심판대에 서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인권안보의 경시 때문이다. 이런 원인 제거의 한 방법이 통일이다. 그래서 통일, 통일하며 통일지상주의가 큰 소리를 낸다. 하지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통일의 당위성 때문에 통일의 폭력적 수단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통일운동은 통일 그 자체보다 통일의 과정이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더 중대한 사안일지 모른다. 통일운동이 평화운동으로 승화돼야 할 소이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통일운동은 세계적 평화운동으로서의 관심을 끌 수가 없다.
우리의 통일운동이 세계적 평화운동으로 확대될 수 없었던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통일운동이 평화운동으로 정착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우리가 갖는 민족주의적 성향 때문에 세계 평화를 위한 보편성이 결여되었다는 것도 짚어볼 일이다. 동북아의 평화가 걸린 한반도의 통일문제가 어떻게 국제적 평화단체들이 바라보는 보편적 평화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통일운동은 평화운동으로 세계가 공감하는 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통일은 오랜 시간에 걸쳐 평화로 가는 과정의 결과다. 그 과정이 평화스럽지 못한 통일은 분쟁의 불씨를 그대로 안게 된다. 이 때문에 ‘평화적 통일운동’이 통일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고 있다.
단군의 이상과 비전 ‘홍익인간’
1990년에 통합된 남북 예멘이 4년 만인 1994년에 내전 상태로 들어간 데서 과정의 중요성은 입증된다. 이런 비극적 현실은 평화를 외치면서도 평화 창조의 기술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평화의 창조는 뇌에서 나온다. 좌뇌와 우뇌의 갈등에서 좌뇌의 우세가 경쟁과 지배로 몰아간다. 그렇다면 좌뇌와 우뇌가 조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민족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때를 민족 융흥기라고 부를 수 있다면, 민족 융흥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 의식과 공동체적 행복일 것이다…. 단군 숭배가 강화될 때에 조선의 국력이 강성하였다.”(한영우:우리 역사와의 대화)
그 이유는 홍익인간이라는, 단군의 이상과 비전(vision) 때문이다. 뿌리를 찾아 한마음으로 조화?상생을 이루며 평화를 찾았던 선조들의 지혜이기도 하다. 천지인이 하나인데 평화롭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이 세계 종교백화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홍익의 평화사상이 정신적 토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뿌리가 튼튼하면 아무리 가지가 많아도 건강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홍익인간과 이화(理化) 세계의 정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보였다. ‘두렛일’과 ‘가래질’이다. 이러한 조화와 협동은 평화의 속성이며 상징이다. 여기에 바탕하지 않은 통일운동은 남북 예멘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학은 남북에 통일운동의 공통된 사상적 길라잡이를 안내하는 것이 목적의 하나다. 통일운동을 평화운동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사유체계를 새로이 세우는 것도 국학의 몫이다.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지혜가 국학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경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국학원을 설립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인 평화와 통일을 위한 갈무리이기 때문이다.
일지 이승헌 총장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대학교)
국학원설립자, 현대국학, 뇌교육 창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