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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편의 겨울 정경과 섣달 2009.12.29  조회: 3842

작성자 : 장영주

두 편의 겨울 정경과 섣달


우리의 선조들은 한 해의 시작을 봄으로 보지 않고 겨울로 보았다. 추운 겨울이기에 보이지는 않지만 땅속 깊이 이미 봄을 잉태하고 생명이 다시 일어섬으로 동지섣달인 것이다. 한 해의 시작인 겨울에, 지금은 누구도 상기하지 않지만 삭풍 같이 매서운 두 가지의 역사적인 아픔이 있었다.

하나는 1598년 12월 노량 바다의 피바람 겨울이며 또 하나는 이로부터 38년 뒤의 1636년 남한산성의 치욕의 겨울이다. 일설에 의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말년에 어렵게 얻은 장남을 잃고 3일 간 울던 끝에 결심한 조선 정복의 7년 전쟁이 끝나는 해, 끝나는 달, 끝나는 날, 끝나는 시각의 노량의 바다는 겨울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 전장의 끝을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려 결심을 했기에 갑주를 벗고 계속 북을 치면서 독전을 하였다.

노량을 자신의 마지막 전장으로 삼은 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적에게 간절하게 노출 시키고 있었다. 이를 본 시마즈 군대의 조총 저격수들이 급히 선상의 회의를 한다. “저기 급히 다가오는 조선의 대장선에서 북을 치고 있는 저 늙은 사람은 누구냐?” “혹, 이순신이 아닐까?” “아니다, 장군이 저런 복장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더구나 이순신이 누군가? 우리 군대(왜군)를 모두 수장시키려는 조선 최고의 명장이 아니더냐!” 설왕설래 끝에 “무조건 쏘고 보자”는 합의 하에 10여 개의 조총이 불을 뿜고 조선군의 장수 같은 늙은이는 바로 쓰러진다. 이순신이시다.(통영 충렬사 박형균 이사장 증언) 이순신장군은 “나는 도를 다하기 위하여 총을 맞은 것이다(은봉 야사별록, 일출사 85쪽).” 라면서 결국 숨을 거두시니 그 곳은 1598년 12월 17일(음력11월19일) 오전 10시경 차가운 겨울의 노량 바다이다. 그로부터 두 시간여, 마침내 전투는 끝이 나고 임진왜란은 속절없이 종료 된다.

38년이 지난 1636년 겨울 연말, 남한산성에 갇혀있는 인조대왕과 조선군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유난히 맹위를 떨치는 추위였다. 망루의 군사들은 손이 곱아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고사하고, 서로 말도 제대로 나눌 수 없지만 유일한 ‘방한복’인 가마니조차 모든 병사들에게 지급할 수 없었다. 없어서 못 먹고, 추워서 잠 못 이루니 몽골을 주무르고 대륙을 경영하려는 청나라 팔기군과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홍의포와의 대적은 애시 당초 무리한 일이다.

12월28일, 몇 사람의 술사가 ‘오늘은 싸우든 화의(和議)를 하든 모두 길한 날’이라고 일진(日辰)을 뽑았다. 독전어사 황일호 등으로부터 빨리 결전해야 한다는 재촉성  건의도 들었던 터라 술사들의 허망한 얘기에 솔깃해진 도체찰사 김류는 병력을 선발하여 적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이튿날 김류는 산성 북문 아래 골짜기에 있는 적진을 공격하니 노살(勞薩)등이 이끄는 청군이 던져 놓은 ‘미끼’인 조선인 포로를 구하고자 앞뒤를 보지 않고 공격명령을 내린다. 일부 장졸들은 ‘함정’일 수 도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고 몸을 사리자 체찰부의 비장(裨將) 유호(柳瑚)가 군율을 적용해야 한다고 김류에게 건의했다. 유호는 머뭇거리는 장졸들에게 김류가 건네준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억지로 떠밀린 장졸들은 할 수 없이 달려 내려갔다. 청군은 처음에는 밀리는 척 유인하다가 일시에 돌아서 사방에서 기습 공격을 시작하였다. 조선군의 사기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청군의 칼날 앞에서 유린되고 있는 장졸들이 남한산성의 가파른 오르막을 뛰어올라 퇴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극소수의 장졸들만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가뜩이나 정예병이 부족한 남한산성에서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학해(池學海), 이원길(李元吉) 등 중견 지휘관 8명을 비롯하여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12월 30일은 바람이 몹시 불고 음산한 날이었다. 이 날 하루 종일 청의 대군이 광나루, 마포, 헌릉(獻陵) 등지에서 이동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나만갑의《병자록(丙子錄)》에 따르면 이 날 행궁 근처에 까치들이 모여 들여 집을 지으니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길조(吉兆)라고 좋아했다. 가엾은 조선의 왕과 신료, 백성들은 생명이 촌각에 걸린 비상사태를 앞두고도 한갓 까치집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조대왕은 다음해 1월 말, 성문을 나와 최하급의 관리복을 입고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수 없이 절을 받쳐 피가 머리에서 가슴까지 흥건하게 흘러내린다. 그 뿐이랴, 조선은 임진왜란에 조선인구의 45%를 잃었음에도 또다시 60만 명의 포로를 청과 몽골군에게 끌려가게 내어준다. 청태종의 아버지 아이신교로(애신각라/愛新覺羅) 누르하치는 누구인가? 그는 연개소문의《금해병서(金海 兵書》"를 머리에 베고 자면서 한시도 고려의 대의인 고토수복, 대륙정복의 뜻을 잊지 않았던 인물로 만주는 다른 족속이 아니라 우리 겨레였음을 우리는 바르게 알아야한다.

세계 최강대국을 세운 청태조의 이름이 우리말로 ‘김누얼’이다. 그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로 “愛新은 신라를 사랑하고, 覺羅는 신라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옛 조국 신라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옛 신라의 망명 집안의 출신인 것이다(몽배금태조; 백암 박은식 저). 우리나라 최초의 국사교과서인《신단민사(神壇民事)》에 의하면 애신각라는 계림(鷄林) 김(金)씨의 후손으로 신라가 망한 후 경주 김씨 경순왕의 망명 왕자들이 금강산과 흑룡강성 그리고 백두산 속으로 흩어졌다가 훗날 제각기 힘을 모아 다시 흥기하여 나라를 만들었는데 바로 그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근세조선의 임금과 위정자들은“재조지은을 버리고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에 어찌 굴복할 소냐? 나라의 존망보다 명조(明朝)에 대한 효도가 우선이다.”면서 한 겨레임을 망각하고 명(明)에 죽도록 사대하여 온 것이 바로 1636년 겨울 남한산성의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비밀 같은 핏줄의 역사를 전하는 책이 바로 1904년 김교헌이 지은《신단민사(神檀民史)》이다.

신단민사는 단군조선부터 고종황제까지의 우리 겨레의 참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김교헌은 고종 때 대사성, 문헌비고찬집위원,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저명한 독립운동가로 이 책이 발간 될 때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던 시기였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군과 동포들에게 읽힐만한 역사서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던 저자가 규장각과 당시 전해지던 각종 사서를 섭렵하여 저술했던 역사서로 광복 이후 1946년 재출간되니 "신단민족의 역사서"이다. 단군과 동아시아민족사를 저술한 유일한 역사서이자 교과서로 그 가치와 의미를 평가받고 있다. 이제 새로운 해가 겨울을 나면 생명으로 다시 설 것이다. 새해 섣달 초하루부터는 겨울의 힘겨운 역사적 두 가지 사실과 정경이 다시 되풀이 되지 않도록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우리의 임무를 바로 알아 나와 민족과 인류를 살리는 필사즉생의 기백으로 창조적인 사명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 

 

장영주 | (사)국학원 교육원장 겸 한민족 역사문화공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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