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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태극기
오는 3월 26일은 32세의 청년 안중근 의사義士가 순국한 날"입니다.
동양 평화를 염원한 독립투사이자 애천愛天, 애인愛人, 애국愛國의 경세가經世家이며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 장군이 일본제국주의의 적장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당당하게 재판을 받고 순국(殉國)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거쳐 재빨리 서구화로 무장하고 대륙 침탈의 야욕의 일환으로 1592년의 임진왜란과 꼭 같이 대한제국을 첫 희생자로 삼았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 1894년 동학혁명, 1904년 러일 전쟁의 승리를 빌미로 일제는 한반도에서 기득권을 차지했고, 대한제국은 그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안중근은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을 몸으로 실천하십니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다. 개인 자격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고 외칩니다. 재판정에서 심문에 이끌리는 답변 대신, 우리 민족의 분노를 당당히 진술하십니다.
“이번 의거는 대한의용군의 참모중장 자격으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서 적장 이토를 살해한 것이지, 결코 개인 자격으로 행한 행위는 아니다. 적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나를 형사 피고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한 행위이다. 내가 독립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전부 일본의 기만정책 때문이다. (중략) 우리 대한의 황제 폐하를 퇴위시키고 사법, 외교권을 박탈하고 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하는 등 이토의 죄상은 헤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교활한 수단으로 조선 인민이 일본의 보호 정책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이 허위 선전을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이토를 죽여 조국의 독립에 대한 정당성을 외치기 위하여 3년 전 본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나는 다시 언명한다. 내가 하얼빈에서 이토를 살해한 것은 이토가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독립전쟁의 일부분이다. 또한 우리가 일본 법정에서 일본의 재판을 받는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탓이다. 조국의 의병들이 항상 일본군과 싸우는 것도 독립전쟁의 일부분이다. 나는 4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조국을 위하여, 또한 2천만의 우리 동포를 위하여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간악한 적을 살해한 것이므로, 나의 목적은 이처럼 정의로운 것이다. 나는 국민 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몸 바쳐 일을 끝냈을 뿐이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한 일이므로 후회할 일은 없다. 나의 염원은 다만 조국의 독립, 이 한가지뿐이다."
‘불의 혀’ 라는 별명의 안중근의사의 열변을 듣고 있던 재판관이 "질문에 대한 답변만을 하도록 주의시켜라."라고 하자, 큰소리로 오히려 재판관을 꾸짖습니다. "나는 이토의 악랄한 정책을 어떤 방법으로든 세계에 폭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하면서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죄상 열다섯 가지를 주장합니다. 당황한 재판관은 비공개 재판으로 하기위해 만장한 방청객들을 퇴장시키는 소란을 일으킵니다. 안의사의 재판을 지켜본 영국<그래픽>의 찰스 머리모 기자는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쓰고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으며, 이토히로부미는 그의 입을 통해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락했다.” 라고 평가합니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러시아인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 변론을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관선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당당한 주장에 두려움을 느낀 일본은 허겁지겁 형을 집행함으로써 옥중에서 집필하시던 ‘동양평화론’은 미쳐 완성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저서에는 당시 뤼순旅順을 동양 평화의 근거지로 만들고 한, 중 ,일 공동 군대를 편성하며, 동양 3국의 국민이 1전씩 걷어서 동양평화 유지기금을 조성하고, 공동은행을 만들어 공용 화폐를 발행하자는 주장이 나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선각자적인 제안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안중근이 독실한 가톨릭신자라고 알고 있으나, 식민지의 의인은 종교로부터도 차별을 받는 것인가? 안중근이 대학 설립을 상의하기 위해 신부 뮈텔을 만났을 때, 뮈텔은 `교육이 높아지면 신앙심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반대합니다. 나아가 의견을 굽히지 않는 안중근의사의 뺨을 때립니다. 그 뒤 안중근은 천주교의 실체에 대해 깨닫고, 열심히 배우던 프랑스 말과 책을 집어 던지며 분노합니다. 독립운동사 역사상 가장 비밀스러운 단체였던 신민회의 데라우찌 총독 암살시도 사건의 폭로와 관련자 105명 전원 검거는 누구에 의한 일인가요?
안중근 의사가 서거한 다음 해, 사촌 동생 안명근은 거사 전, 비록 적이지만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양심으로 괴로움에 못 이겨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합니다. 그 엄청난 그 내용을 들은 빌렘 신부는 상급자인 뮈텔신부에게 보고를 하고, 뮈텔신부는 일본의 아까보 장군에게 밀고를 하게 됩니다.
1911년 1월 11일 뮈텔신부의 일기입니다. ‘빌렘 신부가 편지로 조선인들이 총독에 대한 음모를 꾸민다고 알려왔는데 그 중심에 야고보(안명근)가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아까보 장군에게 알리고자 눈이 많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찾아갔다.’ 애국지사의 고해성사 내용을 가지고 신부가 밀정 노릇을 한 것입니다. 뮈텔 대주교는, 신민회를 밀고하는 댓 가로 명동성당 앞을 넓히는 허가를 받아냅니다.
여하튼 안중근께서는 마지막 바라는 것이 없냐는 사형집행관의 물음에 “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하였으니 5분만 형 집행을 미루어 달라.”고 하시고, 책을 다 읽으신 후 “감사하다.”는 말씀으로 의연히 운명을 달리하십니다.
이로써 안중근께서는 영원히 휘날리는 태극기가 되신 것입니다.
장영주 | (사)국학원 국학교육원 원장, 한민족역사문화공원 원장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