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4월의 태극기
우리나라의 역사 중 국체 존망의 가장 극적인 상황을 꼽으라면 단연 1597년 9월16일의 울돌목전투일 것입니다. 만약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해일처럼 짓쳐들어 오는 300여척의 왜 수군을 패퇴시키지 못하였더라면 조선은 사라졌을 터,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가장 아름답고도 진리 자체인 태극기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였을 겁니다.
이순신 장군의 기백과 혼은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완벽한 군신軍神이지만, 그 분의 세상적 삶은 역사상 가장 가난하고 가장 불우한 장군이었습니다. 장군은 단기 3878년(서기 1545년) 음력 3월 8일 (양 4. 28), 양반의 후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몰락하여 곤궁한 서울양반가는 아산의 처갓댁으로 옮겨오고 장군은 외가에서 성장하였습니다. 문관의 뜻을 접고 무관의 꿈은 품고 노력했으나 등용이 동년배보다 훨씬 늦었고, 과거도 겨우 턱걸이로 합격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공직자가 되자 무서운 자기관리와 계발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살리게 됩니다. 전장에서의 죽음 앞에 늘 앞장 서는 장군과 성인의 길을 동시에 절차탁마切磋琢磨하시면서 결국 성웅聖雄으로 불리우시게 됩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의 목적을 ‘전라도인의 씨를 말리는 것’ 임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 역시 없다.)란 일관된 신념으로 결국 나라를 구합니다. 당시 왜군이 군량미를 육로로 운반하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약 한 달이 걸려 도착하고, 40~50명의 왜병들이 그 우마차를 호위를 해야 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정작 서울에 닿아서는 다시 돌아가는 호송군의 식량까지 필요하니 전략적으로 별로 이득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산포에서 남해를 거쳐 울돌목을 빠져 나와 북상하는 뱃길은 날씨가 좋으면 배 한척에 300백석의 군량미를 실고 3~4일이면 마포에 닻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왜군에게는 조선 수군과 그 사령관 이순신이 얼마나 목에 가시처럼 성가시다 못해 두려운 존재였을까.
결국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보면 ‘싸우지 말고 도망쳐라.’는 명령을 하달합니다. 그러나 당시 세계최강의 군사력으로 7년이나 전쟁을 해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히데요시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됩니다. 결국 임진왜란은 조선의 빈사의 상처뿐인 승리가 됩니다. 역사학자나 군사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최종적으로 히데요시와 이순신장군의의 전쟁이라고도 말합니다. 일본의 전지전능한 절대자와 조선의 왕으로부터 절대 질시와 불신을 받던 한 불우한 장군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에서 불가능한 전투를 뒤집어 승리하시던 날 “이는 실로 천행天幸이었다.”라고 적습니다. 하늘이 돕고, 울돌목의 물길이 돕고,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양안을 하얗게 덮은 채 ‘우리 장군 이제 돌아가셨다!’ 면서 가슴을 친 조선의 백성들의 한 맺힌 승리였습니다. 천지인이 아우른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뒤, 이순신 장군의 셋째 아들 ‘면’이 아산에서 왜군의 보복습격을 당해 어머니를 보호하다가 적군의 칼에 죽음을 당합니다.
장군께서 그토록 정성껏 봉양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바로 그 해입니다. 더위를 먹었다고 마냥 측은해 하던 막내아들을 영원히 앞장세웁니다. 봄에는 어머니를 잃고, 가을에는 자식을 떠나보냅니다. 진중이라 차마 울지도 못하는 그 날, 피를 토하듯이 일기를 남기십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시는 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살아 있은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같이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 만은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 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이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나기가 일 년 같구나!"
-난중일기 1597년 10월 14일-
이로부터 장군은 급격히 쇠약해집니다.
"어두울 무렵이 되어 코피를 한 되 남짓이나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고 눈물짓곤 하였다. 어찌 다 말하랴!
이제는 영령이라 한들 불효가 여기까지 이를 줄을 어찌 알았으랴.
비통한 마음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가눌 길이 없구나."
-난중일기 1597년 10월 19일-
마침내 조선인구의 45%가 죽은 임진왜란이 끝나는 그 날이 옵니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양력12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남해 관음포에서 자신의 몸과 승리를 바꾸어 돌아가십니다. 그 시각, 약속이나 한 듯이 조선의 명재상 서애 유성룡 선생은 선조로부터 토사구팽을 당하니 하늘의 조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또 하나의 섭리를 예비 하시니 장군께서 돌아가신 그 날로 부터 304년 뒤, 대한 태극기의 딸, 유관순이 저물어가는 대한제국의 땅에 태어납니다. 아직 민족의 혼만큼은 저물지 않은 것입니다.
장영주 | (사)국학원 국학교육원 원장, 한민족역사문화공원 원장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