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이야기4 - 국가, 민족 그리고 한글
민족의 정체성도 'National Identity', 국가의 정체성도 'National Identity'
국가의 정체성은 영속적이라기보다는 끝없는 변화를 수반하면서 그 경계를 긋고, 또 긋는다. 신라의 정체성, 백제의 정체성, 고구려의 정체성은 그 나라의 국체(國體)에 속한 것이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면 삼국의 국가적 정체성이 별도로 존속할 수가 없다. 하지만 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한 삼국이 모두 우리 민족이라는 '우리'에 들어온다. 그렇지 않다면 '고구려사 지킴이'가 가능하지 않다.
미국 사람에게 민족이란 말은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미국은 100개가 넘는 이민족이 모여 이룬 국가다.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있어도 민족적 정체성은 규정짓기 어렵다.
'한민족답다'는 것의 실체
그들에게 정체성의 문제는 꾸준히 상상의 경계선을 치고 다시 치고 상황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한때는 '앵글로 색슨'(Anglo-Saxon)에 개신교를 신봉하는 것이 미국인의 기준이었다. 백인에, 그것도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Protestantism)를 신조로 삼는 것이 정체성의 준거였다. 이런 준거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이젠 이중언어(Bilingual)정책까지 등장했다. 운전면허시험이 한국어로 출제되고 있다. 누가 미국 사람이냐?(Who is American?)는 질문에 고정된 답이 없다. 정답이 어렵다는 것은 물음의 정의가 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민족이란 말이 있다. 이 단어의 생김이 근대의 일이긴 하지만-한민족인 우리에게 국가는 단순한 정치적 실체만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마음의 상태(State of mind)이기도 한다. 지리적은 물론 지적-혈연적-언어적-종족적-문화적 경계선이 있는 상상적 정치공동체이다. 지금의 지리적-정치적 요소는 우리의 정체성 구성요소가 될 수 없다. 혈연과 문화만이 공동체의 요건이 된다. 혈연적 공동체는 단순한 것 같지만 오랜 역사 속에 배달민족은 순수성을 잃었다. 이제 한민족을 한민족답게 만드는 것은 문화가 아닐까.
문화 속엔 철학과 도덕, 윤리, 언어가 포함된다. 특히 언어-한국어(조선어)는 공통된 정체성의 요소다. 우리의 말을 소리대로 적을 수 있는 한글은 정말로 우리의 문화공동체를 정립한 세종대왕의 혁명적 업적이다. 그래서 한글사랑은 다양한 국학운동의 하나로 꼽힐 수 있다.
우리의 말과 글은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ㅣ'라는 모음에 '-'(아래아)가 붙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ㅣ'의 안쪽에 오면 '얼'이 되고 밖으로 오면 '알'이 된다. '얼골' 혹은 '얼굴'은 '얼이 있는 골짝', 혹은 '얼이 숨어 있는 굴(窟)'이라는 뜻이다. 씨에 생명이 없으면 쓸모가 없다. 씨알은 씨 속에 생명이 있다는 의미다.
모음의 'ㅣ'는 천지의 연결을 상징하고 있다. 자음의 'ㄹ'은 발음 자체가 활동을 나타내고 있다. 'ㅣ'에 'ㄹ'이 붙어 '일'이 되면 움직임을 나타낸다. 천지인의 삼원(三元)을 이루는 것을 우리의 선인들은 일이라고 했다. 세계화의 무기는 한글로도 가능하다. 소리대로 적는 것뿐만이 아니다. 글자의 생김새가 지니는 함축성은 우리 문화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한글날은 '국경일'이 되어야 한다.
이형래 [세계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