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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이야기5 - 한민족 사유의 틀 '한' 2009.09.21  조회: 2535

작성자 : 이형래

국학이야기5 - 한민족 사유의 틀 '한'

 

'한'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는 낱말도 없다. 사전에 나타난 것만 해도 스물두가지나 된다. 7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만의 것은 아니다. 몽골에 가면 민족의 수장이 '한'이다. 세계에 산재한 말이다. 그런데 유독 한민족만이 이 말을 즐겨 쓸까? 그 이유는 뭘까?

한민족의 사유의 존재형태를 밝혀줄 수 있는 이 말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을까?

첫째 '한'은 하나다. 하나는 여럿을 만드는 원인자다. 하나가 여럿이 되고 여럿이 하나가 된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의 과정이다. 하나가 여럿이 되는 과정 그리고 여럿이 하나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창조의 진행이다.

조화와 균형이 본질

하느님이나 하나님이나 한얼님이나 하늘님이나 다 같은 뜻이다. 하늘님은 '하는 님'이다. 역사(役事)하는 하늘의 님이라는 의미다. 역사의 밖에서 방관하는 절대자가 아니다. 천지인의 어우러짐 속에 만들고 일하는 분이 하느님이다. 이것이 우리의 옛 조상의 하늘생각이었다.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의 변증법이나 키에르케고르의 양자택일(Either, or)의 실존주의 사상도 모두가 절대정신에 귀속하자는 절대주의의 오류를 범했다. 서구문화의 비타협적 독선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사고의 틀은 궁극적 전제나 결론을 실체로 상정하는 실체주의에서 헤어날 수 없게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비타협적 독선과 유일신관이 그 사례다. 절대주의적 사고나 의식의 양태와의 충돌이 중동을 비롯한 현대적 분쟁의 요인이기도 하다.

우리의 '한' 사상은 헤겔도 키에르케고르도 다 품어 조화시키는 포용력을 지녔다.

하나가 여럿이 되는 것은 절대자에 대한 귀속이 아니다. 모든 개체는 전체를 위한 고정된 상태가 아니다. 이런 개체의 집합은 하나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해체요 분해이며 파괴일 뿐이다. 한민족의 공동체 정신은 분자 간에 상보적(相補的) 기능을 한다. 모든 개체가 비결정적인 완전한 자유를 실현시키자는 것이 우리의 '한'의 목표다. 서로 다른 하나 하나는 자유로이 수렴돼 더 큰 하나를 창조하거나 진화해 나가는 것이 한의 본성이다. 사물 놀이에서 나타난 한 사람 한 사람 놀이꾼의 신명남이 하나로 모여 그럴싸한 굿판을 창조한다. 한의 절묘한 놀이판이다. 교향악단은 지휘자가 있다. 그의 지휘봉에 따라 전체는 따라간다. 사물놀이엔 지휘자가 없다. 자유로운 놀이꾼이 있을 뿐이다.

다양한 개체를 하나로 조화시키는 사유의 체계가 한사상의 핵심이다. 이런 사상의 줄기는 단군사상에서 시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천부경은 한의 경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석삼극(一析三極)이다. 하나가 갈라져 세 개의 극이 된다. 둘은 대립과 적대적 관계가 아니다. 유와 무가 서로의 존재이유가 돼 서로를 바라보는 상유상대(相由相待)의 관계를 이룬다. 너와 내가 하나돼 우리가 되게 하는 것이 한의 역학이다.

조화와 균형이 '한'의 본성이다. 이런 사상적 바탕과 토양이 잡다한 이질문화를 우리것으로 소화해 내게 했다. '한부처'가 그 예다. 부처의 한 면 만이 아니다. 여러 얼굴로 때와 장소에 따라 나투는 응화신이 한부처다.

투쟁과 대립의 관계가 아닌 상보의 이치로 파악하는 것이 한의 사상체계다. 때문에 생(生)과 사(死)도 둘이 아니다. 현상과 원리가 둘인 듯하면서도 하나다. 바다와 파도가 둘이 아닌 하나의 전체다. 조화와 포용의 철학이다. 조화와 포용이 금도(襟度)다. 바로 이런 마음을 품는 인간이 되자는 운동이 한사상 국학운동이다.


이형래 [세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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