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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일보 국학칼럼4] 깨달음의 정체 2010.05.26  조회: 2990

작성자 : 장영주

[충남일보 국학칼럼4] 깨달음의 정체


지난 5월 21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긴 고행 끝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외치신 석가모니 부처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라고 하신 예수님.

이때의 ‘나’는 육체의 내가 아니라 모두를 감싸고 아우르는 조화심의 극치로서 ‘나’이다. 소크라테스, 공자, 마호메트 등등 인류의 성인은 모두 깨달으시매 스승이 되셨다. 시공을 초월하여 수많은 이들이 믿고 의지하는 성인의 증표인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은 개도 안 물어 간다’, ‘깨달으면 축지법을 쓰고 하늘을 날 수 있다’, ‘대자유인이 된다. 한번 크게 죽으면 득도한다’ 등등 우리 민족처럼 깨달음을 귀중히 여기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깨(져서) (도)달함-이랴? 중학생의 옷을 벗어야 고등학생의 옷을 입을 수 있듯이, 큰 나로 나가기 위해 작은 나의 깨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깨달음을 거룩하고 고귀하게 여긴 나머지 곱게 포장하여 시렁위에 얹어 놓고 ‘이번 생은 다음 생의 깨달음을 위한 인연을 준비 하는 생이다.’라고 믿고 가르치기도 한다.

인간을 반신반수(半神半獸)라고 한다. 동물처럼 의식이 낮을 수도 있지만 높은 의식과 고귀한 영혼으로 하나님을 닮아 밝고 거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깨달음은 경외하고 의지하며 우상처럼 숭배하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는 것이 깨달음이라면 탈 수 있게 해달라는 신앙만으로는 자전거를 탈 수 없다. 몇 번씩 무릎이 깨지면서 자전거 타는 법을 몸으로 터득하면 언제, 어디서나 탈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깨달음이 믿음과 다른 점이다.
깨달음은 뇌를 이용해 도달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이며 실천적인 철학으로 신앙이 될 순 없다. 1)자신 안에 깨달음의 씨앗이 있음을 자각하고, 2)어떤 외부의 장애에도 자유롭게 의로운 마음을 선택하여 3)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도움을 펴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상태이다.

고구려가 패망한지 30년, AD 698년에 발해를 건국하신 대조영 황제께서 ‘삼일신고(三一神誥)’라는 경전을 복원하였다. 이 책은 단군 이전 시대로부터 전해오던 민족 경전으로 당(唐)의 침입에 의해 소실되었다.

5훈(訓)으로 구성된 간결한 이 경전은 깨달음의 인자가 내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의 머릿골에 내려와 계신다.’ 강재이뇌(降在爾腦)라고 명시 되어 있다.

천안시 단군산에 있는 한민족역사문화공원에는 지구의 평화를 기원하며 깨달음을 펼치신 성인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한 자리에 모여 계신다. 부처의 자비, 그리스도의 사랑, 선비의 인 등 모든 성인의 깨달음은 ‘널리 이롭게 하는 사람 즉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되자는 한민족 선조들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이 얼마나 위대한 조상들이시며 거룩한 DNA인가? 진정한 깨달음은 개인의 깨달음이 집단과 인류의 깨달음으로 확대되어 전체완성과 개인완성을 이룰 때 제대로 그 빛을 비출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의 가르침은 ‘만인은 만인의 늑대’가 아니라, 만인은 만인의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가 되니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나로 존재’ 한다는 것이다. 결국 깨달음의 모든 것이 선택이며 훈련이다. 나와 민족과 인류를 구원하는 효충도의 길, 그 길의 선택 여부에 지구인 모두의 미래가 걸려 있다.


글, 그림 원암 장영주 | (사)국학원 원장(대) 및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 본 국학칼럼은 5월 26일자 충남일보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 충남일보 칼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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