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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설, 서럽던 설 2009.09.21  조회: 2172

작성자 : 일지 이승헌

반가운 설, 서럽던 설

 

설하면 이 설, 저 설 해석도 까닭도 많다. 우리의 설 만큼 설움을 당하면서 내려온 명절도 없다. 설은 변화의 시작이다. 묵은 시간의 문화주기가 새로운 시간의 문화주기권으로 옮기는 것이 설이다.

새로운 것은 낯설다. 즐겨 입는 헌옷의 친숙함이나 편안함이 없다. 설빔을 입는 아이들, 어른 할 것 없다. 모두가 구겨질까, 때 묻을까 조심이다. 불편하다. 새것에 적응이 안된 탓이다. 지나간 365일은 헌옷의 익숙함이 배어 있다. 하지만 오는 해는 임을 처음 만나는 설렘과 불안을 떨쳐낼 수가 없다. 미지에 대한 불안이다. 조심스럽고 삼가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신일(愼日)'이라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입생의 통과의례에서 보듯 새 질서나 가치가 오래된 것이나 다른 것과 바뀔 때는 어김없이 값을 치르기 마련이다. 신입사원이나 새로 이사온 사람이나 처음으로 부딪히는 환경이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동화되기 어설픈 시점이 설이다. '낯설다. 서럽다. 사리다' 등의 학설은 '삼간다'는 조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설익다'와 같이 미숙함이나 시작의 의미도 함의됐다.

삼국 이전부터의 고유 절기

공동체 문화가 한민족의 특성이다. 특정한 날을 기념하는 주된 목적은 동화(assimilation)에 있다. 미국엔 '국기의 날(Flag Day)'이 있다. 1916년 윌슨 대통령이 공휴일로 선포했다. 미국의 성조기는 공공기관 건물은 물론 가정집에서도 게양된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거의 종교적 신앙의 상징물이 되었다. 잡다한 인종의 동화와 통합을 위한 상징조작이라 하겠다. 링컨 대통령이 선포한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도 남북전쟁이 남긴 남북간의 갈등의 해소와 화해, 단합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도 설 의식이나 의례를 통해 공동체의 결속과 경천숭조(敬天崇祖)의 미덕을 쌓아 왔다. 7세기 중국의 '수서'에는 '신라는 정월 초하루를 명절로 삼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 때는 정초가 되면 패수(대동강)에서 임금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을 갈라 돌팔매 싸움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설은 삼국 이전부터 내려오는 민족의 고유의 절기다. 학자에 따라 어떤 이는 '한 첫날'이 설이라는 주장도 한다. '한'은 밝음의 옛음이다. 환인, 환웅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다.

물론 정확한 설은 역법이 있어야 한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다만 추수가 끝난 10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 갖가지 놀이가 계속되었다. 놀이는 가무가 반드시 따랐다. 그것은 제천의식이었고 산 자와 죽은 자, 나아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의식이기도 했다. 이런 의례를 통해 조화와 화합이라는 두레와 가래질의 마음이 굳어진 셈이다.

설엔 세 가지 의식이 풍속이다. 설빔을 입고 조상에게 차례를 올린다. 다음이 세배다. 차례는 고려시대에 시작됐다고 한다. 불교가 국교였던 당시 절에서 으뜸가는 공양으로 '차 공양'을 꼽았다. 차가 귀하고 비싸 최고로 꼽혀 조상에게 최상의 것을 드린다는 숭조의 마음을 나타냄이었다. 세배는 아랫사람이 절을 올리고 어른의 덕담으로 진행되었다. 요즘은 아랫사람이 먼저 명령조의 인사로 끝내는 무례도 많다. "오래 사세요, 건강하세요" 같은 언사다. 절도 남자는 오른손을 바닥에 짚고 왼손을 오른손 위에 포개고 여자는 그 반대다. 성묘는 이젠 한식이나 추석에나 하지만 전통적으로는 설에도 반드시 성묘를 했다. 한해의 시작을 고하면서 조상의 가피를 비는 의례였다. 명절이 그렇지만 설은 귀소본능의 표현이면서 원시반본(原始反本)의 마음이기도 하다.

사연 많았던 '설' 되찾기

"모든 시작은 어렵다"는 독일의 격언이 있다. 처음 접하는 365일이기에 그렇다. 어렵기에 삼가고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삼국유사'는 원효란 이름의 유래가 시단(始旦)이라 했다. 그 뜻은 원단(元旦)이다. 신라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정월 초하루를 설이라 했다는 추정이다.

이런 우리의 설이지만 말 그대로 설만큼 서러움을 많이 당한 명절도 없을 것 같다. 1895년 일본은 양력설을 강요했다. 일제 36년간에 구정이라는 설은 밀의적 전통으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 해방이 되었다고 제자리를 찾은 설이 아니었다. 이중과세라면서 떡방아간의 휴점강요, 벌금부과 등 설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민족문화의 숨통 조이기였다. 단군기원의 사용금지와 함께. 설에 떡을 한다는 것은 거의 '007 작전'을 방불케 한 때도 있었다. 외국 현자의 생일은 공휴일로 하면서 제 민족의 설은 막았다. 여론에 밀린 정부는 1981년 국무회의에서 의제로 상정, 표결에 부쳤다. 찬반동수였는데 의장이던 최규하 총리가 부표를 던져 설 제자리 찾기는 물거품이 되었다. 민족적 정서의 부활이 던질 파장을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1985년 정부는 설을 '민속의 날'로 정해 하루를 논다고 했다. 하지만 설에 대한 민족적 감정은 잠재울 수가 없었다.

'양력설은 왜놈설, 개설'이라는 정서에 노태우 정부는 굴복했다. 1989년 2월 1일, 정부는 음력 1월 1일 설을 전후한 3일을 공휴일로 공표했다. 기구한 설의 근-현대사다.

조선중기에 이수광는 그의 '지봉유설'에서 설은 '서러워, 서럽다, 서러움'에서 뜻하는 '설'처럼 조심하는 날로 풀이했다. 아마도 그의 해석은 신라 때 정월 초하루를 '달도'라 한데 있는 것 같다. 달도는 슬퍼 근심하며 조심한다는 의미다. 최남선의 해석도 비슷하다. '몸을 사린다, 행동을 자제하여 근신한다'는 것에서 '몸을 사린다, 서린다'가 바뀌어 오늘의 '설'로 굳어졌다고 한다.

어원이나 유래야 어찌되었든 설이 갖는 설빔, 차례, 성묘라는 의례는 신인합일, 산자와 죽은 자까지도 하나 되려는 몸가짐과 얼의 나타냄이라고 해야겠다. 놀이는 낱낱이 뭉쳐 우리가 되는 의식이었다. 그래서 우리라는 낱말이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서러운 해였다면 벗어 던지자. 천지기운과 함께 어우러져 설 같은 설을 반기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국학운동이다.


일지 이승헌 총장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대학교)
국학원설립자, 현대국학, 뇌교육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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