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한 민족 정체성에 눈뜨다
아래로부터의 항쟁이기에 동학혁명과 3-1운동은 역사적인 승리
민족이란 너희라는 타자(他者)가 있을 때만 나타난다. 민족의식도 마찬가지다. 타민족에 의한 충격이 일어날 때 “우리는 너희와는 다르다”는 생각이 일게 된다. 이것이 민족의식이다.
일본인이라는 타민족에 의해 우리라는 한민족이 피지배자로 규정되었다. 이때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동질적 집단임을 의식했다. 한민족의 역사는 크고 작은 외침(外侵)이 900회가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외침이 우리와 너희는 다르다는 것을 의식케 했다. 이런 역사가 영광스러운 것이든, 욕된 것이든 우리라는 한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깨닫게 했다.
혁명은 같은 민족이 자신의 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라는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은 광복이다. 동학농민혁명이나 3-1운동이나 모두가 혁명인 동시에 광복운동이었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식민체제의 극복과 타파라는 점에서 광복이면서, 봉건체제의 모순인 계급타파라는 점에서 혁명이었다. 동학혁명도, 3-1운동도 모두가 이 두 가지 과제의 해결을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선 실패한 혁명이었고 좌절된 광복운동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민족의식의 발로라는 점에서 역사적 성공이라 할 수 있다.
‘동도서기’는 기득권 수호 전략
동학혁명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신분을 타고난 숙명으로 여기던 ‘상놈’들에게 ‘우리는 다 같은 단군의 자손’임을 깨닫게 해준 민족적 각성운동이었다. 상놈, 천민이라는 동굴에 갇혀 있다가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인류 보편적 깨우침을 얻은 사건이다. ‘민(民)’이 ‘주(主)’가 되고자 하는 용틀임이었다. 상놈이나 천민은 당시의 사회통념으론 보편적 윤리의 수혜 대상이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천한 신분으로 규정된 이들이었다. 동학혁명은 21일의 수행이 아닌 수백년을 변두리 인간으로 취급받던 민중의 절규였다. 신분타파, 계급타파를 통해 자주적 근대민주주의 제도로 이어질 수 있었던 시민혁명이었다.
동학의 ‘시천주(侍天主)’와 ‘사인여천(事人如天)’ ‘인내천’은 모두가 같다는 평등의식을 낳았다. 마음에 모신 한울님이나,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것이나, 사람이 하늘이라는 것은 평등사상이다. 양반의 하늘, 상놈의 하늘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난 민중의 절규는 외세와 공모한 봉건지배세력에 의해 30만~40만명의 희생자를 낳으면서 끝났다.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실패한 원인을 동학혁명의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을 지닌 채 서양의 문물을 이용하자는 것이 동도서기다. 쉽게 말해 서양과 일본을 머슴처럼 쓰겠다는 양반의 논리다. 문제는 ‘동도(東道)’란 것이 중국의 성리학이었다는 데 있다. 여기에 봉건적 지배구조인 왕조와 기득권 강화를 위한 서구문명의 이용이었다.
성리학적 사회이념을 타파하길 원하는 민중의 함성과는 무관한 기득권 수호 전략이 동도서기였다. 시대적 사조를 역류하는 일부 착취계급의 쇠망하는 권력의 부흥 이론이었다. 반상의 계급이 깨어져 민족이라는 평등은 실현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서구와 일본의 문물을 이용하겠다는 것이 결탁으로 변질되었다. 당시 지배층엔 중국의 루쉰(魯迅)이 말한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감각’이 없었다. 학자적 문제의식에 장사꾼의 현실감각이 없었다는 말이다.
일본군의 총칼을 괭이나 죽창으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싸워야 할 싸움이기에 싸웠다. 전투에선 패했지만 역사의 전쟁에선 승리한 동학혁명이었다. 자주적 평등운동이라는 점에서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민중혁명으로 기록된다. 천주교의 천주신앙도 평등이었지만 외래사상이었다. 동학은 서학에 대항한 우리의 사상이었다.
동학이 안았던 정신은 3-1운동로 이어져 그 후 4-19의거, 5-18광주항쟁, 6월 민중항쟁으로 민중의 주권을 수호하는 역사적 맥을 이어왔다.
권세는 하느님이 세우신 것이라며 일제에 복종을 설교한 사람들 중 일부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영원한 노예의 신분이 하느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오늘의 불행이 나의 탓이라며 민족적 비극이라는 공적(公的) 사안을 개인의 탓으로 사사화(私事化)하게 만든 것이 제국주의가 한민족에게 행한 가장 큰 죄악이었다. 국가의 가치보다, 민족의 가치보다 종교의 가치가 상위 개념으로 교육되었다. 그들은 종교를 통한 초민족, 초국가관을 심었다. 일제의 식민착취에 항거할 의지를 약화했다. 일제와 연합한 기독교나 천주교는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3-1운동은 이와 같은 종속의 굴레에서 벗어나자는 민족의 몸부림이고 항쟁이었다.
사람답게 살겠다는 욕망의 분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은 평화정신의 핵심이다. 바로 3-1운동의 정신이다. 기미독립선언문 33인의 서명단은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을 대표로 각 종교단체의 지도자, 사회지도자들이었다. 이에 전국의 백성들이 목숨을 걸고 궐기했다. 종교적 갈등도 신분의 차별도 없었다. 평화를 갈구하는 민족적 울분으로 하나 되었던 비무장 비폭력 평화시민운동이었다. 동학혁명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악랄한 지배를 가중시킨 실패의 운동이었지만 한국민의 평화정신을 이어가게 한 역사적 승리였다.
한민족의 역사는 우마처럼 살아온 민족의 고난사임을 일러준다. 짐승처럼 살아온 민중이 사람답게 살겠다는 변화에의 욕망이 분출된 것이 동학이며, 3-1운동이다. 수성(獸性)에서 인성(人性)으로의 갈망이 현실로 표출된 것이다.
기미독립선언의 공약 3장은 “정의, 인도, 생존, 공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투쟁방식을 찾아볼 수 없다. 이렇게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일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조선인을 때리고 죽여야 한다.” 도쿄에서의 강연을 위해 한국에서 온 일본군 소좌의 말이다. 어린이와 여자, 맨주먹의 조선인에 대한 만행은 메켄지(Frederick A. Mekenzie)가 ‘한국의 독립운동사(Korea's Fight For Freedom)’에서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우리의 민족광복운동은 상해 임시정부나 지식인에 의한 투쟁보다는 한반도 안에서 소작쟁의 등 평민들의 항쟁에서 찾아야 할 때다. 동학이나 3-1운동은 평민들이 민족 정체성에 눈뜬 행위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평등과 평화를 이토록 사랑하는 이유는 그 정신적 원류가 단군의 홍익사상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타민족과 다르게 하는 인자(DNA)는 단군사상이다. 테러, 핵문제 등으로 평화가 오늘날 지구촌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 문제에 관해 한반도는 뜨거운 감자다. 동학혁명, 3-1운동이 오늘에 주는 교훈, 그것을 바로 알고 실천하자는 것이 국학운동이다.
일지 이승헌 총장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대학교)
국학원설립자, 현대국학, 뇌교육 창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