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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뇌를 가진 인간 2009.09.21  조회: 2021

작성자 : 일지 이승헌

평화의 뇌를 가진 인간

 

국학의 지향점은 상생과 조화를 낳는 평화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 환경파괴의 세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류는 ‘평화의 21세기‘를 열망한다. 이념 대결이 세계평화의 걸림돌인 줄 알았지만, 이젠 그보다는 민족주의와 종교, 지역주의가 대결과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평화의 안전보장‘을 위해 ‘군사적 안전보장‘이 힘을 얻고 있다. 안전보장은 무력제일주의에 의지하게 되고 ‘힘의 균형‘이 해결 방법으로 등장하고 있다.

군사제일주의에 의한 평화유지는 평화를 위한 문제해결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의 일부라는 역설을 안겨주고 있다. 민중의 안전보장을 위한 군사적 안전보장은 되레 ‘인간의 안전보장‘에 적대적임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민중의 안전보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정치적 안전보장‘이며, 이것은 민주주의의 확립에서 이뤄진다. 이런 의미에서 고다(小田)와 루미스(Lummiss)가 말한 “군대가 있는 나라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하기엔 무리다“라는 선언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정치현실은 어느 국가나 국가안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정권의 제일가는 존재 의미가 국체보존이라는 것이다. 안보는 군사력과 경제력이 바탕이다. 힘에 의한 평화유지는 자본주의의 속성 때문에 경쟁이 불가피하다. 경쟁의 격화는 종국엔 언제나 그랬듯이 군사적 안보문제를 위기상황으로 몰고가는 관성이 있다. 때문에 전쟁은 돌발의 개연성을 안고 있으며 결국엔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역사다.

힘에 의한 평화는 경쟁 불러

그렇다면 평화는 가능한가? 어떻게 가능한가? 남북의 평화공존이 가능하다 해도 영호남의 갈등은 여전할 것이 뻔하다. 통일한국에서도 여전히 남북의 갈등은 영호남의 엇갈림만큼이나 심각할 수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한민족이라고 한다. 우리의 역사는 외침에서 받은 상처보다 안으로 서로 주고받은 갈등과 보복의 상처가 더 심했다. 그런 와중에 몇백년의 정권을 유지케 한 사회적 통합의 구심점이 있었다 해도 평화롭지는 못했다. 계급적 신분, 빈부의 갈등과 착취로 같은 단군의 자손이면서도 형제적 따뜻함이 결여된 지난 역사였다.

평화는 외형상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다. 공포사회가 아닌 자유사회가 평화의 첫길이다. 자유와 공포사회의 차이는 샤란스키(Natan Sharansky, The Case for Demorcracy)가 선명히 밝혔다.

‘첫째, 생각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나. 둘째, 의견을 출판할 수 있나. 셋째, 신앙의 자유가 있나. 넷째,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나.‘

불행한 것은 인권의 보호자를 자칭하는 미국도 그들이 전쟁에서 보인 비인도적 만행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면 현대에서 평화는 지금의 철학적 사상이나 종교로는 어렵다는 비관적 결론에 이른다. 인간 내부의 갈등, 그리고 권력에 의한 구조적 폭력인 인권탄압 등은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인간의 마음, 곧 뇌에 달렸다. 이유는 모든 것이 인간의 뇌에 축적된 정보가 결정짓기 때문이다. 전쟁을, 아름다운 세계관을, 인생관을 갖게 하는 것도 뇌다. 삼일신고에는 ‘저마다 본성을 찾아보라. 너희 머리(뇌) 속에 내려와 있다(自性求子 降在爾腦)‘고 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사상을 품은 뇌를 소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홍익‘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사람을 인식하고 세계를 이화(理化)하는 활동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을 일컫는다.

접화군생(接化群生)이다. 접하는 온 만물을 사랑하고 가까이 사귀고 진화발전, 해방시키는 활동이 홍익정신이며 풍류도다.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가 되어 노니는 상생과 조화를 낳는 평화가 국학의 지향점이다. 이것이 평화학을 전공하는 교육기관을 세운 나의 목적이다.

일지 이승헌 총장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대학교)
국학원설립자, 현대국학, 뇌교육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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