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바이칼호에서부터 티베트, 인도국경에 이르기까지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의 대제국 환인의 나라에서 국통을 이어받아 배달국 단국조선에 이르기까지 지배와 강제가 아니라 조화와 화합의 천지인사상으로 하늘의 섭리에 따라 국가를 이끌던 치세이념이 시들어지고 옛날 단군조선의 백성들은 사분오열 서로 싸우기 급급 마침내 47대 고열가단군은 폐관을 하고 깊은 산으로 오르시며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천법을 잃은 천손은 이제 2000년을 혹독한 시련과 어둠 속에 방황하리라. 곳곳에 위기를 넘길 방책은 보아두었으나 그 고통은 심할지니라"하셨다.
그래서인가 900년을 당당하게 동북아를 호령하며 천손임을 자처하며 버티던 고구려가 내분으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마침내 나·당연합군에게 망한다. 당시 고구려에는 당에서 들어온 오두미교가 판을 쳤다. 조상 대대로 줏대를 지켜준 홍익삼경(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공부를 멀리한 것이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 땅에 당은 9개의 도독부와 42주, 100현을 두고 친당적인 고구려인을 임명해서 당에서 파견한 관리들과 함께 다스리게 했다.
신라의 김춘추가 당의 측천무후에게 동족을 치게 해달라는 구걸용 문서를 보낸 후 백제를 밟고 고구려마저 넘어가자 당은 신라마저 삼키려고 하였고 뒤늦게 후회를 한 신라는 겨우 대동강 이남정도 지켜내고 순수비를 세웠다. 그것이 당나라군 주둔역사이다. 그때부터 사대주의가 우리속에 본격 태동하기 시작한다. 고려 때는 이민족의 침입이 가장 극심했다. 13세기 초반 몽고(원)는 서쪽으로는 폴란드에서 동으로는 일본까지 손에 넣고자 고려를 쳐들어왔다.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최씨무신정권하에 1·2·3차에 걸친 몽고군 침입에 제대로 저항도 못하고 무너졌다. 이후 몽고 주둔군은 감독기관인 다루가치를 설치, 우리를 진압하고 속박하였고 그들의 문화를 퍼뜨렸다. 그 중심에는 쌍성총관부와 동녕부가 있었고 우리의 자주성은 피폐해졌다.
100년 가까운 원 지배 하에 임금도 원에 충성을 다하라는 의미인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등 충자가 붙고 몽고로 보낼 공녀(貢女)가 강제 징발되자 조혼(早婚)이 성행하고, 머리를 길게 땋고 설렁탕과 만두도 유행했다. 수라, 무수리는 몽고어이다. 700여년이 지난 지금 마산에는 아직 몽고정이 있다. 가까운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군대의 주둔지였다. 임진년 음력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은 가도입명(假道入明)을 구실로 정규군20만, 약 700척 가까운 선단을 나고야에서 이끌고 파죽지세로 조선을 공략, 20일 채 안되는 5월 2일 한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조선 각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마치 해방군 같은 행동을 보이며 조선백성을 괴롭히는 지배자를 징벌하기 위함이라고 선전하며 폭력이나 방화 살인 과역 등을 금지할 것이므로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것을 유도하였다.
이러한 선무공작(宣撫工作)으로 상당수 부왜행위(附倭行爲)를 하는 앞잡이도 늘어갔다. 임진 후반 일본군은 서서히 군세가 밀리자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며 수탈과 약탈, 인구는 6분의 1정도로 감소되었고, 경작지도 3분의 1로 줄어들어 먹을 것이 없자 천민과 노비로 전락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하늘도 땅도 무심했던 참혹한 7년이었다. 나라가 망하려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국권이 쓰러지기 약 15년 전 자주를 외치며 같이 잘 살아보자며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을 조정에서는 설득하기는커녕 권력유지를 위해 일본군을 불러들이자 서서히 500년 사직의 등불은 꺼져갔다.
1894년 6월 21일 새벽 일본은 용산에 주둔 중이던 병력 가운데 1개 연대를 출동시켜 경북궁을 포위 점령하고 대원군을 내세워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내정개혁을 강요했다. 청나라가 계속 눈엣가시임을 간파한 일본군은 아산과 성환에서 접전을 벌여 청군을 대파하고 풍도앞바다에서 청 해군을 공격하여 1200명을 대부분 수장시켰다. 기세를 잡은 일본은 평양성에서 2만 명을, 압록강 하구에서 군함 4척을 제압하여 청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동학농민군 3만 명을 치고 관련자 20만 명을 희생시켰다. 일본의 욕심이 극에 달아 동맹이었던 미국진주만에 포격을 한 후 우리는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소화되기 직전 미국 원폭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토해져서 사지에서 우리는 빠져 나왔다.
보릿고개를 넘기며 주린 배를 소금물로 채우며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해방 후 50년을 앞만 보고 달려왔다. 고운 아낙네 머리카락까지 팔아가며 독일인의 시신을 닦아가며 벌어들인 외화로 우리는 고속도로를 내가며 일어섰다. 형편이야 무척 좋아졌지만 이 땅에는 아직도 과거처럼 외국군이 주둔하고 있고 여전히 열강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더욱 탐이 난 상태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나가라고 할 처지도 못된다. 오히려 적극 활용을 해야 한다. 현실은 냉혹하며 장애도 물론 많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진 고난을 온 몸으로 견뎌왔다. 주변 4강을 직시하며 정신 바짝 차리자. 그리고 똘똘 뭉치자, 그리하여 마침내 평화적 통일을 우리 손으로 이루어내자. 그것이 2천년 단군자손의 한을 풀고 당당히 일어서는 길이다.
김진환(경남국학원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