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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어머니 김락을 기리다! 2010.11.02  조회: 5911

작성자 : 장영주

[환타임스] 대한의 어머니 김락을 기리다!
 
장영주의 국학사랑 나라사랑<7> 고문으로 두눈 잃고 암흑속에서...
며느리로, 아내로, 동생으로, 처제로, 어머니로, 장모로 '장엄한 일생' 

 


대한의 누나 유관순, 대한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요사이 국민 여동생은 배우 아무개요, 국민 오빠는 가수 누구요, 또 스포츠계에서 국민 감독은 누구라는 애칭이 있다. 대중적인 흥미와 함께 부르기에 편안하고, 시간이 지나면 혹 잊혀지고 혹 소멸되어도 부담 없는 국민 애칭들일 것이다. 그러나 꼭 잊지 않고 변하지 않아야 할 별칭들이 있으니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모든 것은 물론 목숨조차도 기꺼이 바치신 분들에 대한 칭호이다.

유관순은 영원한 대한의 누나이다. 김구 선생은 국부國父라고도 불리니 혹 의견이 다른 분도 있겠지만 대한의 아버지이다. 그러면 대한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우리에게 그렇게 부를 만한 어머니상이 과연 있을까?

이율곡 선생의 어머니이신 신사임당이 계시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선의 어머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의 어머니는 누구일까? 과연 있기는 할까?

사형을 앞둔 맏아들, 옥중의 안중근에게 마지막으로 입고 갈 옷을 지어주시면서, ‘일본인들에게 연명을 구걸하지 말라.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지 말고, 응칠(안중근의 어릴 적 이름)이는 어서 죽어라.’ 라고 피를 토하듯이 당부하신 조 마리아께서도 마땅히 대한의 어머니 중의 한 분이시다.

지난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 101 주년 되는 날이며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100년 전의 3월 26일 중국 땅, 뤼순의 형무소에서 순국하신다. 미완성이나 불후의 명저인 ‘동양평화론’ 집필 중에 부랴부랴 안중근 의사께서 이토를 처단하신 날과 같은 26일에 형이 집행되니 일제의 집요한 복수심의 일환이다. 그날 저녁, 일본의 재판 담당관들은 요정에서 거나하게 파티를 한다. 그들로서는 얼마나 후련했는지 알만한 일이다.

그해 10월 10일, 경북 안동 땅의 선비 향산 이만도가 스스로 24일간 곡기를 끊고 자정 순국을 한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11월 5일은 향산 이만도의 친척 동생뻘인 이중언이 또한 나라를 잃은 비통함에 스스로 굶어 돌아가신다.

이 피끓는 애국의 계절에 며느리로, 부인으로, 어머니, 장모로 나라를 사랑하신 또 한분의 대한의 어머님을 생각 아니 할 수 없다.

100년 전, 그 분의 시아버지, 남편, 아들, 사위, 큰 형부, 큰 오빠와 친인척의 대소 일가가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본인 역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으로 두 눈을 잃고 10여 년간을 암흑 속에서도 밝은 대한의 독립을 애타게 그리다가 돌아가신 그리운 분이시다.

바로 김 락(金洛 1862년~1929년)님이시다.

김 락 여사의 친정인 안동 내앞(川前)의 의성 김 씨 집안은 ‘사람 천 석, 글 천 석, 밥 천 석’으로 유명했던‘삼천 석 댁’이었다. 부유하고 다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의 아들 이중업과 결혼을 하니 나라의 운명과 하나 되어 그 분의 고난도 시작 된다.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는 퇴계의 11대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문관 응교를 지냈고, 아버지는 성균관 대사성(현 서울대 총장 격)을, 향산 본인은 동부승지(현지청와대 수석비서관 격)를 지냈다. 향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급제와 벼슬은 가문의 대 영광이었으나 나라가 위급해지자 과감하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발휘한다. 1896년에 봉기한 예안(禮安)의병대의 대장을 맡아 투쟁을 하고 여의치 않자 단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정 순국을 감행하니 향년 69세였다. 

음독이나 할복에 비해 단식은 서서히 죽어가는 법이니 실행이 제일 어렵고 특히 주변의 가족들이 견디기가 어렵다. 곡기를 일절 끊고 굶어 죽으려는 시아버지의 엄한 뜻을 받들어야 하고, 한편으로는 집안의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서는 조석으로 음식 냄새를 피워야한다. 뿐만 아니라 단식을 중단시키려고 수시로 들이 닥치는 일본 형사들의 모진 회유와 강압을 견디어 내야 하는 며느리로서의 김 락의 처지는 그야말로 인간으로서 도저히 겪기 어려운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향산이 서거하자, 증손자를 이미 식민지가 된 조국에서 태어나게 할 수 없다며 만삭의 임신부였던 손자며느리와 일가를 이끌고 살인적인 엄동설한에 단군성조의 도읍터인 만주로 이주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백하 김대락이다. 

김 락의 친정 큰 오빠이다. 그런 김대락과 함께 만주로 가서 이시영 형제들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고 상해 임정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김 락의 큰 형부이다. 

김 락의 남편인 이중업(起巖 李中業·1863~1921)은 이미 아버지 향산 이만도를 따라 의병에 참여했고, 1917년에는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을 집에 은신시킬 정도로 광복회 활동에 깊숙이 참여하였다. 3· 1운동 때는 김창숙과 함께 주도적으로‘파리장서’(巴里長書) 운동을 계획하고 시행하였다. 이 모든 광복활동이 부인 김 락의 목숨을 건 협력이 없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김 락의 아들 이동흠(李棟欽·1889~1967)과 이종흠(李棕欽·1901~1975)은 군자금 모금 운동인 제2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에 참여하니 안동의 각 문중으로부터 모은 군자금은 상해의 김구 선생에 의하여 의열단원이 양성 되니 1926년 나석주(羅錫疇) 열사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투척의 자금으로도 쓰여 진다. 2차 유림단 사건으로 인하여 김 락의 아들인 동흠, 종흠 형제 또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다.

김 락의 맏사위로 학봉 김성일 집안의 종손인 김용환은 은밀하게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 위해 파락호 행세를 자처하였고, 둘째 사위 유동저 역시 당당한 독립운동가 이다.

김 락 본인 또한 1919년 58세의 몸으로 예안 3· 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고 결국 일본경찰의 고문으로 평생 두 눈을 잃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 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 있으니 한 가문의 시공을 넘어 한결 같은 필사의 노력이 있었다.

김 락의 큰 형부 석주 이상용의 가계家系는 멀리 고려 말의 행촌 이암으로부터 이맥, 이기, 이유립, 계연수 등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나라에서 불법으로 삼아 강력하게 전파를 엄금한 한민족의 상고의 역사서와 천부경, 홍익철학을 가학家學으로 삼아서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로 손자로 대를 넘어 국학의 홍익유전자를 기적처럼 이어온다. 그러므로 이 나라와 국혼을 지키고자 자신의 재산은 물론 사랑하는 식구들의 생명과 자신의 두 눈마저도 다 바친 김 락 여사가 존재 할 수 있는 것이다. 

김 락은 독립운동의 중심에서 며느리로, 아내로, 동생으로, 처제로, 어머니로, 장모로 그 역할을 무진하게 다하셨다.

김 락 어머님의 품을 중심으로 시가, 친가의 훈장, 표창을 받은 애국자가 26명이 배출되고 본인 또한 유일하게 여성으로 독립지사의 반열에 오르시니 가히 대한의 어머니로서 부족함이 있을까? 

지금 세계의 금융, 과학, 언론, 곡물, 예술, 종교를 주름잡는 이스라엘인들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유태인들 어머니들의 교육의 힘이다. 이스라엘의 여성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일정기간 군대도 가지만, 아이를 낳으면 철저하게 이스라엘인으로 교육을 시킨다.
 
유태인의 여성이 다른 나라의 남성과 결혼하여 낳은 아이들은 이스라엘 정부가 곧 자국의 국민으로 인정하나, 유태인의 남성이 다른 나라의 여성과 결혼 하여 낳은 아이들은 일단 이스라엘인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스라엘 정부가 유태인 어머니의 교육을 신뢰한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의 교육은 결국 유태인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의 고취로써 그 교육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이웃나라와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제 이스라엘 여인의 힘보다 더 밝고 더 강한 세계평화를 위한 한민족 여인의 홍익의 마음을 영원히 기리니 바로 대한의 어머니 김 락이시다.

김 락 어머니께서는 이제 안동의 울을 넘어서 대한의 누나 유관순 만큼이나 대한의 어머니로서 국민의 가슴에서 널리 모셔져야 한다.
 

글 원암 장영주 | (사)국학원 원장(대) 및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 본 국학칼럼은 11월 1일자 환타임스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 환타임스 칼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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