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타임스] 단군의 눈물
장영주의 국학사랑 나라사랑<10> '淸朝는 우리 겨레' 망각한 지난 역사
자신의 왕조 굳히려 또 형제 생명 앗아간 북한당국... 하루빨리 근본 되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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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는 몇 년 전 만해도 조기잡이로 파시를 이루었던 섬이다. 남지나해의 먼 바다에서 올라오는 조기떼가 전남 영광의 칠산 앞바다에서 알이 부풀어 오르고 연평도 앞바다에서 알을 쏟고 수정을 하고 치어들이 자라다가 다시 대양으로 나가는 물목이다.
청淸나라로 끌려간 소현 태자를 다시 모셔 오기 위하여 북상하던 임경업 장군이 연평도에 들러서 조기떼를 발견하고, 그때부터 연평도에서는 조기잡이가 시작된다. 그리운 고향으로 향한 회향과 새 생명의 탄생의 섬이 갑자기 포연에 휩싸인 전쟁터가 되었다. 그것도 형제가 형제의 가슴을 쏘는 포격이다.
1636년 12월 2일, 청나라가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니, 죄 없는 백성이 무수히 죽고 다친다. 임진왜란의 핏자국이 미처 마르기도 전에 이어 터진 변고이다. 임진왜란의 결과를 두고 서로의 잘못을 따지던 조선 조정은 38년 만에 또 다시 국난을 불러들이니 곧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육상으로 서울을 함락 한 것은 불과 20일만이다.
당시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있을 리 없고, 가로등도 다리도 없고, 더욱이 미미하지만 몇 군데의 전투를 치르면서 올라왔으니 실로 엄청난 진격 속도이다. 그러나 심양에서 한양까지는 그보다 더 먼 거리임에도 청淸의 선발대는 단 열흘 만에 서울에 도달한다. 파죽지세이다. 놀랄 사이도 없던 인조는 강화도로 향하던 몽진 가마를 급히 남한산성으로 돌린다. 가마꾼들도 다 도망가니 인조께서는 서흔남徐欣男이란 농부의 등에 업혀 산성으로 들어가 포위를 당 한 채 두 달을 저항을 한다. 말이 저항이지 실은 항복의 명분을 찾는 두 달이었다.
남한산성에 갇혀있는 인조대왕과 조선군에게 청태종 홍타이지의 군대만큼 무서운 적은 그해따라 유난히 맹위를 떨치는 북풍한설의 추위였다. 망루의 군사들은 손이 곱아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고사하고, 서로 말도 제대로 나눌 수 없었으며 유일한 ‘방한복’인 가마니조차 모든 병사들에게 지급할 수 없었다. 없어서 못 먹고, 추워서 잠 못 이루니 이미 몽골을 복속시키고, 대륙을 경영하려는 청의 팔기 군과 그들이 세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홍의포와의 대적은 애시 당초 무리한 일이다.
12월 28일, 몇 사람의 술사術士가 ‘오늘은 싸우든 화의和議를 하든 모두 길한 날’이라고 일진을 뽑았다. 독전어사 황일호 등으로부터 빨리 결전하라는 재촉을 받은 터라 술사들의 허망한 얘기에 솔깃해진 도체찰사 김류는 병력을 선발하여 적을 기습하기로 한다. 이튿날, 김류는 산성 북문 아래 골짜기에 있는 적진을 향해 공격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후금의 장수 노살勞薩등은 조선인 포로를 ‘미끼’로 유인 망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장졸들은 함정인줄 뻔히 알았지만 김류의 강압에 의하여 할 수 없이 남한산성의 비탈을 내 달려 공격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후금군은 밀리는 척 도주하다가 일시에 돌아서 사방에서 기습 공격을 하였다. 조선군은 순식간에 무너져 청군의 칼날 앞에서 유린되나 이미 성문을 나선 조선군의 장졸들은 남한산성의 가파른 오르막을 거슬러 퇴각 할 수가 없었다. 극소수의 장졸들만 겨우 살아 돌아오니, 가뜩이나 정예병이 부족한 남한산성에서 별장 신성립申誠立, 지학해池學海, 이원길李元吉 등 중견 지휘관 8명을 비롯하여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12월 30일은 바람이 몹시 불고 음산한 날이었다. 병자록丙子錄에는 이 날 행궁 근처에 까치들이 모여 들여 집을 지으니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길조(吉兆)라고 좋아했다. 가엾은 조선의 왕과 신료, 백성들은 생명이 촌각에 걸린 비상사태를 앞두고도 한갓 점술사의 점괘와 까치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조대왕은 다음해 1월 말, 성문을 나와 후금의 최하급 관리 복을 입고 후금의 태종에게 수없이 절을 받쳐 피가 머리에서 가슴까지 흥건하게 흘러내린 채 항복을 하니 근조선 건국 이래 최초의 치욕스런 항복의 순간이다. 그뿐이랴, 조선은 임진왜란에 조선인구의 45%를 잃었음에도 또다시 60만 명의 포로를 청과 몽골군에게 끌려가게 한다.
청 태종의 아버지 아이신교로(애신각라 愛新覺羅) 누르하치는 누구인가? 그는 연개소문의 "금해 병서"를 머리에 베고 자면서 한시도 고구려의 대의인 고토수복, 대륙정복의 뜻을 잊지 않았던 인물로 다른 족속이 아니라 우리 겨레였다.
만주의 주인이고 청을 세워 중원을 통일한 청조淸朝는 우리의 겨레이었던 것이니 참으로 바르게 알아야 할 역사이다.
세계 최강대국을 세운 청 태조의 이름이 우리말로 ‘김누얼’이다. 그의 성씨는 애신각라愛新覺羅로 “‘愛新’은 신라를 사랑하고, ‘覺羅’는 신라를 잊지 말자.”는 뜻이다. 그들은 옛 조국, 신라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신라의 망명 왕족집안의 출신인 것이다. (참고, 몽배금태조; 백암 박은식 著).
1904년 김교헌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사교과서인‘신단민사神檀民史’에 의하면 애신각라는 계림鷄林 김金씨의 후손이다. 신라가 망한 후 경주 김씨 경순왕의 망명 왕자들이 금강산과 흑룡강 성, 백두산 속으로 흩어졌다가 훗날 제각기 힘을 모아 다시 흥기하여 만든 풍요롭고 드넓은 만주의 주인들이다. 한편으로는 발해의 국체가 깨어지니 그 후손들이 여진족으로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근세조선의 임금과 위정자들은“재조지은을 버리고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에 어찌 굴복할 소냐. 나라의 존망보다 명조明朝에 대한 효도가 우선이다.”라면서 후금(청淸)과 한 겨레임을 망각하고 무시하면서 명明에 죽도록 사대하여 온 것이 바로 374년 전의 겨울, 남한산성의 비극인 것이다.
《신단민사神檀民史》는 국조 단군조선부터 고종 황제까지의 우리 겨레의 핏줄의 역사, 참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단군께서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단군상을 세운 1998년 11월 23일 이후 70여기가 넘는 통일기원 국조 단군상이 광신도들에 의해 깨어지고 부서졌다. 광신도인들도 국조 단군의 후손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통일기원 국조 단군 상임에랴 ! 이제 통일은커녕, 억지투성이의 자신의 왕조를 굳히기 위하여 북한당국은 연평도의 주민들에게조차도 무차별로 폭탄을 쏘아 생명을 빼앗고 폐허로 만들었다. 6.25가 끝나고도 60년이 지난 오늘에 또 다시 형제의 가슴에 무차별한 포격을 한 것이다. 구멍이 나고 새까맣게 탄 것은 연평도의 집과 산뿐만이 아니다. 홍익의 뜻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려 지구인을 깨우시려는 국조 단군의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계신다.
이제 정말 다시는 무시하고 무시당하지 말자. 더 이상 왼팔이 오른 팔을 치고, 형제가 형제를 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을 모르고, 우리를 모르고, 서로를 몰랐다. 자신의 왕위의 안위에만 연연하였던 과거의 역사를 바로 알고 독재의 사슬을 풀고 이제, 형제들이여! 서로 손을 내밀어 뜨겁게 맞잡자.
국조 단군 할아버지께서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하루 빨리 근본을 되찾아 미움과 저주를 훌훌 털고 한민족의 새 운명을 창조하자.
희망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의 업장인 사상의 간극을 인류를 대표하여 마침내 뛰어 넘었다.
독재의 질곡을 벗고 끝내 자유를 찾아 인간의 신성을 밝혔다.
모든 지구인이여, 한민족의 홍익의 철학으로 한반도가 하나가 되었듯이 이제는 세계가 하나 되어 지구를 살리자.” 라고 입을 모아 세계를 향하여 당당하게 외치자.
“우리는 단군의 후예이다.”
글 원암 장영주 | (사)국학원 원장(대) 및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 본 국학칼럼은 11월 30일자 환타임스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 환타임스 칼럼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