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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별, 노량바다에 지다 2010.12.16  조회: 3191

작성자 : 장영주

[환타임스] 큰 별, 노량바다에 지다

장영주의 국학사랑 나라사랑<11> “나는 道를 다하기 위해 총을 맞았다”
대한민국, 일·중 넘어 전 인류에 필사즉생의 간절함으로 '홍익 정신'전해야 
 

 

 

1598년 11월 18일(음력) 자정,


이순신 장군께선 대장선 갑판에 한 그릇의 물을 떠놓고 소략한 천제를 올리신 후 결연히 적군을 기다리신다.


7년 전쟁의 막바지.


살아서 일본으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마지막 모든 힘을 결집한 정예 500척의 일본 해군과 결코 거저 보낼 수 없는 충무공의 130척 조선·명 연합 함대의 노량 대회전이다. 불화살이 하늘을 가르는 가운데 최후의 결전이 시작된 노량의 바다에는 삭풍과 칼바람, 피 울림의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으리.


조·명 연합군으로 예교성에 갇힌 고니시를 격파하러 온 서로육군西路陸軍의 명明장수 유정은 성벽 60보를 앞두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진격도 후퇴도 하지 않다가, 한 술 더 떠 재정비를 빙자해 순천으로 후퇴를 한다. 눈앞의 적장 고니시로부터 받은 뇌물과 자국의 해군제독 진린陳璘 과의 공 다툼 때문이다.


이로써 충무공께서 그토록 염원했던 수륙합동작전은 무산되고 명明에게 자주적 능력을 보여 줄 기회는 영원히 역사에서 사라진다.


예교성을 빠져 나갈 유일한 바닷길을 틀어막아선 채 기어이 왜군을 섬멸하려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이순신 장군과 남의 나라, 남의 전쟁에 파견되었으니 적당히 공을 세우고 부자가 되어 귀환하려는 유정과 진린의 명나라 군대는 애시 당초 전투에 임하는 모습이 다르다.


오죽하면 민초들은 “왜군倭軍은 얼레빗, 명군明軍은 참빗”이라면서 울부짖었을까?


얼레빗은 성기어 그래도 무엇인가는 남지만, 참빗은 차례차례 몽땅 쓸어가기 때문이다. 기어코 살아 돌아가려는 순천 예교성(왜교성)에 갇힌 고니시의 뇌물에 넘어간 진린도 ‘그만 풀어주라’ 고 상급자로서 충무공에게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충무공은 “장수된 자, 어찌 화친을 논하리오.” 라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미 고니시로 부터 함선 세척에 말, 창, 칼 등 뇌물을 가득 받은 진린은 왜군 4명을 태운 소형 쾌석선 한 척을 풀어준다. 포위망을 벗어난 왜선은 곧바로 사천과 부산포의 왜군 대 함대를 이끌고 오히려 조·명 수군을 포위, 섬멸하려 밤을 도와 역습한다.


이순신을 배제한 진린의 정전 시도와 유정의 음흉한 전투 기피와 더불어 7년 전쟁 최대의 피해자인 조선이 배제 된 채 명과 일본의 부단한 정전 협상이 자행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훗날 조선이 배제 된 채 성사 된 일본과 청淸의 간도 협약, 2차 대전의 상해임시정부가 배제 된 연합군과 일본의 정전조약, 대한민국이 배제 된 6.25전쟁의 정전협약이 잘 못 끼워진 첫 단추처럼 치욕의 역사로 되 물림 된다.


왜의 명장으로 유명한 사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 고성의 타치바나 무네토라, 부산포의 테라자와 마사시게, 남해의 소 요시모토등이 정예병으로만 선발 된 500척을 동원하여 필사적으로 이순신 장군을 피해 무사히 빠져나갈 전투를 구상한다.


19일, 밤 깊은 2시부터 7년 전쟁 최대, 최후의 노량해전은 시작되었고 날이 밝자 왜장 모두가 합류한 구출작전의 주인공 고니시는 50여척의 전함으로 간신히 부산을 향해 도주하고 만다.


아비규환의 밤이 지나자 바다가 끝나는 관음포에 갇힌 것을 알게 된 왜군은 필사의 항전을 펼친다. 이제 그만 목숨을 버려야하는 시각과 장소를 만들어내야만 하는 이순신 장군은 갑주를 벗은 채 맺음과 풀음의 마지막 북을 치신다.


오전 10시. 전선의 옆구리를 맞대고 피아간 결사의 혼전 중, 송희립이 머리에 총알을 맞아 졸도하자 놀란 장군이 일어서는 찰라, 때를 노리던 ‘시마즈’군의 정예 저격수들의 화망이 집중 된다. 장군은 쓰러지고 유언을 남기신다.


“나는 도道를 다하기 위해 총을 맞은 것이다.” (은봉야사별록)


오열을 삼키면서 전투는 지속되고 정오경 왜군은 지리멸렬 해남의 뭍으로 도피하고, 나머지는 함선으로 도주한다.


이로써 도요토미 한 사람의 야욕과 조선의 무수한 위정자들의 무능이 불러온 길고도 끔찍했던 조선의 7년 전쟁은 막을 내렸다.


오늘도 관음포 이락사李落祠 앞 험준한 해류는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무심히 흐르고 있다.


성웅聖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몰일戰歿日이란 바로 성몰일聖歿日이 아닌가?


남해의 노량 앞바다 관음포에서 장군을 기린다. 이락사를 둘러싼 동백 숲 사이로 작은 산새들이 분주하고, 햇볕은 갑자기 따뜻하고 명징하다.


공이 나라를 구하시고 몸을 바꿔 떠나신지 어언 412년.


노량의 그 바다, 첨망대 난간에 기대어 의관을 정제하고 몸을 바로 세워 깊이 침잠하여 장군을 모신다.


갑자기 장군께서 투구와 갑옷을 차려 입고 바다 한가운데로 크게 떠오르신다.


“이제 함께 가시지요.”?


“내가 오랫동안 이 바다를 지켜왔거늘.....” 충무공은 일본 쪽을 살펴보신다.
“장군께선 조선의 함대만이 아닌 지구 함대를 지키셔야합니다. 국조 단군들과 이 땅과 정신을 지켜 오신 선조들의 꿈이자 가르치심이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지켜낼 나르는 황금 거북선을 진수시키셔야합니다. 이제는 국학원에 계셔야 합니다.”


결심하신 장군께서 미련 없이 일어나 국학원을 향하시자, 하늘을 덮은 신명들이 철새 떼처럼 새까맣게 그 뒤를 따른다. 생전의 장군 휘하 조선의 장졸들만이 아니라 명, 왜의 장졸도 함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뒤따랐다.


비극적인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도 우리 젊은이들의 해군과 해병대 지원율이 오히려 증가 했다는 것은 충무공의 정신이 아직 생생히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결국 대한민국은 일본과 중국을 넘어 전 인류에게 총칼 대신 ‘필사즉생’의 간절함과 정성으로 홍익의 정신을 전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대한민국의 국체는 충무공의 죽음을 넘어선 원력처럼 영원하고 온전히 보존 되어야한다.

 

글 원암 장영주 | (사)국학원 원장(대) 및 한민족역사문화공원 공원장
※ 본 국학칼럼은 12월 14일자 환타임스에서 보실수 있습니다. >> 환타임스 칼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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