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스토리텔링에서 길을 찾다
역사스페셜을 중심으로
장영주 KBS역사팀 책임프로듀서
1. 문자 역사학, 연대기 역사학의 한계
오늘날 역사를 이야기 할 때 그 역사는 문자로 된 역사를 말한다. 문자로 표시되지 않은 것은 역사가 아닌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수천 년 전통의 문자 위주의 역사가 도전 받고 있다. 충실하게 역사적 정보를 담은 역사책은 외면 받고 한때, 고교에서 한국사는 배우지 않아도 되는 과목으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한 공동체가 공유해야 할 과거가 사라질 뻔한 사건이었다. 이제 내년이면 다시 고교에 한국사가 필수과목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동안 문제가 무엇이어서 역사가 외면받은 것인지 지금이라도 대책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문자위주의 역사서의 문제점부터 살펴보자.
가. 활자세대에서 영상세대로 변했음에도 교육은 활자식
문자로만 작성된 역사는 최선이 아니라 옛날 방식이다. 이미 정식 고고학 발굴 보고서의 경우 문자 정보보다 실측도, 사진, 발굴상황의 영상기록 등이 더 중요하게 취급받고 있을 정도로 상황은 바뀌고 있다. 이미지 정보가 없다면 고고학은 그 근본이 흔들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학교 역사교육에까지 파급되지는 못하고 있다.
사람은 동시에 여러 정보와 만날 경우 이미지나 시각정보를 가장 먼저 처리한다. 사진이나 영상이 소리나 의미위주의 글보다 먼저인 것이다. 더군다나 활자매체에 익숙한 활자세대에서 영상이 더 익숙한 영상세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미지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을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할 것이다. 영상이나 사진의 정보량은 문자의 정보량과 비교할 수 없이 크지만 전달력은 오히려 문자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나. 사건이 아닌 단편적인 정보주입위주
현 학교교육은 기승전결의 사건전개가 아닌 연대기적이거나 시대별 정보를 뭉쳐서 제시하고 있다. 역사를 사람이야기가 아닌 사건 data의 집합으로 보고 그 단순 데이터를 외우게 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역사 자료는 이야기 속으로 재구성하지 않으면 고통스런 암기를 통해야 비로소 정보전달이 된다. 더군다나 교과서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엄청나게 많은 내용이 들어있다. 중학교 국사의 경우 부여의 풍습은 한 문장으로 끝내고, 단 몇 줄의 기술로 과거제도를 모두 설명하려한다. 즉 재미있는 역사 정보전달은 애초부터 고려하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다.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세태를 반영하지 않고 전통적인 이성주의, 객관주의에 기대어 역사전달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는 셈이다. 역사는 늘 가장 재미없는 과목으로 취급받아 왔다. 가장 풍부한 스토리의 보고이지만 재미없이 연도를 외워야 하는 과목으로 인식되고, 불필요한 과목으로까지 가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이 증대되자 올해 다시 고교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으나 여전히 수능에서는 필수가 아니다. 학교 역사교육은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시켜주는 정신적 안식처와는 거리가 멀다.
2. 돌파구는 스토리텔링 역사서술
가. 스토리텔링이란 무엇인가?
스토리텔링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가르침’, ‘암기시킴’과는 다른 의사소통과 정보전달의 방법이다. 방송 다음 날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게 되면 보통 스토리텔링이 잘된 프로그램이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어제 그 프로그램 봤어’라고 이야기를 꺼내고 ‘독도에 바다사자가 엄청 많이 살았더라.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와서 다 잡는 바람에 멸종된 거래. 그 바다사자 포획 때문에 일본이 독도를 억지로 영토편입 했더군...’ ‘정말 바다사자 때문에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했단 말이야?’ ‘당시 영상까지 다 나오던데’ ... 이렇게 대화가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억지로 외우지 않고도 몇 년에 어떻게 일본의 독도침탈을 했고 문제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전달되게 된다. 이것이 스토리의 힘이다. 스토리로 이어두지 않으면 한시간 동안 제공된 모든 정보들은 낱개로 외워야 전달되는 것일 뿐이다.
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역사의 수많은 사실을 구슬이라고 치자. 이 구슬을 목걸이나 팔찌로 활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실로 꿰어야 한다. 스토리텔링이란 바로 그 실로 구슬을 꿰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해주기 전에는 역사의 모든 정보는 단순히 데이터로 남아 있다. 이 데이터를 잘 전달하기 위해 동원되던 방법의 하나가 연대기이다. 어떤 일은 몇 년에 일어났고 몇 년에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식의 기술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각 사건이 시간적인 약간의 유사성 이외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즉 아무런 맥락이 없이 정보가 전달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정보전달의 양은 형편없이 줄어들게 된다.
세종대 김시습이 세종에게 하사받은 30필의 비단을 가져간 이야기가 해동잡록에 실려있다.
세종이 다섯 살 김시습에게 싯구를 지어보라고 하니 지었다. 그러자 세종이 비단30필을 주면서 네가 혼자 가져가라며 김시습을 시험하니 김시습이 비단의 끝을 이어 한쪽 끝을 끌고 나갔다고 되어 있다. 다섯 살 김시습이 30필의 비단을 한꺼번에 가져가는 방법은 연결해서 한쪽 끝만 잡고 가는 방법이었다. 관계가 부족한 정보들을 이어주는 기술이 바로 스토리텔링인 것이다. 수백 개의 구슬을 실로 꿰면 한 손가락으로 운반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수십 알도 운반하기 힘들다.
다. 역사스페셜 조선판 사랑과 영혼의 스토리텔링
안동에서 한 무덤 속에서 나온 편지의 애절한 사연을 소개한 역사스페셜 ‘조선판 사랑과 영혼-400년전의 편지(1998.12.12)’가 있다. 젊어서 죽은 남편 이응태의 관속에 아내 원이엄마가 넣어준 한글편지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 편지는 최근 중학교 국사교과서에도 실려있다.
<원이아버지에게 _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꿈속에서 당신 말 자세히 듣고 싶어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이 이야기는 원래 강렬한 스토리가 있는 것이지만 60분 프로그램을 메우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편지에 나타나는 원이엄마의 강한 감정표현의 사회적 원인을 찾는 프로그램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원이엄마가 남존여비의 조선사회에서 남편에게 대등한 감정을 표할 수 있었던 이유로 이응태의 처가살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시집간 딸에게도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하는 제도, 이에 상응해 딸도 부모의 제사를 모시는 조선 초기의 제도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제도들은 조선 초중기에 매우 강력하게 유지되던 것이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사라지게 되는 것들이었다.
壻留婦家(서류부가), 均分相續(균분상속), 輪廻奉祀(윤회봉사)
서류부가, 균분상속, 윤회봉사의 정보는 상당히 전문적인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이응태부부의 사랑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으로 엮어서 설명했다. 개별적으로 이 정보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복잡한 이야기가 쉽게 전달되고 또한 이응태부부의 사랑의 스토리도 더욱 탄탄해지게 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한 논문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잇다.
‘조선판 사랑과 영혼’은 우리의 상식과는 너무도 다르며, 또한 현대 사회에서 조차 실천되기 어려운 여성들의 경제적.법적 권리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승전결의 형식 안에서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주인공들의 사랑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때문에 여성에 대한 진보적인 역사적 사실은 강력한 메시지로 인식되지 않는다. - 김훈순 이화여대교수, 현방송학회장
라. ‘노비 정초부 시인되다’편의 경우.(2011.11 10)
정초부라는 조선후기의 노비출신 시인의 이야기다. 노비 정초부가 주인 여춘영과 한시를 서로 지으며 우정을 나누었고 주인은 그의 노비문서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한시를 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설명해야 하고, 당시의 노비제도와 조선후기 서민문학에 대한 복잡한 정보가 한꺼번에 주어지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노비 정초부와 주인 여춘영의 우정으로만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 이야기는 모두 이 우정을 설명하는 보조요소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그러자 한시작법, 노비제도, 여항문학에 대한 지식이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만약 노비와 주인의 우정이라는 이야기 요소를 제거하고 이 지식을 더 충실히 전달하려 했다면 어땠을까? 흥미가 부족한 정보의 나열로 받아들여져 아예 전달자체가 안될 우려도 있었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최종 편집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 방송되지 못했다. 글을 아는 노비가 작성한 한문서류 증거물들과 인터뷰는 삭제되었다. 주인공 정초부가 한문을 잘 구사한 놀라움을 반감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많은 노비들이 한문을 구사했다면 정초부의 능력은 새삼스러운 것이 못된다. 다음으로 영조의 노비들에 대한 애정과 완화책,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한 취재물이 모두 삭제되었다. 어렵고 이야기가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노비들의 반란과 주인을 죽이려는 살주계, 그리고 실제 살주검들을 모두 촬영했으나 삭제했다. 정초부와 여춘영의 우정에 도움이 되지 않고 주인공 정초부를 의식 없는 인물로 폄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역사스페셜은 관련된 모든 사실을 시청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텔링에 맞는 사실만 골라 제공하고 있으며 엄정한 역사기술이 목적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3. 스토리텔링과 서사역사학
가. 민족적 기억의 공유
역사스페셜의 목적은 ‘민족적 기억의 공유’이다. 이를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제공하고 아래로부터의 역사교육을 지향 역사대중화에 기여하며 역사를 문학화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즉 역사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복원하고자 한다. 왜 이런 이야기에 집중하고 문학화 해야 할까? 역사는 개별성, 구체성, 우연성을 문학은 보편성, 개연성, 필연성을 추구한다고 한다. 역사를 단절된 어떤 요소가 아닌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 인간세상에서 과거에도 일어났지만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로 치환해서 들려주게 되면 역사는 나와는 관계없는 먼 이야기에서 나와 관계있는 이야기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보의 엄밀성은 감소하지만 전달력과 정보전달의 양은 매우 증가하게 된다. 이런 경향이 바로 역사를 사건이야기로 서술하는 서사역사학이다. 서사의 3요소인 시간, 인물, 사건을 통해 역사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서사성 없이는 세계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학자까지 있다.(Nicholsen)
나. 역사스페셜 스토리텔링의 세부기법
- 주제를 좁게 잡는다
시청자의 흥미는 다루는 내용이 많으면 오히려 감소한다. 더군다나 추상적이거나 나에게 먼 이야기가 포함되면 급격히 감소한다.
- 모든 주제를 특정한 사람의 일로 치환한다.
프로그램의 주제가 무생물, 즉 바위일지라도 바위 이야기가 아닌 어떤 사람의 바위이야기로 바꾸어준다.
- 사자새끼 키우듯 주제를 다룬다.
여러 주제에서 살아남을 한 이야기만 남기고 나머지는 죽이거나 복속시킨다. 여러 이야기를 동시에 하게 되면 누가 주인공인지 헷갈려 집중력이 사라지게 된다.
- 스토리 밸류가 있는 것을 주로 이야기한다.
오욕(돈, 사랑, 권력, 명예, 영생)에 변화를 일으키는 의미심장한 사건과 캐릭터에다 예측이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신비로운 가능성이 있어야 함.
- 상상까지 대신 해준다.
시청자는 노트를 들고 방송을 보지 않는다. 너무 많은 상상을 요구해서는 안됨.
실제 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래픽이나 재연을 통해 상상으로라도 복원해서 보여준다.
- 시청률에 대한 집착
시청률이야말로 역사스페셜이 시청자와 소통한 결과물로 봄.
역사는 한문투성이. 어떻게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전달할 것인가가 중요.
시청률에 대한 집착은 스토리텔링을 강화해 보다 효율적으로 역사를 전달하게 될 것임
4. 한국사를 살리는 스토리텔링
한국사의 위기는 조급함과 과욕이 불러온 것이다. 인간이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 깊히 고민하지 않고 한꺼번에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고 하다가 따분하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오늘날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최대한 많은 정보를 가장 비효율적인 문자로만 전달하려고 해서 생긴 반발일 지도 모른다. 동양의 전통적인 역사서술 측면에서 보더라도 오늘날의 역사서술은 매우 문제가 많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본기와 지 이외에 인간의 이야기인 열전을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열전이 본기와 지보다 더 분량이 많다. 학교 역사교육도 스토리중심의 인간이야기인 열전을 강화하고 스토리텔링을 교육현장에 도입, 재미있는 역사를 재미없게 만드는 것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지금 동양 전통 열전의 역사서술방식으로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스토리텔링 역사학이다. 여기에 영상이나 이미지가 대폭 추가되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 주 제: 한국사, 스토리텔링에서 찾다- 역사스페셜을 중심으로
○ 일 시: 2011년 12월 13일(화요일) 오후 7시
○ 장 소: 광화문 삼청동 입구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
○ 강 사: 장영주 (KBS 역사스페셜 책임 PD)
○ 주 최: (사)국학원, (재)한민족기념관
○ 찾아오시는 길: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10분거리
○ 참가비: 무료
○ 후 원: ㈜ 국학신문사
○ 문의전화: 041-620-6750, 041-620-6700, 010-7299-6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