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강좌

국학을 쉽고 재미있게 배우실 수 있습니다.

Home > 국학배움터 > 국민강좌

[103회 국민강좌] 『桓檀古記』등장의 역사적 배경 2012.02.20  조회: 5966

『桓檀古記』등장의 역사적 배경
- 여말 학계와 선도 -


정경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교수)


一. 고성 이씨 가문과 선도


1. 여말 이암의 선도와『태백진훈』·『단군세기』
조선시대 수백년간 조선의 국시인 성리학이념에 의하여 선도는 철저히 금압되었고 이러한 분위기하에서 선도문헌들이 전승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러한 와중에도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도문헌을 전승해 온 사람들도 있었으니, 고성 이씨 가문이 그러하다. 주지하듯이 근대 이후 등장한 선도문헌들중 가장 핵심적인 자료들이 이 가문에서 나왔다.


고성 이씨 가문의 선도적 가풍을 연 인물은 고려말 공민왕대의 학자관인 杏村 李?(1297~1364)이다. 고성 이씨 가문에서 간행한 각종 世譜 중에서도 가장 오랜 기록인『鐵城聯芳集』「鐵城李氏族譜之圖」(1476년) 에서는 鐵城(固城) 이씨가 李瑨이라는 인물에서 시작되어 2대 李尊庇, 3대 李瑀, 4대 李?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固城縣의 土姓이었던 이씨 가문에서 이암의 증조 이진이 高宗代 처음으로 문과합격을 한 후 가문이 분립된다. 이진은 承文院 學士가 되었으나 고성의 文召山으로 은거하여 스스로 文山道人으로 칭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진의 아들 李尊庇(1233~1287)는 28세인 1260년(元宗 원년) 문과에 입격한 이래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국왕비서기관인 密直司와 進賢館 大提學 등 문한기관에 주로 봉직했다. 이존비는『고려사』에서도 매우 강직한 인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특히 후손 이맥의『태백일사』에서는 自主富强의 방책과 建元稱帝를 주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 입국 이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선도 계열 인사들의 건원칭제론 등 민족주의적 성향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존비의 장남 李瑀는 父蔭으로 관직에 나아갔는데, 1279년(충렬왕 5) 원에 고려의 인질로 파견되는 등 중앙정계와의 연결고리는 계속 유지하면서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이우의 장남이 이암이다.


이암의 초명은 君?, 자는 翼之였으나 57세 淸平山 은거 이후 이름을 ?, 자를 孤雲으로 고쳤다.  固城郡 松谷村 바다앞 생가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10세되던 해 부친의 명으로 강화도 摩利山 普濟寺로 옮겨 鶴洞草堂을 짓고 공부하였다. 이암은 신학문 성리학을 배울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성리학을 제대로 공부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1313년(충숙왕 즉위) 17세에 문과에 합격한 이래 충숙왕에서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5명의 왕을 모시며 관직을 역임, 벼슬이 守門下侍中에 이르는데, 특히 두번의 유배·은거기를 통하여 선도적 소양을 배양하게 된다.


첫 번째 유배기는 36세때부터 43세에 이르기까지 7년간이다. 충숙왕의 뒤를 이은 충혜왕대 근신으로 활약하던 이암은 충숙왕이 복위하자 36세의 나이로 충혜왕의 嬖幸으로 몰려 강화도로 유배되는데, 이때부터 충혜왕이 복위할 때까지 7년간 귀양 및 은거생활을 보낸다. 3년간의 강화 유배를 마친 후 1335년(충숙왕복위 4) 39세로 天寶山 太素庵에 1년간 머물면서 素佺道人이라는 奇人을 만나 淸平居士 李茗, 伏崖居士 范樟(范世東)과 함께 素佺道人이 갖고 있던 神書, 곧 桓檀시대의 眞訣들을 얻어 桓檀의 옛역사를 논하였고 그 결과『太白眞訓』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1339년(충혜왕복위년) 충혜왕 복위 이듬해 이암은 44세의 나이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충혜왕의 파행정치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였다.  충혜왕 이후 충목왕대에는 충렬왕대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신진사대부들이 李齊賢을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 성리학적 개혁정치를 본격적으로 표방하던 시기이다. 그런데 당시 이암은 재상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제대로 교류한 흔적이 없다. 오히려 당시 신흥유신들이 閔漬의『編年綱目』을 증수하여 성리학적 역사인식을 강화하는데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보였다.  또한 신진사대부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제현과도 별다른 친교가 없었던 점도 이암이 성리학적 지향과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344년(충혜왕 5) 3월에는 강화도 참성단에서 삼신께 제사하면서 白文寶에게 祭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는데 이 또한 선도적 성향을 보여준다.


두번째 은거기는 57세부터 62세까지 5년간이다. 55세에 이암이 후원하던 충정왕이 물러나고 공민왕이 즉위하자 실권에서 밀려나는데 57세 되던 해 스스로 은퇴할 뜻을 품고 춘천의 淸平山(지금의 五鳳山)에 5년간 은거하였다.  청평산은 고려시대 거사불교의 중심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이암과 교유하던 선가 淸平山人 李茗이 은거하는 등 고려시대 선·불의 핵심 근거지중 하나로 이 곳에서의 5년간 은둔을 통하여 이암의 선도적 소양이 더욱 깊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1358년(공민왕 7) 62세의 이암은 공민왕의 반원적 개혁정책에 적합한 원로대신으로 지목되어 5년간의 은거를 끝내고 守門下侍中으로 출사하는데, 때마침 일어난 2차에 걸친 紅巾賊의 난 및 왜란을 막아내었다.  1363년(공민왕 12) 67세가 되자 정계에서 은퇴, 강화도에 들어가 仙杏里 紅杏村에 海雲堂을 짓고 ‘紅杏村?’라 자칭하였다. 이 해 10월 3일에『檀君世紀』를 완성하였다. 이듬해 1364년(공민왕 13)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경기도 長湍 大德山에 안장되었다. 文貞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며, 李仁復과 함께 충정왕의 廟廷에 배향되었다.


앞서 살펴본 바 이암의 화려한 정치 경력을 통하여 그의 인맥 정도를 짐작할 수 있는데 李穀, 白文寶, 李仁復, 吉再 등 당대의 명사들과 널리 교유하였으며, 특히 오랫동안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同知貢擧 혹은 知貢擧를 맡아 많은 문인들을 거느렸다. 문인들 중에서는 李穡이 가장 저명한데, 사후 輓詞를 白文寶와 李仁復이 썼고, 神道碑銘은 李穡이 썼다.


이처럼 이암은 여말의 대표적인 선가로서『태백진훈』과『단군세기』라는 주요 선도서를 저술하였다. 여말 새로운 시대이념으로서 성리학이 도입되고 이에 기반한 신진사대부계층이 세력을 얻어가던 시점에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관인 이암이 성리학이 아닌 선도에 기반하고 있었던 점은 매우 이채롭기까지 하다. 현재 우리가 고려시대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서게 되면 고려사회의 선도적 지반이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매우 탄탄하고 폭넓은 것이었음을 짐작해 보게 된다.


2. 조선 이후 고성 이씨 가문의 선도 전승과 『태백일사』·『환단고기』
조선의 개창 이후 성리학 이념이 국시가 되고 선?불이 이단시되면서 이암의 선도적 면모는 자연스럽게 또는 의도적으로 잊혀지게 된다.  조선에 들어 선도가 결코 환영받지 못하였으나, 고성 이씨 가문의 선도 전통은 면면히 계승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암의 현손인 一十堂主人 李陌(1455~1528)이다.
이암의 아들 寅, 崇, 蔭, 岡 중에서도 막내아들 李岡이 가장 현달하였는데, 공민왕의 총신으로 密直副使를 역임하고『고려사』열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이암의 손자이자 이강의 아들인 李原은 태종대 佐命功臣이 되고 세종대 左議政에까지 올랐으며, 이암의 증손이자 이원의 아들인 李?는 음직으로 돈녕부정에 올랐다. 이지는 陸, ?, ?, 陌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李陸(1438~498)은 성종대 병조참판에까지 올랐으며 群書에 해박하여『靑坡劇談』,『鐵城聯芳集』등을 지었다. 이중『철성연방집』은 李?, 李岡, 李原 3인의 선조의 시문을 모은 것으로 가문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졌다.


이지의 4남 李陌은 1474년(성종 5) 22세에 사마시, 1498년(연산군 4) 46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 등을 거친 후 1504년(연산군 10) 사헌부 장령으로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張淑媛의 집 주변 민가를 허무는 것을 반대하다 槐山으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중종 즉위후 복권되어 대사간, 호조참의, 판결사, 同知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경박하다’는 평도 있었지만 대체로 ‘편벽하지만 강직한 언론을 폈다’는 평판을 얻었다.


이맥이 선도적 가학을 잇고 있었음은 그의 저서『태백일사』에서 잘 알 수 있다. 이맥은 1504년(연산군 10) 괴산 귀양시 적소에서 家臧의 史冊들을 위시하여 여러 노인들에게 전해들은 역사를 편찬하였으나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이후 1520년(중종 15)에 이르러 실록찬수관으로서 내각에 소장된 秘書들을 열람하고 들을 편집해두었던 글을 차례대로 편차하여 선도사서『太白逸史』를 엮어 내었는데, 감히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집안에 비장해두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家臧의 史冊’이란 이암의『태백진훈』이나『단군세기』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 ‘내각에 소장된 秘書들’이란 세조대~성종대에 수거된 선도문헌으로 보인다.  불과 얼마전 선도문헌에 대한 수거·금압의 기억이 선명한 상황에서 중앙관인의 신분으로 선도사서를 편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선택이었을런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태백일사』를 이루어낸 이맥의 인물됨과 그 선도적 가풍의 깊이를 헤아려 보게 된다.


이맥 이후 조선왕조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수백년간 고성 이씨 가문의 선도 전통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맥의 손자 李滂은 1545년(인종 원년) 평안도 삭주도호부사로 삭주로 옮겨간 후 삭주에 정착하게 된다. 이후 인조대 ‘李适(1587~1624)의 난’은 고성 이씨 집안의 활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맥의 맏형 이육의 후손 이괄은 선조대 무과에 급제한 뒤 인조반정에 참가, 반정공신이 되었는데, 반정공신들간의 힘겨루기 속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고성 이씨 가문은 반역 가문으로 분류되어 본관명인 鐵城조차 固城으로 바꾸어야 할 정도였고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문과 급제자를 단 한명도 내지 못하였다.


이괄의 난 이후 고성 이씨 가문은 비록 영락해갔지만 가학은 역사의 이면에서 면면히 전승되었으며, 급기야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성리학이념이 시대적 시의성을 상실하게 되자 다시 세상에 공개될 수 있는 시대적 조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고성 이씨 27세손이자 조선말의 애국지사 海鶴 李沂(1848~1909)는 일제의 조선 강점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선도 전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

이기는 이맥의 직계는 아니지만 고성 이씨로 전북 김제 출신이다. 15세에 향시에 입격한 이래 문명을 날리어 당대의 명사 李建昌, 黃炫, 李定稷 등과 교유하였다. 1900년대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1904년 羅喆, 吳基鎬, 崔東植 등 호남의 우국지사들과 함께 ‘維新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1906년에는 尹孝定, 張志淵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계몽을 통한 실력양성론에 한계를 느끼면서 1907년에는 나철, 오기호 등과 함께 ‘自新會’라는 비밀지하단체를 조직하여 을사오적 암살을 시도하는데, 암살이 미수에 그친 후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7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이기는 성리학적 소양하에 정치적으로는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에서 항일무장독립투쟁, 외교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노선을 전전하였으나 뇌리 깊이에는 가학인 선도를 새기고 있었고 이에 1898년 무렵부터 선조 이암의『태백진훈』과『단군세기』, 이맥의『태백일사』와 같은 책자를 문인 桂延壽(?~1920)를 통하여 세상에 공개하게 된다. 계연수의 자는 仁卿, 호는 雲樵, 조선 중기 이맥 집안이 옮겨간 평북 삭주 근방의 宣川 출신이다. 고성 이씨 집안과 깊은 인연으로 이기의 훈도하에 선도서들을 수집·정리·간행하였으며, 1919년에는 역시 고성 이씨인 독립운동가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활동하다가 1920년 일경에게 살해당하였다.


1898년『태백진훈』을 공개하였는데, 현재 계연수의 발문이 붙은『태백진훈』이 남아 있다. 1911년에는 계연수가 이기의 감수를 받고 洪範圖·吳東振의 자금지원을 받아『환단고기』30부 한정판을 발간한다. 『환단고기』는 4종의 선도사서,『三聖紀』(安含老 撰·元董仲 撰 2종),『檀君世紀』(李? 撰),『北夫餘記』(范世東 撰),『太白逸史』(李陌 撰)를 묶어 놓은 것인데, 이 4종의 책자 중에서도 분량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가장 중요한 책자는『태백일사』로 이는 이기의 소장본이었다.


이렇게 이기는 선조들의 선도서들을 세상에 내놓았을 뿐아니라 이들에 의거하여 직접『增註眞敎太白經』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단군을 天帝, 天神로 명명하면서 단군조선의 전통을 고구려와 발해 중심으로 연결시켜 보았다. 또한 선도를 ‘太白眞敎’로 명명하되 이것이 다른 사상에 없는 神化法이 있기 때문에 여타 사상·종교를 포함하면서도 우월하다고 보았다.


구한말 이래 이기와 노선을 같이해 오던 나철, 오기호 등은 여러 노선을 전전하던 끝에 조선 독립을 위해 일차적으로 고유의 선도 전통을 통해 민족의식을 결집해야 할 필요에 공감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는 이기 집안의 선도 전통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일차적으로 당시 백두산 일대에서 선도를 계승하고 있던 白峯神師의 단군교의 영향이 컸다.


백봉신사는 십년기도 끝에 백두산 報本壇 석함에서 선도경전과 檀君實史를 얻은 후 1904년 음력 10월 3일 백두산 大崇殿 東? 古經閣 단군교 본부에서 13인의 제자들과 함께 ‘檀君敎布明書’를 작성하여 공포한 다음 13인의 제자들을 13도에 배치하여 단군교포명서를 선포케 하였고 또 20인의 제자들을 동원하여 요동, 만주, 몽고 및 숙신, 여진, 말갈, 거란, 선비 지역에 해당하는 중국과 일본 등지로 파송하여 단군교포명서를 선포하게 하였다. 특히 1906년 1월 24일에는 頭巖 白佺을 보내어 당시 외교독립운동차 일본을 다녀오던 羅喆을 서울 서대문역에서 만나『삼일신고』해설집,『事記』를 전해 주었다. 1908년 12월 나철, 정훈모 등이 4차로 도일하였을 때 백봉신사가 두번째로 파견한 彌島 杜一伯이『檀君敎布明書』,『古本神歌集』,『入敎儀節』,『奉敎節次』, 『奉敎課規』 등을 전하였다. 나철 일행이 일경을 피해 숙소를 옮기자 두일백이 다시 찾아와 ‘국운이 이미 다 하였는데 어찌 바쁜 시기에 쓸데 없는 일로 다니는가? 곧 귀국하여 檀君大皇祖의 敎化를 펴라’고 하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이에 나철 일행은 크게 깨닫고 그 길로 귀국하여 이듬해인 1909년 음력 1월 15일 종로구 재동 나철의 초가에서 나철, 정훈모, 오기호, 최동식, 이기, 김인식, 김윤식 등 10인이 모여 단군교 서울시교당을 차리고 ‘단군교포명서’를 선포하였다.


이기는 단군교 중흥까지는 나철 등과 뜻을 같이하였으나 단군교 중흥 이후 선도의 三神說 등 세부적인 문제에 있어 입장 차이를 보였고, 결국 2개월여 후인 3월 16일 계연수, 李廷普, 金孝雲 등과 ‘檀學會’를 발기, 단군교에서 분립해 나왔다. 이듬해 1910년에는 나철이 단군교를 大倧敎로 개명하자 나철의 대종교와 정훈모의 단군교가 분립하는 등 중흥된 단군교 내에서 적지않은 진통이 있었다.  대종교, 단군교, 단학회 3단체의 분기는 결국 선도 전통에 대한 역사적 인식 및 발전방향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생겨난 것으로 이해된다.


단학회를 통하여 단군교의 독자적 발전 방향을 모색하던 이기는 단학회를 발족한 후 4개월여 후인 1909년 7월 서울의 한 여관에서 단식 절명을 선택하였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당시 돌이킬 수 없는 국운을 비관한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는 단군교에서 단학회를 분립해 나온 후의 상실감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기의 사망 이후 단학회는 2대회장 계연수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1920년 계연수가 일본군에게 피살된 이후에는 3대회장 崔時興, 4대회장 李德秀(1895~1940)가 단학회를 이끌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방 후에는 5대회장 李龍潭(1894~1951)이 평양에서 단학회를 재건하여 기관지『태극』을 발간하였는데,『태극』의 주간 李裕?(1907~1986)이 구금되면서 북한활동이 정지되었다. 단학회 활동이 탄압받자 이유립은 월남, 1963년 단학회를 계승한 檀檀學會를 조직하고 6대회장이 되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특이한 점은 평북 선천 출신으로 고성 이씨 집안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계연수는 물론이고 이덕수, 이용담, 이유립이 모두 평북 삭주지방의 고성 이씨였다는 것이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평북 삭주는 이맥 집안이 이주·정착하였던 곳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고성 이씨 집안의 선도 전통이 간단없이 지속되어 단학회, 단단학회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방이후 단단학회는 이유립에 의해 주도된다. 이유립의 부친 李觀楫은 이기, 계연수 등과 교류하면서 선도를 연구하였고, 이유립은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10대의 어린 시절 계연수를 만나 스승으로까지 모시게 되었다. 1920년 스승이 사망한 후 단군교측에서 활동을 하는데, 1933년 단군교와 연합한 조선유학회에 입회하여 1935년 삭주유교청년회지교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여기에서 일제시기 단학회와 단군교·조선유학회가 상호 연결되어 있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며, 해방이후 단학회가 일제에 의해 사라진 단군교를 단학회에 합친다는 의미에서 ‘檀檀學會’라는 명칭을 만들게 된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


이유립은 1970·80년대 박창암 등 군사정권하에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군인들과 접촉하면서 선도를 널리 알려나갔는데, 1986년 이유립의 사망 이후 단단학회의 활동은 저조해졌다. 1970·80년대 이유립이 단학회 시절부터 전수되던 자료를 정리하여 간행한 선도서로『환단휘기』(1971년),『광개토성릉비문역주』(1973년),『커발한문화사상사』(1976년),『환단고기』(1979년·1980년 국내판, 1982년 일본판),『대배달민족사』(1987년) 등이 있는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환단고기』는 국내 뿐아니라 일본에서도 번역·출간됨으로써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70년대 후반·80년대초 이래 국내에서는 단전호흡·기수련을 표방한 수많은 선도수련단체들이 등장하고 한국선도의 본령인 수련법이 되살아나면서 그간 무속·민간신앙 등으로 오인되어 오던 한국선도가 제대로 발현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조건과 맞물려 선도수련소설『丹』, 선도사서『환단고기』가 등장함으로써 선도의 열풍이 불게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상에서 여말 이암의 선도를 계승한 고성 이씨 가문의 선도가 조선시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승되는 과정을 살펴 보았다. 유교국가 조선의 개국 이래 15세기 중종대 기묘사림이 등장하는 등 성리학의 벽이단론이 더욱 성해가는 분위기 속에서도 이암의 현손 이맥은『태백일사』라는 귀중한 선도사서를 편찬, 고성 이씨 가학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조선후기 성리학적 기준이 강화되면서 선가 고성 이씨 가문은 평북 삭주 지역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었고 선도적 가학은 더 이상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다.  이후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유교성리학이 시의성을 상실하게 되면서 고성 이씨 가문의 선도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890년대말 고성 이씨 이기 및 이기의 문인 계연수를 중심으로 『태백진훈』, 『단군세기』, 『태백일사』등 고성 이씨 가문에 전해진 선도서들을 중심으로 여러 선도서들을 수집·간행·주석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기·계연수는 1909년 단군교 중흥에 참여하였다가 단학회로 분리되어 나왔는데, 단학회는 인맥적으로는 고성 이씨, 지역적으로는 삭주·선천 등 평북 지역을 중심으로 하였다. 일제시기 단학회는 선도의 실천운동에 주력하던 대종교보다는 단군교와 결탁하여 학문·종교활동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해방 이후에는 역시 평북 삭주출신의 고성 이씨 이유립을 중심으로 결집, ‘단단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특히 1970·80년대 군사정권의 도움 하에 선도를 널리 보급하였다.  1970년대말·1980년대초 많은 선도수련단체들이 등장, 한국선도의 본령인 수련법을 중심으로 선도가 부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면에는 고성 이씨 단단학회의 역할도 적지않았다.


二. 이색계 두문동학사와 선도


1. 이색의 학문과 두문동학사
이암의 선도는 일차적으로 고성 이씨 집안으로 이어졌지만 한편으로 이암의 문인을 중심으로 당대의 학자들에게로도 계승되었다. 본절에서는 이암의 선도를 계승한 이색 계열의 학자, 특히 ‘두문동학사’로 불리는 일군의 학자그룹에 대해 살펴 보겠다.


필자는 이암의 선도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인물중 한명으로 이암의 문인이자 고려말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이색을 꼽고자 한다. 이색의 본관은 韓山, 자는 潁叔, 호는 牧隱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2) 진사가 되었으며, 1348년(충목왕 4) 부친 穀이 원에서 설행한 과거에 합격, 中瑞司典簿가 되자 朝官의 아들로 원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1354년(공민왕 4) 원에서 설행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곧 귀국, 1355년(공민왕 5) 본격화된 공민왕대 개혁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색은 성리학적 개혁정치를 지향하되 고려왕조의 존립을 전제로 하였기에 우왕·창왕·공양왕대 정도전·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 방식을 반대, 정몽주와 함께 친왕파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주지하듯이 이색은 저명한 성리학자이자 원의 관인이기도 하였던 이곡의 아들로서 원 국자감에서 수학하였을 뿐아니라 당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李齊賢과 좌주·문생의 관계를 맺는 등 성리학에 기반한 전형적인 신진사대부의 면모를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성리학 수용은 고려의 전통사상인 선·불 사상에 기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신진사대부들과 차이를 보였다.


이색을 한국선도로 연결시켜 볼 수 있는 고리는 이암이다.  이색은 성리학자 이제현의 문인이었을 뿐아니라 선가 이암의 문인이기도 하였는데 “나는 일찍이 행촌 侍中公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그의 아들 및 조카들과 함께 놀았다”고 하였고, 강화도 선원사를 지날 때 스승 이암의 수행처인 海雲堂을 기리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 이암의 막내아들인 李岡은 李穀의 문생이자 이색과 친밀한 벗으로 이색은 “公(이암)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다”고 하였다. 이러하므로 이색은 이암·이강 부자 양인의 묘지명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성리학과 거리를 두고 있는 전형적인 선가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당연히 선도적 소양을 전수받게 되었을 것인데, 이암이 특히 선도사 분야에 깊은 소양을 지니고 있었던 때문인지 이색에게는 당대의 일반적인 성리학자들에게서 찾아 보기 어려운 선도적 역사인식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의 일반적 성리학자들이 대체로 기자조선 중심의 중화주의적 역사인식을 보였던 반면 이색은 단군조선이 중국에 臣屬하지 않은 자주국이었음을 특히 강조하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기자조선 역시 중국에 신속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곧 단군조선은 하·은대까지 중국에 臣屬하지 않았고 이에 주 무왕 또한 기자를 신하로 삼지 않았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자주성은 삼국시대까지 계속되었다고 보았다.  이색은 자신이 살고 있던 고려말의 시대상황에서 유교성리학을 수용하고 이에 따라 유교에 부수되는 중화주의도 수용, 고려를 小中華로 보았지만 삼국시대 이전은 완전히 다른 시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색은 단군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였을 뿐아니라 단군조선의 문화에 대해서도  ‘하늘과 통하는’ 신령스러운 문화임을 강조하고 그 시대의 자취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단군조선의 문화적 실체를 강조하고 인식하고 그 망실을 아쉬워하는 태도로 이해된다. 또한 서경의 朝天石을 기억하면서 ‘단군의 英傑함이 군웅의 으뜸이었음’을 강조한 점도 매우 의미심장하다. 한국선도 수행의 최종목표로 이야기되는 朝天의 전통을 이해하고 그 실체로서 단군을 들고 있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서경의 조천석이 고구려 동명왕의 전승으로 이해되었던 반면 이색은 동명왕을 넘어서 단군에까지 소급하고 있다.  고구려 선도의 원류인 단군조선의 선도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선도 조천 수행의 핵심인물로 동명왕이 아닌 단군을 들게 된 것이다.  이색이 선도의 핵심이 수련법임을 정확히 통찰하고 있었음은 대표적인 선도 전승지인 강화도 마니산을 기행하면서 ‘丹을 이루고 신선이 되어 이곳에서 살기를 기약’하였던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이색은 선도의 핵심 경전인『천부경』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이맥의『태백일사』에서는 ‘이색과 범세동이『천부경』주해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현재 비록 이색의『천부경』주해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암에게 사사받았던 정황으로 미루어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처럼 이색이 선도를 이해하고 선도적 역사인식을 보이고 있었다하더라도 이암과 같이 전적으로 선도에 입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차적으로 성리학자로서 성리학적 중심 위에 선도를 수용하였던 것으로, 이색의 글에서 선도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곧 이암의 선도가 이색에게로 온전히 계승되지는 못하였던 것인데, 당시 점차 성리학이 새로운 시대이념으로 영향력을 얻어가는 시대상황과 관련하여 이색의 선택을 이해해 보게 된다.


 이암에서 이색으로 이어진 선도는 이색의 학맥을 통하여 다시 전파되어갔다. 공민왕대 이후 고려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극심한 혼란의 와중에서 최종적으로 이색과 학문적, 정치적 입장을 함께한 계열로 ‘杜門洞學士’가 있는데, 이들중에 이암-이색의 선도적 성향을 공유하였던 인물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이 개창되자 이색계 사대부들은 신왕조에 출사하기를 거부하고 향리 등으로 숨어 들기도 하였지만 서울 개성 근방에 무리를 지어 은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관모인 朝天冠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대신 蔽陽笠(패랭이)를 쓰고 만수산으로 숨어 들어갔는데,  고려왕실을 지키지 못하여 하늘을 볼 면목이 없기 때문에 삿갓을 쓴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관을 벗고 넘어간 고개는 ‘掛冠峴’ 또는 ‘不朝峴’이라고 하고 은거한 마을은 ‘排祿洞’, 또는 ‘杜門洞’으로 불리었다.


두문동인사들의 정치 세력화를 경계하였던 조선왕실에서는 결국 두문동에 방화하였고 이후 이들은 향리에 은둔하여 조용히 몸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 이들은 ‘杜門洞七十二賢’으로 호칭되었는데, 조선 영조 이전까지의 왕조실록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왕실이 이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였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구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영조대에 이르러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두문동72현’으로 알려진 인물은 鄭夢周, 李穡·李種學 부자, 金澍·金濟 형제, 李存吾, 鄭樞, 崔瀁·崔七夕, 吉再, 南乙珍, 元天錫, 孟裕·孟希道 부자, 都膺, 金自粹, 韓哲?, 羅天瑞, 成溥, 鄭地, 河自宗, 李養中, 金震陽, 安省, 李思敬, 趙承肅, 許徵, 徐甄, 申德麟, 金若恒·金若時 형제, 裵尙志, 李釋之, 李行, 金先致, 閔愉, 文益漸, 金士廉, 趙瑜, 具鴻, 柳珣, 朴門壽, 車原?, 趙胤·趙鐵山 부자, 郭樞, 李明成, 曺希職, 曺義生, 林先味, 張安世, 程廣, 閔安富, 金沖漢, 鞠?, 金承吉, 金子進, 邊肅, 成思齊, 宋寅, 宋皎, 尹忠輔, 李陽昭, 李涓, 林貴椽, 鄭溫, 蔡貴河, 蔡王澤, 崔文漢, 陶東明, 范世東, 李思之 등이다.


주지하듯이 두문동학사의 중심 인물은 정몽주와 이색이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정치가로서 수많은 문생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두문동학사들도 이에 해당하였다. 특히 이색의 영향력 하에 있던 두문동학사들 중에서 이암-이색의 선도적 성향에 영향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범세동, 민안부 양인이 있다.


2. 범세동의 학문과『북부여기』·『천부경』주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말 최고의 학자·관인이었던 이암-이색을 통하여 선도가 계승되는데, 그 영향 하에서 范世東(생몰년 미상)과 같은 인물이 나오게 되었다.  范世東의 본관은 錦城(羅州), 자는 汝明, 호는 伏崖, 范樟으로도 불리운다. 증조부 承祖는 南宋人으로 남송 조정에서 禮部侍郞을 지냈는데 남송이 원에 멸망한 후 고려 충렬왕비가 된 원 제국대장공주의 호위신으로서 고려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원에서 올 때『四書集註』,『伊川易傳』등 성리서들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한다.  조부 有?는 충숙왕대 여진을 토벌한 공으로 錦城君으로 책봉되었고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부 後春은 安珦의 제자로 충숙왕대 通禮門 通贊을 지냈고 정몽주, 이색, 金自粹 등과 교유하였다. 


여기에서 범세동의 가문이 남송 성리학을 고려에 직접 도입한 내력을 알 수 있으며 특히 後春에 이르러 신진사대부 중에서도 정몽주·이색계 노선을 취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은 범세동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을 것이다.


범세동은 부친의 벗 정몽주에게 사사하였는데, 1369년(공민왕 18) 과거에 합격하여 德寧府尹, 諫義大夫를 역임하였다.  스승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여 조선이 개창되자 동지들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갔으며, 두문동 방화 이후에는 향리인 전라도 광주 복만동(지금의 광산구 본량)으로 피신하여 伏崖로 자호하며 두문불출하였다. 태종이 과거 同年이라 하여 대사성을 제수하는 등 여러번 소환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에 전념하였다.


범세동은 두문동학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그의 학문적 성향은 어떠하였는가? 현재까지 남아 전하는 범세동 관련 자료를 통하여 두가지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첫째는 당대 일반의 신진사대부 성리학자로서의 면모이며, 둘째는 선가로서의 면모이다.


범세동의 저서로는『話東人物叢記』,『華海師全』,『北夫餘記』,『천부경』주해 4종이 있는데,『話東人物叢記』와『華海師全』에서는 성리학자적 면모를,『北夫餘記』와『천부경』주해에서는 선가적 면모를 알 수 있다.


『북부여기』는『환단고기』의 일편으로, 단군조선의 마지막 47대 古列加단군이 치국이념인 선도전통의 폐절을 선포하고 왕위를 내놓은 이후 단군조선의 계승을 표방한 북부여가 건국되는 과정, 漢과의 잦은 전쟁을 통하여 북부여를 위시한 단군조선 연맹체가 서서히 몰락해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단군세기』나『태백일사』등과 동일한 선도적 역사인식에 기반하고 있으며 단군조선-북부여-고구려의 선도정통론을 제시하고 있다. 북부여기 상편·북부여기 하편·迦葉原夫餘記 3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부여기 상편은 1세단군 解慕漱에서 4세단군 高于婁(解于婁)까지의 기록, 북부여기 하편은 5세단군 高豆莫(豆莫婁)에서 6세단군 高無胥까지의 기록, 가섭원부여기는 4세단군 고우루의 후계자 解夫婁가 5세단군 두막루에 밀리어 가섭원 지역으로 옮겨갔다가 고구려에 흡수병합되기까지 동부여에 대한 기록이다.


범세동이 언제『북부여기』를 편찬하였는지는 미상이나 대체로 1336년(충숙왕 복위4) 이후로 추정된다. 곧 이암이 1332년(충숙왕 복위년) 3년간 강화유배기를 보낸 후(1335년경) ‘天寶山 太素菴에서 1년간(1336년경) 거주하면서 素佺道人을 만나 많은 仙書들을 얻고 李茗, 범세동 등과 桓·檀의 옛역사를 논하였다’고 했으니, 이러하다면 범세동이『북부여기』를 집필한 시기는 천보산 태소암에서 사서를 얻어 본 후인 1336년(충숙왕 복위 4) 이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태백일사』에서는 범세동이 이색과 함께『천부경』주해도 남겼다고 하였다. 『북부여기』에 나타난 범세동의 선도적 소양은 물론 부친 이래 정몽주·이색계로 연결되고 있었던 점 등에서 이러한 기록의 개연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이처럼 여말 이암-이색의 선도적 성향을 계승한 두문동학사 범세동에게는 유교성리학자로서의 면모와 선가적 면모가 공존하고 있었는데, 선가적 면모로는 선도사서『북부여기』를 편찬하고 대표적인 선도경전『천부경』을 주해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양면성은 여말선초 전통적인 선·불 사상과 새로 도입된 유교성리학사상이 치열하게 교차하던 사상적 과도기를 살아가던 지식인의 다층적 사유구조를 시사해주는데, 범세동의 내면에서 선·불과 유교성리학, 이 두가지 차원이 보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구조로 섞이었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갔는지는 앞으로 더욱 심층적으로 추적해가야 할 과제로 여말선초사회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명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3. 민안부와 고본『천부경』
이색이나 범세동의 선도적 성향은 여타의 두문동학사들에게서도 충분히 발견될 수 있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류의 기록이나 자료는 제대로 남아 있지 못한 형편이다. 그러던 중 2000년의 시점에서 두문동학사중 일인인 農隱 閔安富(생몰년 미상) 집안에서갑골문 형태로 된『천부경』古本이 공개되어 대단한 화제를 낳았다. 구한말 이기·계연수에 의해『천부경』이 최초로 소개된 이래『천부경』은 널리 전파되어 갔지만, 전근대시기의 고본『천부경』이 공개된 적은 없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고본, 그것도 갑골문으로 된『천부경』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소장자에 의하면 이는 경남 산청 대포리 산청 민씨 집성촌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민안부가 이곳에 은거한 이래 산청 민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이것이 꼭 민안부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단 산청 민씨 학풍의 중심에 민안부가 있기에 그 영향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閔安富의 본관은 驪興, 자는 榮叔, 호는 農隱이다. 증조 基는 吏部商書門下侍郞平章事를, 祖 孺는 戶部員外郞을, 父 유(木有)는 都僉議舍人을 지냈다. 1360년(공민왕 9) 과거에 입격한 후 공양왕대에 禮儀判書에 이르렀다. 조선이 개국되자 朴諶, 蔡貴河, 李孟芸, 范世東 등과 杜門洞에 들어갔는데, 두문동 방화 이후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경남 산청 山陰縣 大浦里에 숨어 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개성을 바라보며 망국을 추모하였다. 자손들에게 조선에 벼슬하지 말 것을 유언하여 실제로 후손들은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를 산청 민씨로 삼았다.  牧隱 李穡, 圃隱 鄭夢周, 陶隱 李崇仁, 冶隱 吉再, 樹隱 金?漢과 더불어 六隱으로 불리며, 1825년(순조 25) 유생들의 상소에 따라 金?漢과 함께 개성 表節祠에 追拜되었다.


농은 가문의『천부경』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일단의 개연성은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민안부는『환단고기』에서『천부경』주해자로 지목한 이색, 범세동과 두문동학사로서 정치적 노선을 같이 하였다. 이암에서 이색, 다시 두문동학사로 이어지는 여말 선도의 학맥에 민안부도 포함되고 있었기에 민안부의『천부경』이 개연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두문동학사 민안부 집안에서 공개한 갑골문『천부경』을 통하여 배달국시기 녹도문 형태의『천부경』이 등장한 이래 단군조선말기에 이르러서는 은문(갑골문) 형태의『천부경』도 병용되고 있었으며, 또 이러한 형태의『천부경』이 여말에 이르기까지 남아 모사되고 있었던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이는 특히『태백일사』중에 등장하며 또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남아 전하는 ‘神市 篆字’의 유적 등과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어서, 『천부경』인식 뿐아니라 한국 상고사에 대한 인식의 지평까지도 크게 확장시킬 수 있는 주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갑골문『천부경』에 대한 여러 의구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현재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를 다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여말시기 선도를 통하여 한국선도의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 주 제: 환단고기 등장의 역사적 배경  
○ 일 시: 2012년 02월 14일(화요일) 오후 7시
○ 장 소: 광화문 삼청동 입구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
○ 강 사: 정경희 교수(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 주 최: (사)국학원, (재)한민족기념관, 국학운동시민연합,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 찾아오시는 길: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10분거리 
○ 참가비: 무료
○ 후 원: ㈜ 국학신문사
○ 문의전화: 041-620-6750, 041-620-6700, 010-7299-6043

이전글 [104회 국민강좌] 신시고국 환웅의 '해'사상과 세상을 밝히는 지도자상
다음글 [102회 국민강좌] 한단고기 어떻게 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