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행촌 이암의 역사적 역할>
고려 말 행촌 이암(1297(충렬왕 23)~1364(공민왕 13)은 고려의 혼란기에 역사적 역할 이 지대했던 인물이다.
첫째, 원의 세조가 원과 고려의 통합을 원했을 때 이암은 종족의 개별성을 존중한다는 정책을 주장하여 원과의 통합을 반대하였다. 충숙왕 10년(1323) 27세 때에는 심양왕, 도첨의 정승 유청신(柳靑臣), 첨의 찬성사 오잠(吳潛) 등이 원 황제에게 청한 “국호폐지입성책동(國號廢止立省策動)”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천제의 아들로 제천을 행함으로 현재 분봉 받은 제후와는 근본이 서로 같지 않다. 국계(國界)를 허물지 말고 고유민속을 섞지 말라. 이미 고유의 기혼과 혈육이 있어서 한 근원의 조상을 갖게 되었으니, 이제 곧 신시개천(神市開天)으로부터 이를 삼한관경(三韓管境)으로 하고, 크고 이름난 나라를 하늘 아래 만세에 만들었기 때문에…군신이 자주ㆍ자강의 정책을 세우고 있는 이유이다.”
둘째, 환단고기(이유립공개), 단군세기(단군고기/삼성기. 단군세기(이암). 북부여기. 태백일사(이맥)) 등의 저술을 통하여 한민족의 역사적 원류를 밝히려 노력하였다. “나라를 위하는 길(爲國之道)은 사기(士氣)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사학(史學)보다 급한 것이 없음은 무엇 때문인가? 사학이 분명하지 못하면 사기를 진작시킬 수 없고, 사기가 진작되지 못하면 국가의 근본이 흔들리며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분열됨이라.(爲國之道 莫先於士氣 莫急於史學 何也 史學 不明則士氣 不振 士氣 不振則國本 搖矣 政法 岐矣)”
셋째, 1349년 원으로 부터 비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구해다가 보급시켜 고려의 농업기술발달에 공헌하여 농업생산혁명을 가져왔다.
넷째, 국교인 불교의 퇴폐성을 지적하고 새로운 국가통치이념인 주자성리학에 바탕을 둔 정치 실현이었다.
다섯째, 조맹부체의 일가를 통하여 서체문화의 변혁을 가져왔다. 조맹부체의 유행은 조선 500년의 서사(書寫)문화의 맥을 형성하였다.
행촌 이암의 서체
1. 머리말
고려 말은 대몽 항쟁기를 지나 원의 간섭이 진행되는 동안 신흥유신에 의한 개혁기에 해당된다. 이런 개혁은 성리학의 수용과 궤를 같이 하며 문화의 수용 또한 상관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원과의 잦은 왕래 속에서 서책의 유입도 많아졌고, 이런 서책의 구입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새로 수용된 문화는 개혁의 주체세력, 즉 신흥유신사이에서 유행하였다. 이런 유풍은 조선 개국과 함께 조선 초기에 꽃을 피워 안평대군을 낳았다. 고려 말 원의 문화 수용 초기, 특히 글씨의 경우 과거시험 과정에서 스승의 직접적인 지도와 교본으로 사용하던 서첩에 의한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고려 말 조맹부체가 수용되어 행촌 이암이 배출되기 까지 당시 원과의 관계와 그에 따른 문화수용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문화의 수용 후 어떻게 발전하였는가를 송설 조맹부와 행촌 이암의 서체를 비교하여 고찰해 보기로 하였다.
행촌 이암의 경우 원을 자주 드나들었던 인물이 아닌 점을 감안하여, 원을 자주 왕래하였던 당시의 주변 인물과 과거시험 준비 과정에서 그에게 도움을 주었을 법한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조맹부의 글씨와 비교하면서 과연 어떤 점이 조맹부의 필법과 같은 점이고 다른 점이 무엇인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런 연구를 통하여 이암서체의 특장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조맹부체의 수용
1) 고려 말 문화수용과 관련된 사항
(1) 정치문화
12세기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 문인들이 배척되어 점차 활기를 잃은 문학, 예술 전반에 걸쳐 큰 쇠퇴가 일어났으며 서예의 경우도 그 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고종 말기에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고려가 원과 교섭할 때까지 계속된다. 원은 충렬왕 2년(1276)에 물산이 풍부한 강남지역의 남송이 원에 점령되면서부터 고려에 대한 경제 수탈이 줄고 대 고려 정책이 경제적 침탈보다는 정치적 또는 군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당시 경제 전문가였고, 남송에 대하여 잘 아는 조맹부는 세조의 정치자문 역할을 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정치적으로 원과의 밀접한 관계로, 고려 측에서는 왕 스스로 원의 수도를 빈번하게 왕래함은 물론 장기간에 걸쳐 체류한 적도 많았고 사절과 왕의 수행원으로 연경을 자주 출입하였다. 이를 통해서 원의 학자나 관료들의 교류가 거듭되어 고려 말기 한문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서예에도 큰 진전을 보였으며 게다가 고려 후기의 긴밀한 대원관계는 이 시대 지배세력으로서의 권문세족의 존재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는 무신 정변 이후 종래의 귀족 중심의 문화가 큰 동요를 일으키면서 그 기반마저 동요되고 있었다. 게다가 외적으로 몽고의 침략과 간섭을 받게 되어 고려 문화는 기반에서부터 해체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 같은 사회적인 시련과 문화적 갈등을 겪으면서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지식층은 기존의 지배 계층인 보수적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전면적인 사회개혁과 문화혁신을 주장하게 되었다. 즉 정치 사회적 지배세력으로서 권문세족이 존재하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대부가 성장하여 권문세족과 대립한 끝에 결국 개혁을 달성하고 조선 건국에 이르렀다.
특히 정방(政房)을 통해 진출한 신진 관인들은 신돈(辛旽)의 개혁을 계기로 ‘신진문신세력’이라는 정치세력으로 대두하였으며, 고려 후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그에 따른 사회변동이 사대부가 성장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이때 원을 통해서 전래된 성리학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신진 지식층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변동을 주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원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체계인 성리학이 도입되고, 원과의 문화교섭이 빈번해 짐에 따라 안향(安珦)ㆍ백이정(白?程)ㆍ이제현(李齊賢) 등이 고려와 원의 학계에 교량 역할을 하면서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ㆍ정도전(鄭道傳) 등은 성리학에 입각하여 고려 문화 전반에 대한 비판을 가하면서 그 개혁을 주장하여 사상적 파동이 매우 컸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와 개혁으로 이어졌다.
(2) 서업(書業)과 관련한 과거제도
고려는 초기에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제술과와 명경과 두 과목을 두었다. 이 두 과목은 본과로써 문반관료로 진출하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했는데 작품의 우열이 당락의 기준이 되었지만 서체로도 심사가 정해지므로 서법의 훈련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또 따로 잡과를 두어 잡과 속에 서업을 두었다. 서업은 서사(書寫)를 전업으로 하는 관원을 많이 필요로 하는 정부가 둔 관직이다. 고려 인종 때 잡과의 한 과목인 명서업(明書業)의 감시(監試)는 첩경(貼經) 방법으로 하되 2일 내에 실시하였고, 첫 날에는 설문(說文)에 6조, 오경자양(五經字樣)에 4조를 첩경방법으로 시험하여 모두 통하여야 하며, 다음날에는 서품(書品)에서 장구시(長句詩) 한 수와, 해서ㆍ행서ㆍ전서ㆍ인문(印文) 등 하나씩을 시험하되, 설문의 10궤 안에서 문리와 글 뜻을 안 것이 여섯 궤가 되어야 하며, 글 뜻은 여섯을 묻고, 문리는 4궤를 통하여야 한다는 기준이 정해져 있다. 서업의 감시는 자설문(字說文) 30권 안에서 백정은 3책, 장정은 5책을 각각 문리를 잘 알아서 읽고, 또 해서로 쓰게 하였다.
서학(書學)은 국자감에 속하되 학생은 모두 8품관 이상인 관원의 자제 및 서인(庶人)에게 입학의 자격을 주었다. 이들을 양성하는 기관은 성균관에 서학박사를 두어 팔서(八書)를 맡아 가르쳤다. 국자감의 학생들은 반드시 여가에 글씨를 하루에 한 장씩 쓰며, 아울러 국어(國語)ㆍ설문(說文)ㆍ자림(字林)ㆍ삼창(三倉)ㆍ이아(爾雅) 등을 학습하였다. 그리고 서리(胥吏)로는 각 관청마다 서령사(書令史)ㆍ서예(書藝)ㆍ시서예(試書藝)ㆍ서수(書手) 등이 배치되어 서사를 담당하였다. 이와 같은 관련제도의 정비는 서법의 흥륭과 보급을 촉진했다.
2) 충선왕의 역할
충선왕(1275~1325)은 명종의 5대손이요, 충렬왕의 장자로, 고려 제 26대왕이다. 휘는 장,(璋) 초명은 ?(?), 자는 중앙(仲昻), 몽골이름은 익지례보화(益智禮普花), 모는 원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홀도노게리미실(忽都魯揭理迷失)이다. 충선왕은 원에 가서 약 10년간 숙위하고 한국공주(韓國公主)와 결혼하여 충렬왕 24년에 즉위하였다. 충선왕은 1314년 충숙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당시 원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는데, 이를 통해 원으로부터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원의 무종(武宗)과 인종(仁宗:Aurbarwada)은 충선왕과 함께 어릴 때부터 동궁(東宮)인 광천전(光天殿)에서 동거동락하며 지낸 사이다. 성종의 사후에 무종과 인종 형제는 충선왕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는데, 그 이후 이들의 혈맹관계를 집작할 수 있다. 무종의 치세에 인종은 동궁에 있으면서 문무의 재능이 있는 선비들을 불러 들여 수용하였고 집권 이후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지대(至大) 4년(1311) 무종이 죽고 Aurbarwada는 인종으로 즉위하였다. 인종의 치세에는 충선왕이 만권당을 중심으로 동궁에서의 역할을 대신하여 조정안에는 혁신파의 정치결집의 거점으로 하고, 이들은 집권 직후 정치이념을 확립하고자 명유를 초치하여 자신들의 혁신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게 하였는데 조맹부도 이때(1310년) 합류하였다.
1313년 주자학이 관학으로 선포되면서 11월 과거제도가 부활되고, 1314년 3월 관학의 정비와 그 뒷받침을 하기위한 만권당(萬卷堂) 설립을 후원하였다. 여기서 남방과 북방출신을 막론하고 조맹부(趙孟?)ㆍ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우집(虞集)ㆍ왕구(王構)ㆍ이제현(李齊賢)ㆍ이란(李欄)ㆍ오징(吳澄)ㆍ등문원(鄧文源) 등과 노소를 불문하고 서로 사우관계를 맺으며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조맹부의 문하생인 주덕윤(朱德潤) 등이 모여 서화를 즐기면서 상당한 힘을 가진 정치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충선왕은 1313년 강능대군(江陵大君/忠肅王)에게 전위하고 인조의 등극과 동시에 배후 실세를 넘어선 전면에서 혁신정책을 주도하였으며,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제수되고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지며 중서성에 들어가 정사를 참의 함으로서 고려의 국왕일 뿐 아니라 원의 공신이자 정치적인 실력자로서 원의 정치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이런 상황은 인종의 치세인 1320년까지는 충선왕이 원에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고 고려에서도 정치적인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충선왕이 원했던 대원관계는 ‘세조구제(世祖舊制)’를 앞세워 독자적인 왕조체제를 유지하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원의 제후국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원의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재원생활은 원에서의 정치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인종은 1311년 조맹부를 집현전시강학사(集賢殿侍講學士) 중봉대부(中奉大夫)에, 연우(延祐) 원년(1314)에는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 집현시강학사(集賢侍講學士) 자덕대부(資德大夫)에, 1316년에는 한림학사 승지 영록대부(榮祿大夫)로 임명하고, 그의 말년기(1310~1322)의 약 10여년 동안은 비서감에 수장된 많은 서화를 감정하고, 표제를 썼으며, 이 때 수장된 수많은 고서화를 보았다고 여겨진다. 늘 조맹부의 글씨를 모아 보물로 수장하고 비서감에 이르길 ‘후세에 알리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일찍이 신하들과 문학사를 이야기하고, 또 다른 신하들과 다른 점을 들어 그의 혈통, 성품, 시문의 경향과 면모, 서화의 뛰어남, 종교에 이르기 까지 파악하였는데 인종이 이렇게 한 신하의 사적인 문제까지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수많은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종은 조맹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자앙을 당의 이태백, 송의 소자첨에 비할 수 있으며, 성품이 순정하며 학문이 박식하고, 들은 바가 많다. 서화에 절륜하며 불교와 도교를 잘 알아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바였다. 첫째는 제왕의 후예가 다른 점이요, 둘째는 풍모가 수려하고, 셋째는 박학하여 아는 것이 많은 점이요, 넷째는 행동이 절조 있고 방정한 것이요, 다섯째는 문사(文詞)가 고고(高古)한 것이요, 여섯째는 서화에 절륜함이요, 일곱째는 불노에 통하여 뜻이 심오함이다.”
이제현도 그의 시 ‘화정조학사’에서 조맹부를 직접 옆에서 겪어보고 평한 시가 있다.
늘 지필묵을 준비하여 갓끈을 날리며 다니다가
시 한수 이뤄지면 비단 옷을 얻은 듯 기뻐하도다.
멀끔한 풍채를 바라보면
일찍이 남조에서 제일이다.
풍류에 대한 생각이 항상 평안하여
글씨 또한 늘 새로워라.
천년에 볼 수 있는 진면목을 만나보니
집에도 명필인 위부인(菅道昇)이 있다는 얘길 들었다.
인종과 충선왕, 그리고 조맹부와의 특별한 관계는 당시 고려와 이제현에게 미치는 영향이 컸다. 당시 원 학사인 조맹부ㆍ요수(1236~1313)ㆍ염복(1235~1312)ㆍ우집ㆍ원명선ㆍ왕구ㆍ소석 등과 함께 교유한 이 만권당의 설치는 성리학의 수용은 물론 당시 신문화 수용의 창구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권당을 드나들던 원의 학사들을 보면 염복(1235~1312)ㆍ요수(1236~1313)ㆍ조맹부(1254~1322)ㆍ우집(1272~1348)ㆍ원명선ㆍ왕구ㆍ소석(蕭奭)ㆍ장양호(張養浩)ㆍ홍혁(洪革) 등이었다. 이들 구성원은 당시의 명유들로 모두 한족이며 강리기기(康里夔夔)같은 사람은 명필이라도 출입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만권당을 출입한 사람들은 서화가들이 아니라 당대의 유신들로서 개혁정치의 이론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요수ㆍ소석ㆍ염복ㆍ조맹부ㆍ원명선ㆍ장양호 등을 인종에게 동궁관(東宮官)으로 추천하였다가, 뒷날 만권당을 설치한 후에는 염복ㆍ요수ㆍ조맹부ㆍ우집 등을 초치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인종의 잠저유신(潛邸儒臣)이거나, 인종에 의해 발탁된 사람들이었다. 이것으로 보아도 충선왕과 원의 유신, 그리고 인종으로 이어지는 연결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요수는 당대의 명유로 금석을 좋아하고 고증하였으며, 고동기(古銅器)에 제발을 할 정도로 골동에 대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다. 글씨는 회소를 배웠던 인물이다. 그의 문집에 ‘고려심왕시서(高麗瀋王詩序)’란 서문이 있는데, 충선왕은 그의 시문을 얻기 위하여 폐백, 금옥, 명화 등을 아끼지 않았다.
충선왕은 조맹부로부터 서화를 전수 받아 그림을 잘 그렸다. 또 그는 “이곳 서울의 학자들은 모두 세상에 손꼽히는 학자들인데 내 주위엔 그런 사람이 없으니 부끄러운 일이다.”하고 이제현을 불렀다. 그가 원에 도착했을 때 요수ㆍ염복ㆍ원명선ㆍ조맹부 등이 모두 왕의 주위에 모여 있었다. 이제현은 그들과 상종하는 동안 학문이 더욱 발전하였으며 요수 등은 그를 칭찬하였다. 충선왕이 익재를 연경으로 초청한 것은 1314년 정월이었고, 조맹부는 61세로 약사경(藥師經/해서)을 썼으며, 그해 12월 집현전 시강학사 자덕대부로 종2품에 올랐다. 익재는 28세로 청장년기, 충선왕은 40세였다.
1320년 12월 토번으로 귀양 갈 때까지 약 7년 정도 존속하며, 인종의 후원을 배경으로 활동하였는데, 조맹부는 여기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조맹부는 1319년 4월 그의 부인 관도승이 각기병이 심해지자 인종이 집으로 돌아가 용양하라 하여 대도를 떠나 충선왕과 이별을 하면서 ‘유별심왕(留別瀋王)’이란 시를 남기고 있어서 서로의 관계가 각별하였음을 말해주고, 조맹부와 이제현과 같이 있을 수 있었던 시기는 약 5~6년에 해당한다. 여기서 이제현은 조맹부에게서 서화를 배웠다.
3) 조맹부체의 수용 경로
이제현은 원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조맹부ㆍ주덕윤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이곽(李郭)파 화풍을 비롯한 원대의 몇 가지 화풍이 고려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보아 서예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익재는 시서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말을 잘 그렸는데, 조맹부에게서 배웠다. 글씨는 초서를 잘 썼으며 <서회암심선사도호당명후(書檜巖心禪師道號堂名後)>에서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라고 하여 서예의 본질을 파악하고, 당시 연경에서 유행하던 조맹부체를 고려에 도입하여 유행시키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적과 서화ㆍ서책의 자료들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이때 인종황제는 서적 4371책 17000권을 왕에게 선사하였는바, 이 서적들은 모두 송나라 비각(秘閣)의 장서로 홍달(洪撻)의 요청에 의하여 보낸 것이다. 그리고 태자부 참군(太子府 參軍)으로 있던 홍달은 유연(柳衍)에게 돈을 주어 경적(經籍) 10800권을 구하여 돌아오게 하는 등, 원에서의 서적 구입은 한림원에서의 국가적 정책서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노국대장공주가 연경에서 올 때도 일용기구, 간책(簡冊), 서화 등을 배에 싣고 돌아와서 궁내의 임천각(臨川閣)ㆍ청연각(淸燕閣) 등이나 도내(都內)의 안화사(安和寺)ㆍ흥왕사(興王寺)에 수장하였다. 충선왕이 환국할 때에는 책과 서화를 가득 싣고 돌아와서 조맹부의 필적이 우리나라에 가득하게 되었는데,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조맹부체가 서풍을 주도하다시피 한 것은 이러한 많은 작품의 유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조맹부의 법첩이 우리나라에서 석각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궁중에서 석각한 <홍범>ㆍ<빈풍칠월> 등과 비해당 석각에 실려 있는 <심왕유별첩(瀋王留別帖)>ㆍ<전당상천축사백의대사상기(錢唐上天竺寺白衣大士像記)> 등은 모두 우리나라의 각품일 정도로 조맹부의 서법을 선호하였고 유행되었다. 만권당을 통해 들어온 조맹부체는 신흥사대부들의 호사스런 생활과 기호에 잘 부합되었으며, 조맹부체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서법계를 휩쓸었고, 그의 영향은 조선 후기까지 미쳤다. 사경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본디 전통적으로 쓰이던 당의 사경체는 그 서체의 양식에 있어서 한 장르를 이루고 있으며, 한반도에서 사경체의 영향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였고, 고려 문종 때 와서는 약 200년간 사경체ㆍ왕희지체ㆍ구양순체 등의 서체가 유행하다가, 충선왕ㆍ충숙왕대에 오면 서체가 부드러워지는데 이점도 고려 후기 조맹부체의 유행과 무관하지 않다.
충선왕의 개혁을 입안한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李?), 성리학을 널리 전파한 권부(權?/1262~1330), 권부의 사위인 이제현, 만권당에서 이제현과 함께 독서하며 문명을 떨친 권한공(權漢功/?~1349), 1307년 충선왕ㆍ이제현과 함께 서연관(書筵官)을 지냈던 채하중(蔡河中/?~1358), 충선왕비 조비(趙妃)의 매서(妹壻)로 충선왕과 함께 연경에 오래 있엇던 박경량(朴景亮/?~1320), 충선왕을 따라 원에 갔다가 충선왕이 유배당할 때 티벳(吐藩)까지 호종하였던 박인간(朴仁幹/?~1343), 김심(金深)ㆍ김이(金怡/1265~1327) 등은 늘 충선왕의 측근이었던 사람들로, 김이는 충선왕이 원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재(利財)의 능력을 발휘하여 왕을 도왔다. 이런 사행원과 호종하며 원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들도 역시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특히 최성지(崔誠之/1265~1330)는 글씨를 잘 썼던 사람이다.
3. 이암의 서체형성
1) 직간접적인 영향
(1) 행적과 사상
이암(1297~1364)은 고성사람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감찰대부(監察大夫)와 세자원빈(世子元賓)을 겸한 이존비(李尊庇/1233~1287)의 손자이며,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우(李瑀)와 박지량(朴之亮)의 여식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인 이존비의 초명은 인성(仁成)인데,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그의 외삼촌 백문절(白文節)에게 배웠다. 글을 잘 지었고, 글씨를 잘 썼는데 특히 예서를 잘 썼다. 이암의 초명은 군해(君?), 초자는 익지(翼之), 자는 고운(古雲), 호는 행촌(杏村)이라고 자호하였다. 우왕 때 충정왕(忠定王)의 묘정에 배향,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313년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충선왕은 철성군 이군해에게 국무를 총리할 것을 명령하였다. 충숙왕의 충애를 받아서 1314년(18세) 부인(符印)을 맡아 관리하였으며, 비서교감, 낭(郎)과 주부(主簿), 단양부좌도관을 거쳐 정랑이 되었다. 충숙왕 10년(1323) 27세 때에는 심양왕, 도첨의 정승 유청신(柳靑臣), 첨의 찬성사 오잠(吳潛) 등이 원 황제에게 청한 “국호폐지입성책동(國號廢止立省策動)”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의 소략에서 행촌의 자주ㆍ자립ㆍ자강의 기백과 포부와 의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천제의 아들로 제천을 행함으로 현재 분봉 받은 제후와는 근본이 서로 같지 않다. 국계(國界)를 허물지 말고 고유민속을 섞지 말라. 이미 고유의 기혼과 혈육이 있어서 한 근원의 조상을 갖게 되었으니, 이제 곧 신시개천(神市開天)으로부터 이를 삼한관경(三韓管境)으로 하고, 크고 이름난 나라를 하늘 아래 만세에 만들었기 때문에…군신이 자주ㆍ자강의 정책을 세우고 있는 이유이다.”
내시통직랑도관정랑 이암은 1327년(31세)에 왕명으로 <문수원장경비>를 썼다. 1332년 2월(37세)부터 1336년 3월(40세)에 이르는 4년간의 귀양살이에서 많은 서책을 탐구하였고, 사면 후에도 강화도를 돌아보고 천보산 태소암(天寶山 太素菴)에 머물면서 고대사를 연구하였다. 그는 불교나 성리학적인 측면과 자주ㆍ자강적인 철학을 갖고 실천 하였으며 도가적 성향이 짙게 행동하였다.
1332년(37세)에 충숙왕이 복위하자 충혜왕의 총애를 받았다하여 윤석(尹碩)ㆍ손기(孫琦)ㆍ김지경(金之鏡)ㆍ이군해(李君?) 등 28명이 옥에 갇혔다. 3월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1336년 3월 40세에 4년간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 1340년 48세에 충혜왕이 복위하자 지신사(知申使),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정당문학(正堂文學), 첨의평리(僉議平理) 등을 역임하고,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로서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인사행정을 그르치자 이를 규탄하다가 밀성(密城)에 다시 유배되었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충정왕을 받들기 위해 원에 다녀와서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이 되고 찬성사를 거쳐 좌정승이 되었는데 충선왕이 철성군 이군해에게 국무를 총리한 것도 이 때이다. 9월 왕위계승사로 이암은 원나라에 가서 왕위계승을 하례하였고, 10월 좌정승에 올랐다.
1352년 8월 이암은 이제현ㆍ백문보(白文寶)와 함께 날마다 교대로 공미왕을 모시고 학문을 강의 하였고, 1353년 57세로 자원하여 사직하고 청평산 춘성(春城)의 왕이 내려준 사전(賜田)에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실험 재배하는 등,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공민왕 5년(1356) 6월에는 농사와 잠업을 크게 장려하였는데 이암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그 영향으로 공민왕 5년 6월 “옷과 양식이 없으면 무엇으로 해를 넘기겠는가. 마땅히 중앙과 지방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뽕나무를 심고, 삼을 가꾸게 하되, 각각 인구수에 따라서 경작하는 비율을 정할 것이다.”라고 하여 농사와 잠업을 크게 장려하였다. 이러한 농업 생산력의 발달은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회 세력은 정치적ㆍ사회적ㆍ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변화를 가져왔다. 우왕(禑王) 때 처음 제정되어 조선시대에도 줄곧 통용된 ‘수령칠사(守令七事)’에도, 첫째로 ‘농상(農桑)을 번성하게 할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농업생산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었는지를 알 수 있다.
1359년 63세로 문하시중으로서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가 되어 홍건적의 침입에 이승경을 내세워 대적하였고, 1361년 65세에 왕과 공주가 대비(덕영공주)를 모시고 홍언박과 함께 시중하였다. 1362년 3월 66세로 시중을 사직하고, 1363년 2월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이 해운당에 머물면서 태갑편을 써서 왕에게 바쳐 임금의 도리를 지적해 주었다. 1364년 5월 그가 죽기까지 1년여를 해운당에서 머물지 않았나 생각된다.
충선왕 5년(1313) 17세로 문과에 급제, 지공거로서 모든 인사권을 쥐고 충선왕의 수족 역할을 하였던 권한공과 최성지가 “나라에 크게 쓰일 재능과 도량이다.”라고 한 점으로 보아, 그의 기본적인 자질을 엿볼 수 있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의 조자앙으로 불렸으며, 그림은 묵죽에 능했다. 관에서는 근면하고 법을 잘 지켰으며, 집에서는 재산의 유무를 불문하고 도서로써 즐겼다.
유배생활 4년과 직후 4년 동안 많은 서책을 탐구하면서 개인적인 시간을 가졌고, 사면된 후에도 강화도를 돌아보고 천보암 태소암에 머물면서 고대사를 연구하였으며, 당시의 도가들인 복안거사 범장, 소전도인ㆍ청평거사 이명 등과 어울린 이록과 ‘국호폐지입성책동’을 반대하는 소로보아서 그는 불교나 성리학적인 측면과 민족주의적이고, 자주ㆍ자강적인 철학을 갖고 실천하였으며 도가적 성향이 짙게 행동하였다. 이점은 조맹부가 유ㆍ불ㆍ도 삼교로서 삼교합일사상을 갖고 스스로 삼교제자라 하여 삼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졌으며, 이런 사상은 그의 예술세계에 영향이 지대하였던 것과 같이, 이런 사상은 또한 행촌의 서예세계에 많은 영향은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2) 인척관계와 주변인물
행촌은 충정왕 1년 9월(1349) 53세 때 왕위계승 하례사로 원에 다녀왔을 뿐 조맹부의 지도를 받은 적이 없다. 그가 조맹부체에 그렇게 정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어떤 법서를 참고하였으며, 누구의 지도를 받았느냐가 중요한데, 여기서 가학 관계와 사제관계, 인척관계가 일차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부 이존비는 안향(安珦)ㆍ김훤(金喧)ㆍ이혼(李混)ㆍ박전지(朴全之) 등과 더불어 유경(柳璥)의 문하인데, 문하생 중에서 이존비가 제일 먼저 국자감시(國子監試), 예부시(禮部試)를 주관하였다. 충렬왕은 세조 친조 이후 비칙치(必?赤)을 설치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는데, 이존비가 비칙치 14명 중의 한사람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아 국왕의 측근이었고, 1279년 충렬왕 때 밀직부사가 되어 성절사로 원에 다녀왔다. 본디 충렬왕 초부터 이혼과 함께 정방에 몸담고 있었으며 유경의 문하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안향이 원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인 뒤로 그 문하에서 백이정(白?正)ㆍ권부(權溥)ㆍ백문보(白文寶)ㆍ이인복(李仁復) 등이 수학하였으며, 백이정의 문하에서 이제현ㆍ박충좌 등이 있고, 이곡(李穀)ㆍ백문보(白文寶)ㆍ이인복 등은 백이정ㆍ권부ㆍ우탁(禹倬)을 이은 신흥유신들로, 특히 만권당에서 이제현이 원의 유가들과 교유하여 본격적으로 성리학이 보급되고 과거제도를 부활함에 따라서 서체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당시 백이정(1247~1353)은 충렬왕 24년(1298) 52세로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10년간 머무르며 주자학을 연구하고, 62세 때 귀국하여 이제현ㆍ박충좌(朴忠佐) 등을 가르침으로써 성리학을 전파하고 있을 때였다. 이 때 행촌은 12살의 나이로 과거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 이며, 조맹부는 45~55세 전후의 시기로 정무본 난정서를 보고 왕희지에 심취하였던 조맹부체의 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이다. 22세의 이제현과 박충좌는 28세에 연경으로 가기 전까지 6년간 백이정의 문하에서 성리학 등 신학문에 대하여 공부하던 시기이다.
조맹부는 백이정보다 7년 아래로 백이정이 10년간 연경에 있는 동안 서로 교류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때 이미 조맹부체가 백이정이나 또는 중국을 왕래하는 그의 문하생과 사신, 유학생들을 통하여 국내에 입수되었을 것이다. 백이정은 이존비와 서로 외사촌인 관계를 미루어 보아, 이암의 서책 입수의 경로는 백이정에게 직접 전수 받았거나, 그의 측근으로부터 조맹부체를 접하였을 것이다. 행촌은 12세부터 약 4~5년간 과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맹부체에 대하여 개안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암이 백이정의 문하에서 직접 공부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백이정의 문하생인 박충좌의 관계를 보면, 이존비는 박장(朴莊)의 장인이요 박충좌의 외조부다. 박장의 삼촌인 朴之亮(朴之亮/?~1292)은 이존비의 아들 이우(李瑀)의 장인이라는 인척관계를 살펴 볼 때 충분히 백이정의 문하를 출입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박충좌는 이제현과 동갑으로 백이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손자인 이암과 외손인 박충좌는 고종사촌으로 이제현과 함께 10년 차이의 선배요, 동료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처지로 백이정이 원에서 가져온 서첩과 같은 자료를 과거준비과정에서 참고하였을 것이다. 당시 새로운 서풍으로 연경에서도 유행을 하였던 조맹부체는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시험 답안지 작성의 서체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런 영향은 조맹부체의 유행을 가져왔다.
이제현이 1314년 충선왕의 부름으로 연경으로 향할 때 이암은 18세의 청년기이며 과거에 급제(1313)한 후 한해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이제현이 원에 머무른 것이 10년 정도임을 계산해 보면 이제현이 입국할 때 많은 서책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이암 또한 28세로 <문수원장경각비>가 31세에 서사한 것을 감안해 보면 벌써 훨씬 전부터 조맹부의 서화를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현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세히 알 수 는 없지만, 그의 시 <식영암입경견시자문질희정일절(息影菴入京遣侍者問疾戱呈一絶)>로 보아 이제현과 이암은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수광(李?光)은 『지봉유설』에서 “서법에 세업이 많다. 왕희之와 왕헌지 부자, 구양순과 구양통 부자가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이암과 이강부자, 김희수와 김노 부자가 글씨를 잘 썼으니 대개 혈기에서 나온 까닭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암과 이강의 경우 특히 이존비와 이진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과 인척관계로 맺어진 주변 환경이 명필 행촌을 있게 하였다. 앞서 지적한 유경의 후손과 백문절의 가문, 박충좌 가문과의 관계는 분명 행촌의 사상과 서예 등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3) 주변 환경
이암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기록을 통하여 살펴보면 급암(及菴) 민사평(閔思平/1295~1359)은 그의 시 <행촌서실매화(杏村書室梅花)>에서 이암을 ‘청평에 숨은 군자(淸平隱君子(淸平隱君子))’라고 하였으며, 가정 이곡은 <기이행촌(寄李杏村)>에서 그의 욕심 없는 생활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까마귀의 너리가 어찌 희어질 수 있으며
속안이 어찌 청안이 될 수 있겠는가.
멀리 바라길 밝은 창 아래서
향을 사르고 붕경을 베끼고자 한다.”
야은 길재는 <여행촌이암(與杏村李?)>에서
“새는 산에서 날고, 고기는 물에서 노닐어
각각 그 성을 따라 세간에 어울리건만
어찌 정원속의 봄 나비처럼
꽃들만 찾아 나서는가.”
라는 시구로 보아서 행촌은 속세와 어울리지 않고 얼마나 자기 현실에 충실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둔촌(遁村) 이집(李集/1327~1387)은 <행촌서사(杏村書事)>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벼슬길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이 다녔던가
수레바퀴가 상했도다.
청산의 맑은 물은 사립문을 돌아 흐르고
명월과 청풍은 옷 속으로 시원하게 스며들도다.
미륵평(彌勒坪) 어귀에는 존귀하신 부처님 생각하옵고
관음포(觀音浦) 위에서 어부에게 묻노니
농사일 더불어 같이 얘기할 사람 없어
외로히 큰 수심 석양에 의지하도다.”
라고 하여 관계에서 물러나 충실한 신앙생활과 자연을 벗하며 지내는 노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행촌병중서사(杏村病中書事)>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해묵은 근심은 아니거늘
강변에서 노년을 보내도다.
먹고 살일 생각하면 밭은 멀어도 좋고
집은 외딴집이라도 상관없다.
시원하게 나무에 기대어 앉아
비를 피하다가 도롱이를 쓰고 잠들도다.
다만 농사 얘기하길 좋아하여
벼농사 삼 농사는 작년보다 나으리.”
역시 행촌의 전원생활의 면모를 노래했다. 양촌 권근은 그의 시 <제행촌소루>에서
“외딴집에 찾는 이 없고
집을 지은 지 한 해 정도 지났도다.
오동은 무성하여 해를 가리고
숲은 우거져 집이 감춰지도다.
집터는 황폐하고
현철들은 이미 멀어졌으니
서로 바쁘게 일깨운 뒤
검소를 가르쳐 교만하고 사치하지 않게 하도다.”
이 역시 행촌이 살았던 주변 환경과, 그의 검소하고 사치하지 않는 생활방식이었다. 시들에 표현된 그의 면모를 다시 정리하여 보면 욕심 없는 구도생활과, 관계(官界)에서 물러나 충실한 신앙생활과, 농사지으며 지내는 노년의 모습, 전원생활의 일상적인 모습, 영욕에 얽매이지 않고 속세와 어울리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노년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2) 조맹부체와 이암서체의 비교분석
행촌의 글씨는 31세 내시통직랑(內侍通直郞)의 신분으로 쓴 <문수원장경각비>(1327)가 탁본으로 전한다. 원 順帝의 황후가 황태자와 황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대장경 일부를 문수사(청평사)에 보낸 사실을 비에 새긴 것이다. 글은 이제현이 짓고, 글씨는 이암이 썼다.
삼국 이래 두전은 소전(小篆) 형식의 도식적인 결구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반하여 <문수사장경비두전>은 진전(秦篆)의 진수를 체득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삼국 이래의 두전 가운데 명품으로 꼽힌다. 조맹부의 <구악비>ㆍ<삼문기두전>과 이암의 전서를 비교해 보면 큰 차이를 알 수 있다.
조맹부의 <삼문기두전>은 용필법에 있어서 거의 절(折)이 없는 일필(一筆)의 획을 사용하였다. ‘玄’자의 첫 획 기필과 ‘重’자의 기필이 측필로 역입 하였고, 기필할 때도 방필(方筆)을 주로 사용하였다. 글자의 크기에 비하여 획이 약간 가늘며, 필속이 빠르고, 결구는 소전의 전형을 따랐으며, 아름답게 쓰려고 노력하였다. 기필과 수필에 있어서도 기필의 역입과 수필의 회봉이 정확하지 않다.
반면에 이암의 <문수원장경각비두전>은 필획이 조맹부체 보다는 굵어 웅건하게 보이며 장중한 맛이 나고, 기필과 수필에서 역입과 회봉이 정확하고 신중하며, 결구는 [寺]에서 윗부분의 좌우에 있는 2ㆍ3획이 사선으로 오므라진 것으로 보아 당 이양빙(李陽氷)을 따랐다. 비문의 서법은 전첩본이라서 전체적인 장법은 알 수 없지만 글자마다의 결구가 빈틈이 없고 필획이 굳세고 웅장하여 조맹부체의 연미한 단점을 보완하여 힘차고 웅강하며 장중한 서법을 구사하였다. 이암의 <장경비>와 조맹부의 <증도가>를 비교해 보아도 <장경비>가 <증도가>보다도 필획이 굵어 장중하고, 결구에 있어서도 탄탄한 느낌이 나는 반면 <증도가>는 화사하고 아름답다. <장경비>는 은근하게 숨은 향기가 있고, <증도가>는 눈을 톡 쏘는 화사함이 있다.
행촌과 송설의 다른 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필획에 있어서 ‘一’에서 행촌은 기필이 굵고 수필이 가늘다. 그러나 송설은 기필은 가늘고, 수필은 굵어 서로 반대이다. 행촌은 송설보다 필획이 굵으면서도 필속이 빠르다. 필획의 각도가 송설보다 심하여 긴장되며 엄숙한 느낌이 난다. 필획에 있어서 행촌은 송설보다 기본에 충실하여 중봉의 필법을 정확하게 지켰으나, 송설은 편봉을 묵인하여 여리고 가볍게 보인다. 그래서 행촌은 송설보다 필획이 굳세고 육중하게 보인다. 행촌의 필획은 변화가 심하고 필속의 지속과 완급, 선질(線質)의 곡직(曲直)과 원방(圓方) 등의 사용을 풍부하게 하여 많은 내용을 표현하려 하였다. 필속은 행촌이 송설보다 느리지만 풍부한 내용이 있고, 송설은 빠른 필속으로 허획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여 가볍게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결구에 있어서는 전체적으로 송설의 증도가 보다는 행촌의 글씨가 공간의 제약이 심하고 긴장되어 있다. 행촌은 정형을 주로 사용하여 근업하며, 송설은 즐거운 기분으로 자형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썼다. 송설의 결구는 느슨하여 긴장감이 없으며 공간을 허비한 느낌을 갖게 하는 반면, 행촌의 결구는 촘촘하면서도 답답하지 않고 웅건하며 장중하면서도 공간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였다. ‘有’ㆍ‘元’ㆍ‘君’ㆍ‘子’ 등의 글자를 보면 행촌이 얼마나 송설에 능했는지를 알 수 있다. 행촌은 송설의 가늘고 연미한 필획과 여유로운 결구에 대하여 혐오하였고 바로 이런 단점을 고쳐 행촌 특유의 서법세계를 구축하였다.
3) 이암서체의 평론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행촌과 자앙은 일시에 그 필세가 서로 적수였다. 그러나 행서와 초서에 있어서 종횡한 즉 마땅히 양보해야 할 것이다.”라고 꼬집어 지적하였다. 행촌의 서법세계는 송설의 노련함과 화려함에 굳세고 웅장한 필력을 가미해서 얻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서거정의 「이원비명(李原碑銘)」에서 “시는 간고(簡古)했고 해서ㆍ행서ㆍ초서가 모두 절묘했다”라고 했으며, 서정에는 “우리나라 서법을 얘기하자면 김생이 제일이요, 다음은 행촌이다”라고 하여 해동 서성(書聖) 김생의 다음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서법에 세업이 많다. 즉 왕희지와 왕헌지, 구양순과 구양통의 부자들이 있고, 우리나라엔 이암과 이강, 김희수와 김노 부자가 글씨를 잘 썼으니 대개 혈기에서 나온 까닭일 것이다”라고 하여 이암과 이강의 경우도 이존비와 이진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과 인척관계로 맺어진 주변 환경이 행촌을 낳았다. 앞서 지적한 유경가문의 후손과 백문절의 가문, 박충좌 가문과의 관계는 분명 이암의 사상과 서예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보며 좀 더 면밀한 파악이 요구된다. 우리나라 사람들로써 송설의 필법정신을 얻은 자는 행촌 이암 한 사람 분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역시 행촌은 조맹부체의 신수(神髓)를 터득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동국금석평>에 “청평사의 행서는 기품이다”라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많은 숙련과 타고난 기질에 근거하여 송설을 본받았으나 송설보다. 나은 또 다른 세계를 보여 주었음을 말한다.
4. 후대의 영향
고려 말에 수용된 조맹부체(송설체)의 서법은 조선에 와서도 이후 200년 가까운 기간을 풍미하였다. 이것은 고려 충선왕대에 직접 조맹부를 배운 서가가 많은 탓도 있지만, 한편 조맹부의 진적이 대량으로 수용되고, 그것이 교본인 법첩의 형태로 간행된 경우도 적지 않은 까닭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글씨는 곧 그 사람의 인품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태종 5년 이조판서 이직은 인재발굴에 대한 상소문에서 “서예(書藝)ㆍ산학(算學)ㆍ율학(律學) 등으로써 그 가부를 시험해서 서용해 요행을 막으소서”라고 하여 대단히 비중을 크게 두었으며, 태종 6년에도 인물을 전형하여 선발하는 법을 이조에서 올렸는데 서예ㆍ산학ㆍ율학 등의 과목이었다. 이조에서 사관(史官)을 천거하는 대목에서도 “서법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천거하니…”라고 하였으니 서법은 관료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과목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서체를 진작시키기 위한 노력의 흔적은 많이 보인다. 어느 경우보다도 왕이 직접 조맹부의 묵적을 모아 인쇄하여 널리 보급할 것을 교서관ㆍ예조ㆍ홍문관 등에 지시하였고, 그 결과 조맹부의 보급은 급속히 확산되어 문종ㆍ세조ㆍ안평대군ㆍ성종 등의 왕과 왕족은 물론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 인쇄물의 활자체ㆍ각종문서ㆍ사경 에 이르기까지 조맹부체(송설체)의 일색을 가져와 광범위하게 유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조맹부체(송설체)가 유행하게 되었다. 조선왕조 전체에서 서예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시기인 세종에서 성종(1418~1494)의 약 80년간은 조맹부체(송설체)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세종대에는 실로 서화 양면에 금자탑을 세운 시기라 하겠다. 이 시기에는 세종의 문화정책이 한창 꽃을 피울 때여서 집현전을 중심으로 많은 명사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은 거의 다 무계정사(武溪精舍)에 출입하였다. 조선조 최고의 서예가인 안평대군이 있고, 화가로는 안견(安堅)과 강희안(姜希顔) 등이 있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약 200년간은 조맹부체(송설체)가 휩쓸었는데 조맹부체(송설체)의 유행에 크게 바람을 일으킨 사람은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다. 안평대군 이용은 조선 전 시대를 대표할 만한 명가이다. 이광사(李匡師/1705(숙종 31)~1777(정조 1)는 그의 <서결(書訣)>에서 얼마나 조맹부체(송설체)가 유행하였는지를 말해주는 당시 상황에 대한 적절한 지적을 하였다.
“청지(淸之)는 귀공자로써 자앙(子昻)의 필법을 수창(首唱)하여 일세(一世)를 어지러히 빛냈다. 이런 연유로 열조의 어필이 모두 이 필법을 썼고, 드디어 나라전체의 풍속이 되어 모두 이 필법이 근년 이래로 풍미 하였다”
문종(文宗/1414~1452)은 천선이 너그럽고 성리학에 심정하고 문사(文詞)ㆍ천문(天文)ㆍ력산(曆算)ㆍ성운(聲韻)과 백가에도 신묘한 경지에 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한 동궁에 있을 때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어 강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모든 행동을 법도에 따라 하였다. 희노(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성색을 몸에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 몸을 수양하며 심신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환하게 살펴서 평상시에는 다른 사람과 논변하지 않지마는 논란한데 이르러서는 노사숙유(老士宿儒)라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글씨는 초서와 예서를 잘 했는데 조맹부의 글씨를 좋아하여 왕희지의 서법과 혼용하여 썼으며, 혹은 등불아래에서 글씨를 쓰더라도 정묘하여 영묘한 지경에 들어갔으니, 『용천담적기』에 “왕께서는 해법(楷法)에 정밀하시고 굳세고 생동하여 진인(晉人)의 심오한 이치를 깊이 이해하였다. 다만 석각 수본이 세상에 전하며 지극히 보배롭고 신비로우나 진적이 드문 것은 아깝다”고 하였고, 또 “조자앙 서법을 모방하여 정묘한데 입신하였고 촌간척지라도 얻으면 천금과 같이 귀중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열성어필』속의 칠언절구의 초서가 있는데 왕희지와 조맹부의 화려함과 정연함보다는 호방하고 활달한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조맹부체(송설체)의 제 일인자는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이다. 안평대군은 서예 뿐 아니라 시문ㆍ회화에 까지 뛰어났으며 평소 거처함에 있어서도 법서와 명화, 책들을 쌓아 놓고 몰입하였다. 창의문(彰義門) 밖에는 무계정사(武溪精舍), 남호(南湖)에는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놓고 만권의 장서로 문사들을 불러 모아 비해당 십이경시(匪懈堂 十二景詩)를 지었고, 사십팔영(四十八詠)이 있으며, 시를 갖춘 그림으로는 <임강완월도(臨江玩月圖)>ㆍ<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ㆍ<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등이 있다.
조맹부가 원 세조에게 최고의 대우를 받던 호귀인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서풍에는 궁색하거나 부자연한 곳이 없이 청정한 심기가 있었던 것과 같이, 안평대군도 세종의 왕자로서 호화귀공자의 풍류운치를 그대로 살려 마음대로 세속을 일탈하나 생활을 누렸으므로 자연스런 발달을 이룬 것은 조맹부와 비슷한 점이 있다. 글씨는 조맹부체(송설체)를 배웠지만 표일(飄逸) 청준(淸俊)한 기풍(氣風)과 호방한 서풍은 그의 개성을 발휘해 조맹부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조맹부체(송설체)를 선호한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에 조맹부의 진적이 워낙 많았음에 기인한 것인 듯하다. 신숙주(申叔舟)의 <화기(畵記)>에 의하면 안평대군의 서화소장 내용에 글씨는 소동파(蘇東坡)의 진서호주인본(眞書湖州印本)이 한 점, 조맹부의 행서가 26점, 묵죽이 2점, 선우추(鮮于樞)의 초서가 6점이다. 이들 수장품은 그의 서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으리라 여겨지는데 조맹부의 행서가 단연 많다.
사신으로 온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은 신숙주(申叔舟)ㆍ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있을 때, 예겸이 비해당(匪懈堂)이 쓴 ‘범옹책(泛翁策)’이란 세 글자를 보고 누구의 글씨냐고 물으니, 신숙주가 “거짓으로 내 친구 강경우(姜景遇/姜希顔)의 글씨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이 이를 듣고 “왕손공자가 문아를 귀하게 여기는데, 그 예술에 있어 무었을 꺼리겠는가”하고는 비해당으로 하여금 써주게 하였다. 비해당은 하룻밤사이에 해서ㆍ행서ㆍ초서 수백 장을 써서 보내니 두 사신은 기뻐하고 부시(賦詩)를 지어 사례하였는데, 이것이 <예내한사마우사량천사증비해당시첩(倪內翰司馬右史兩天使贈匪懈堂詩帖)>이다.
박팽년의 유고인 「박선생유고(朴先生遺稿)」에 의하면 비해당은 이 시첩에 “박팽년에게 제발을, 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에게 서문을, 정인지(鄭麟趾)ㆍ신석조(辛碩祖)ㆍ성삼문(成三門)ㆍ이용(李瑢)ㆍ서거정(徐居正)ㆍ김종서(金宗瑞)ㆍ하연(河演)ㆍ안지(安止) 등으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는데, 모두 그 수필(手筆)이 절세의 기관이었다”는 것이다. 예겸과 사마순이 안평대군에게 써 준 시첩에 안평에 대한 평이 있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첫 수를 열었다.
“글씨 좋아하는 왕자는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일시에 송운(松雲)의 풍류가 있었다.
아름답기로는 꽃을 꽂은 듯 여러 모양 끝이 없고 맑은 빛이 햇살 같아 상당히 기묘한데
이런 묘수를 흠모한지 오래였으니 과연 명성을 천하가 보아 알 듯 나에게 있는 아계산(鵝溪産) 명주 1필을 그대에게 주노니 붓을 적셔 아낌없이 힘차게 써보오“
예겸과 사마순은 이 때 써준 안평대군의 글씨를 황제에게 바쳤는데 황제께서 “매우 좋다. 꼭 이것이 조자앙의 서체이다”라고 하면서 칭찬하였다고 한다. 수양대군이 태평관(太平館)에서 온짐연(溫斟宴)을 대행하는데 안평대군이 술을 따르니 사신이 하는 말이 “감히 묘필을 청하여 중국에 전하려고 합니다”하니 안평은 수십 폭을 써서 종부판관 황의헌(宗簿判官 黃義憲)을 시켜 사신에게 주었다. 사신이 탄상하며 말하길 “우리나라는 진겸(陳謙)이 글씨로 이름이 났는데, 필력이 굳세고 활발한 기상이 이에 미치지 못하니 참으로 송설옹(松雪翁)의 삼매를 얻은 것입니다”라 하고, 각각 시와 부를 지어 사례 하였다.
그는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어 놓고 문인학자들을 초빙하여 매일 연회를 베풀었는데, 집현전학사들(集賢殿學士)을 중심으로 많은 명사들이 모여들었다. 시로는 <비해당십이경(匪懈堂十二景)>ㆍ<사십팔영(四十八詠) 등이 당시 사람들의 문집에 있고, 그림과 시를 갖춘 것으로는 <瀟湘八景詩帖>ㆍ<臨江玩月圖>ㆍ<夢游挑源圖> 등이 있다. 1442년의 <비해당소상팔경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과 1447년의 <몽유도원도시권(夢游挑源圖詩券)>에 관여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해당소상팔경시권>에 이영서(李永瑞)ㆍ하연(河演)ㆍ김종서(金宗瑞)ㆍ정인지(鄭麟趾)ㆍ조서강(趙瑞康)ㆍ강석덕(姜碩德)ㆍ안지(安止)ㆍ안숭선(安崇善)ㆍ이보흠(李甫欽)ㆍ남수문(南秀文)ㆍ신석조(辛碩祖)ㆍ류의손(柳義孫)ㆍ최항(崔恒)ㆍ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신숙주(申叔舟)ㆍ윤계동(尹季童)ㆍ김맹(金孟)ㆍ석만우(釋卍雨) 등 19명과, <몽유도원도시권(夢游挑源圖詩券)>에 안평대군(安平大君)ㆍ신숙주(申叔舟)ㆍ이개(李塏)ㆍ하연(河演)ㆍ송처관(宋處寬)ㆍ김담(金淡)ㆍ고득종(高得宗)ㆍ강석덕(姜碩德)ㆍ정인지(鄭麟趾)ㆍ박연(朴堧)ㆍ김종서(金宗瑞)ㆍ이적(李迹)ㆍ최항(崔恒)ㆍ박팽년(朴彭年)ㆍ윤자운(尹子雲)ㆍ이예(李芮)ㆍ이현로(李賢老)ㆍ서거정(徐居正)ㆍ성삼문(成三問)ㆍ김수온(金守溫)ㆍ석만우(釋卍雨)ㆍ최척(崔?) 등 22명, 모두 41명인데 중복된 하연ㆍ김종서ㆍ정인지ㆍ강석덕ㆍ최항ㆍ박팽년ㆍ성삼문ㆍ신숙주ㆍ석만우 등 9명을 제외하면, 32명에 달하여 당대의 문필가 모두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들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96세의 노승으로부터 28세의 서거정에 이르기 까지 나이ㆍ신분ㆍ직위를 막론하고 비해당(匪懈堂)의 무계정사(武溪精舍)와 담담정(淡淡亭)에 모여 화사(畵師)인 안견(安堅)과 더불어 시문과 서화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모두가 안평대군의 무계정사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현재도 <비해당소상팔경시첩>과 <몽유도원도시권> 등이 전하고 있는데 역시 조맹부의 서법이 많음을 볼 수 있다.
1442년에 제작된 <비해당소상팔경시권>에 대하여는<비해당소상팔경시첩해설>에 자세하다. <동서당고첩(東書堂古帖)>에서 송 녕종(寧宗)이 쓴 팔경시를 보고 그 시를 모사하고 경치를 그리게 하여 고려 시인 진화(陣?)와 이인로(李仁老)의 시를 써서 뒤에 붙이고, 당시의 문필가 19명에게 시를 청하여 쓰게 하였으며, 이영서에게 서문을 짓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시는 자필로 썼다고 믿어지는데 이들의 서체를 간단히 살펴보면 해서가 5점, 행서가 12점, 예서가 1점으로 전서를 제외한 각체가 고루 갖추어져있고, 이인로의 시와 진화의 시는 누가 썼는지 낙관이 없으나, 진화의 시ㆍ정린지ㆍ조서강ㆍ강석덕ㆍ안숭선(安崇善)ㆍ이보흠(李甫欽)ㆍ류의손(柳義孫)ㆍ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 등의 글씨가 모두 조맹부체로 되어 있는 것은 그 당시 조맹부체의 유행을 잘 얘기해준다.
안평대군이 쓴 금석으로는 여주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를 정인지가 비문을 짓고, 안평대군 이용이 전액을 붉은 글씨로 썼으며, 수원<청천부원군침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과천<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가 있다.
이렇게 문화를 애호하는 예술인으로서 그를 추종하거나 교유하였던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박팽년(1417~1456)ㆍ성삼문(1418~1456)ㆍ강희안(1419~1464)ㆍ서거정(1420~1488)ㆍ성임(1421~1484) 등이 조맹부체에 능했던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안침(安琛), 임사홍(任士洪/1445~1506), 성종(1457~1494), 신공제(申公濟/1469~1538), 임희재(任熙載/1472~1504), 소세양(蘇世讓/1486~1563)ㆍ이명규(李名珪/1497~1560)가 있으며, 예서와 초서에 능했던 김희수(金希壽)와 김로(金魯/1498~1548)부자는 왕희지부자의 필법을 본받았으며 조맹부체 또한 잘 하였다.
이러한 조맹부체의 유행은 인쇄활자의 서체에 있어서도 영향이 켰고, 이럼 점은 조맹부체를 대중화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왕명으로 조맹부의 진필을 여러 차례 수집하여 간행하였는데, 태종(太宗)은 대소신료들에게 왕명으로 각도에 소재한 사사(寺社)의 비명을 탁본하여 서법으로 삼고자 모인하여 바치게 하였다. 세종은 조맹부의 글씨로 새겨 인쇄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종친과 여러 신하에게 하사하였고, 문종 4년에는 안평대군이 <역대제왕명현집(歷代帝王明賢集)>이란 고첩과 <왕희지행초(王羲之行草)>ㆍ<조자앙진초천자문(趙子昻眞草千字文)> 등의 서법판본을 바치니, 교서관에 명하여 사람들이 모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세조는 주자소(鑄字所)ㆍ교서관(校書館)ㆍ승정원(承政院)ㆍ예조(禮曹) 등에 명하여 성균관의 학생들과 일반인에 이르기 까지 조맹부의 글씨를 자본으로 삼아 학습하게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역대 왕들이 조맹부를 선호 하였고 수집ㆍ인출하여 서체의 보급에 앞장섰으며, 특히 세조는 어느 왕보다도 수집과 인출을 많이 하여 조맹부의 대중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궁중의 내외가 모두 이런 시류에 합류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서사문화에 조맹부체의 유행을 가져왔다.
인쇄의 활자서체에 있어서도 1434년 갑인자(甲寅字)를 시작으로 1684년 운각자(芸閣字)가 출현하기 전까지 조맹부서법이 지배적이다. 갑인자는 위부인자(衛夫人字)라고도 하는데 경자자(庚子字)가 너무 작고 조밀하므로 보기 어렵다 하여 대군들의 요청으로 활자를 새로 주조하였는데 명 초의 판본인 <효순사실(孝順事實 )>ㆍ<위선음즐(爲善陰?)>ㆍ<논어> 등의 서적을 자범(字範)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쓰게 하여 김돈(金墩)ㆍ이천(李?)ㆍ김빈(金?)ㆍ장영실(蔣英實)ㆍ이세형(李世衡)ㆍ정척(鄭陟)ㆍ이순지(李純之) 등에게 명하여 두 달 동안에 활자 20여만 자를 주조하였다. 이 활자가 조선 활자사상에 있어 중추라 할 수 있는 갑인자이다. 특히 갑인자는 왕희지와 조맹부의 서체로 아름답고 인쇄가 깨끗하여 여덟 번이나 개주하여 사용된 글자인데, 을해자와 함께 조맹부체의 유행에 큰 역할을 하였다.
1434년의 갑인Ⅰ자본(세종갑인자)으로는 <대학연의(大學衍義)> 등 76종, 1497~98년 갑인Ⅱ자본(성종갑인자)으로는 <성종실록(成宗實錄)>(정족산본) 등 20종, 1515년 갑인Ⅲ자본(중종갑인자)으로는 <삼국지(三國志)> 등 59종, 1573년 갑인Ⅳ자본(선조갑인자, 계서자)으로는 <전주정절선생집(箋註靖節先生集)> 등 23종, 1618년 갑인Ⅴ자본(광해군갑인자, 무오자)으로는 <양자법언(楊子法言)> 등 3종, 1668년 갑인Ⅵ자본(현종갑인자, 무신자)으로는 <잠곡선생유고(潛谷先生遺稿)> 등 142종, 1772년 갑인Ⅶ자본(영조갑인자, 임진자)으로는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등 75종, 1777년 갑인Ⅷ자본(정서자, 정조갑인자)으로는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 등 13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8차례에 걸쳐 개주되었으며, 411종의 갑인자본 서책이 인쇄 보급되었다.
1436년의 병진자본(丙辰字/晋陽大院君)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訓義)>이 있고, 1450년의 경오자본(庚午字/安平大院君)으로는 <역대십팔사략(歷代十八史略)>,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 등이 있다. 1455년의 을해자본(乙亥字/姜希顔字)으로는 <훈사(訓辭)> 등 172종으로 갑인자본 다음으로 많다. 1455년의 정축자본(德宗字)은 <금강반고파라밀경(金剛般高波羅密經)> 등 5종, 1461년의 세조자본은 <훈사(訓辭)> 등 9종, 1465년의 을유자(鄭蘭宗字)은 <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圓覺經口訣)> 등 12종, 1493년의 계축자본은 <신편고금사문류취(新編古今事文類聚)> 등 6종 등으로, 모두 618종이 모두 조맹부체인데, 이러한 출판의 사실만으로도 조맹부체 유행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서책의 보급으로 인한 조맹부체의 전파상황도 역시 서책의 보급과 비례하였다 할 수 있다.
문서는 역사서적ㆍ문집ㆍ의궤 등의 서적류와 추안(推案)ㆍ국안(鞠案) 등의 재판관계서류, 기부(記簿)ㆍ장부(帳簿) 등의 상업관계문서 등을 비롯하여 관청 및 국가 간에 오가던 관문서(官文書)ㆍ공문서(公文書)ㆍ사대문서(事大文書)ㆍ교린문서(交隣文書) 등과, 개인 간의 토지ㆍ노비ㆍ가옥매매ㆍ재산상속과 전곡차용(錢穀借用) 때 사용된 문권(文券)ㆍ문기(文記) 등의 모든 문서가 포함된다. 문서는 원본ㆍ초본ㆍ사본(寫本) 등의 세 가지가 있다. 원본은 하나만 작성되는 단문서(單文書)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왕의 교서(敎書)ㆍ윤음(綸音)과 그리고 관청의 방(榜)이나 재산분배를 위한 화회문기(和會文記) 등은 2통 이상 작성된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서는 이성계호적(李成桂戶籍) 원본을 비롯하여 교지(敎旨)ㆍ교서(敎書)ㆍ녹권(錄券) 등이 전하는데, <예천용문사교지(醴泉龍門寺敎旨/1457)>ㆍ<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1464), 1464년 세조가 연원군 이숭원(延源君 李崇元)에게 내려준 교지와, 1472년 세조가 연원군 이숭원(延源君 李崇元)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하면서 작성한 교서 등이 있다. <예천용문사교지(醴泉龍門寺敎旨/1457)는 세조가 친히 어압(御押)하여 내린 교지로 불법(佛法) 옹호정책을 썼던 그는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게 사찰을 보호하고 잡역을 덜어 주라는 내용으로, 이무렵 부터는 공문서에도 조맹부체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황(李滉/1507~1570)은 종요와 왕희지의 서법을 좋아 하였고, 조맹부를 겸하였다. 그는 글씨에 대하여 그의 시 <습서(習書)>에서 “자법(字法)은 심법(心法)이며 습서에는 명필을 구할 필요는 없다”라하고, 글씨도 위진(魏晉)의 글씨가 자연스럽다고 역설하여, 조맹부의 연미하고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필법에 반기를 들었다. 이는 사조의 전환기를 가져온 이황(1501~1570)의 출현으로 성리학적 견지에서 조맹부체는 이미 깊이를 잃고 가볍게 보이며 저속하고 혐오감이 만연하여 이윽고 유학의 부활사상에 의해 천고의 성서인 왕희지의 필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부르짖은 이론적 바탕이 된다. 이런 사상적 기조는 정자(程子)의 말에서도 볼 수 있다.
“무릇 완호는 모두 사람의 올바른 뜻을 빼앗는다. 서찰은 유자의 일에 가까운 것이나 오로지 이일만을 좋아하여 집작하면 역시 그 뜻을 잃어버린다. 가령 왕희지(王羲之)ㆍ우세남(虞世南)ㆍ안진경(顔眞卿)ㆍ유공권(柳公權) 등과 같은 무리들은 진실로 좋은 사람들이라 하겠으나, 일찍이 글씨 잘 쓰는 사람으로서 도를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평생의 정력을 이 글씨 쓰는데 만 쏟았으니, 이는 오직 한갓 시일만 헛되이 보내었을 뿐 아니라, 도에는 방해된 것이 있었으니 그 것이 족히 뜻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복고를 주창하던 한퇴지(韓退之)의 ‘문이재도(文以載道)’와 일맥상통하며 이황의 고법론(古法論) 또한 이러한 견지에서 주장되었을 것이다. 이런 영향으로 16세기에 들어서 위진(魏晉)으로의 복고주의경향으로 조맹부체의 유행이 줄고, 왕희지 필법이 새로이 대두되었으나, 성세창(成世昌/1481~1548)ㆍ소세양(蘇世讓/1486~1562)ㆍ정유길(鄭惟吉/1515~1590)ㆍ송인(宋寅/1517~1584)ㆍ이산해(李山海/1539~1609)ㆍ김현성(金玄成/1542~1621) 등에 의하여 조맹부체의 명맥이 이어졌다. 왕희지체와 한호(韓濩)의 석봉체(石峯體)가 유행되는 중에도 조희일(趙希逸/1575~1638)ㆍ신익성(申翊聖/1588~1668)ㆍ조문수(曺文秀/1590~1645)ㆍ윤순지(尹順之/1591~1666)ㆍ김좌명(金佐明/1616~1671)ㆍ류혁연(柳赫然/1616~1680)ㆍ심익현(沈益顯/1641~1683)ㆍ숙종(肅宗/1660~1723)ㆍ이건명(李健命/1663~1722)ㆍ오태주(吳泰周/1668~1716) 등에 의해 조맹부체의 필법이 이어졌다.
고려 말 조맹부체의 유행은 많은 진적의 유입과 사신들의 왕래, 과거제도의 부활, 신흥유신들의 기호에 잘 부합되어 유행하게 되었다. 고려 말 송설체가 수용된 이후 행촌 이암을 낳았고, 조선 초기 안평대군 이용에 와서 꽃을 피웠으며, 조선 후기 오태주(吳泰周)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조맹부체는 조선의 서사문화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며, 결과적으로 예술성 없는 일상의 서사체로 전락되었고, 육조서법의 활자인 운각자(芸閣字)가 나오기 전까지 활자체의 전반을 지배하였다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렇게 고려 말 행촌 이암은 조맹부체의 수용 초기에 서예사의 중요한 시점을 점하고 있으며 조맹부를 배웠으나 송설과는 다른 행촌의 서예세계를 구사하였음을 확인 하였다.
○ 주제 : 고려말 행촌 이암의 역사적 역할
○ 일시 : 2012년 7월 10일 (화) 오후 7시~9시
○ 장소 : 서울 종로구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경복궁 후문 동십자각)
○ 강사 : 손환일 박사
○ 찾아오시는 길 : 광화문 삼청동 입구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 강의실
○ 참가비 : 무료
○ 후원 : (주)국학신문사, (사)현정회,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한민족정신지도자연합회, 국학운동시민연합, 한민족사연구회
○ 문의전화 : 041-620-6947, 041-620-6700, 010-6316-1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