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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회 국민강좌] 임시정부의 통합정책과 남북협상 2009.10.05  조회: 2314

[55회 국민강좌] 임시정부의 통합정책과 남북협상
김우전 | 광복회 고문

 


600년 역사를 간직한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국민강좌에 오는 발걸음이 착잡한 것은 오랜 역사적 가치 외에 사상과 철학마저 잃는 것 같아서다. 곳곳에 즐비한 문화재가 조례나 규약에 묶여 방치되는 것이 부지기수다. 눈에 보이는 문화재가 그럴진대 보이지 않는 문화재의 방치는 어떻겠는가 걱정이다.

근래 우리 민족 근현대사에서 임시정부의 통합정책과 남북통일을 이루려 한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과정도 다른 문화재만큼이나 귀중하나 오히려 폄하하는 듯해서 걱정이다. 김구 선생은 3.1운동 직후 국내와 연해주, 상해 등에 제각각 흩어져서 활동을 펼친 독립단체들을 규합해서 1919년 9월 11일 대통령 중심제의 상해임시정부를 세웠다. 좌, 우익으로 갈린 광복, 민족전선을 연합하고 1940년 5월 정치적으로 갈린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3당을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정책은 독립을 위해서는 사상까지도 초월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 11월 28일 건국강령을 제정하고 공표함으로써 각지의 의용군까지 흡수통합한 임시정부는 다섯 차례의 개헌을 거치면서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三均主義, 정치균등화, 경제균등화, 교육적 균등화)를 채택하고 광복군을 창설하여 국군통수권을 확립한, 강력한 체제였다. 또한 야당지도자 김규식 선생을 영입하고 의정원을 확대, 국무위원도 증강하여 1944년 4월 21일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모든 절차를 완료하였다.

한편 연합국이 카이로와 얄타, 포츠담에서 전쟁종결을 준비하며 각국이 맡을 역할분담과 그에 따른 막후교섭을 벌일 때, 임시정부도 나라를 독립하는데 직접 참여하고자 미국 OSS특수부대와 한미합작전선을 구축했다. 중국의 반대가 있었으나 김학규 장군이 중경 임시정부에 건의하여 중국고위층과 미국 사령관 헤럴드 장군에게 부탁해 1945년 3월 30일 중국 군사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범석 장군이 중국 서한 2 지역에서, 김학규 장군은 서한 3 지역에서 한미합작훈련을 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는 사상까지 초월하여 좌·우익
광복민족전선 연합해 철저한 독립준비  

이렇게 완벽하게 국내 상륙준비를 했으나 히로히토 일본천왕의 항복선언으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해방 후 연합국의 관리체제에서 임시정부는 인정받지 못했다. 정부요인들도 “개인자격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요구에 서명해야만 귀국할 수 있었다.

특히 1945년 12월 27일 임시조선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 신탁통치의 협약과 방안, 남북관계 행정, 경제면의 균형을 수립하기 위한 회의 방법 등을 논의 한 모스크바 3상 회의(미, 영, 소 외상회의)가 미·소 양국 냉전의 근원이 되었고 우리 국토와 민족을 양단시켰다.

김구 등, 3천만 동포에게 자주통일정부
수립을 호소하고 3.8선 넘어 북과 협상

2007년 제2차 남북공동성명서가 나오기까지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남북협상 노력이 있었다. 특히 1948년 4월 30일 제1차 남북 공동성명서가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1946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다녀온 뒤 남한만의 정부수립을 추진했다. 이에 김구 선생은 완전한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1948년 1월 28일 UN한국임시위원단에 완전자주통일정부수립에 대한 방안과 미소 양군의 즉시 철수, UN의 치안책임 하에 남북지도자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제시했다. 그리고 2월 10일 3천만 동포에 대동단결로 통일정부수립을 호소하는 애국충정의 호소문을 발표하고 16일 북측에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북에서는 이에 대한 답변 없이 3월 25일 평양에서 남북협상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청해 왔고 김구 선생은 4월 14일 ‘문화인 108인 남북협상지지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4월 19일에서 23일까지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는 북측의 일방적인 회의였다. 남측은 불참하려 했으나 김구 선생은 마지막 날 축사에서 “단선 단정(單選單政, 단독 선거 단독정부)은 어느 시기 어느 장소에 있어서도 철저히 방지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를 강조하여 협상단절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4월 27일 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4김 회담에서 조소앙 선생이 통일정부를 기초하여 30일 공동성명서가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1972년 7.4공동성명서로 이어져 1991년 12월 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를 거쳐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으로 이어지고 2007년 ‘10.4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연합국에 의해 남북이 갈리고 정치적 이해 속에 남북이 갈렸으나 끝까지 동포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한 해방 전후 남북통합 노력은 반드시 재평가되어야 하며, 우리에게 남북통일은 꼭 이루어야 할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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