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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회 국민강좌] 서울의 생활과 풍습 2009.10.05  조회: 2193

[59회 국민강좌] 서울의 생활과 풍습
주강현 | 문화재전문위원, 민속문화연구소장

 


조선시대 이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을 도시로 변모시키며 무형문화를 형성한 공은 한강이 제일 클 것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문화사와 사람들의 심성을 담고 있는 민간신앙을 통해 서울의 무형문화를 고찰해 보자.

지금은 비록 각종 댐으로 한강의 뱃길이 사라졌지만 경외명습첩(京外名勝帖1740-1741)이나 만기요람(萬機要覽), 한진기의 ‘담행정기(島潭行程記)’에 의하면 한강은 바다와 육지에서 나는 모든 물산의 유통로인 고속도로였고 서해를 통하여 대륙의 문화가 들어오는 창구였다. 
 

한강의 끝자락에 광활한 갯벌이 형성돼 조기떼가 풍성한 황금어장을 이뤘다. 이곳에서 바닷가 어부들이 생선을 가득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포구마다 해산물을 전달했다. 산 사람들은 늦가을에 베어 놓은 나무를 뗏목으로 엮어 장마로 불은 물살을 타고 내려왔다. 이렇듯 한강을 중심으로 한 문화사는 단절과 고립이 아니라 연결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었다.


풍부한 물산과 사람의 왕래로 만들어진 한강 문화는 단절과 고립 아닌 연결의 문화
 

당시 마포는 아주 큰 포구였다. 오젓, 육젓, 추젓과 조기철, 김장철 등 사시사철 물산이 풍성했다. 마포만이 아니라 당시 공암진, 양화진, 노량진, 송파진, 광진(광나루)등 크고 작은 나루터가 즐비했다.

 

특히 ‘송파 산대놀이’가 재현하고 있듯 송파나루는 전국의 장사꾼들이 붐볐던 곳이다. 1925년 을축년 장마 직전까지 이곳에 200여 호가 넘는 객주집이 있었다고 한다. 객주집이 많으면 색주가도 많고 돈 많이 벌고 무탈함을 기원하는 무속집도 번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 많고 물건 많고 돈 많은 한강 나루터를 중심으로 무속행위가 심했다.

 

서울의 정치 경제적 기반은 무당의 활동에 유리했으나 유교적 통치이념을 가진 사대부와는 일정한 갈등관계에 있었다. 과거 생활의 한 부분이었던 무속을 지금은 미신이라 비하하지만, 이는 일본이 우리나라 선풍(仙風)을 미신으로 깔아뭉개버린 것일 뿐이다. 신통이 열린 큰 무당, 선풍이나 역학의 경지에 이른 자, 깨달은 자, 또는 최고의 명상가가 서로 다르지 않고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서울의 무당은 신내림과 관계없이 사제권이 계승되는 세습무가 아니라 강신체험(신내림)으로 굿을 하고 영력에 의해 점을 치며 예언하는 강신무로 전형적인 샤마니즘 영역에 속한다. 호칭은 전라도는 단골, 제주도는 심방이라고 불렀으며 서울에서는 무당이라 부르고 남자무당을 특별히‘박수’라 불렀다.


개발로 사라지는 문화재를 보존하고 무형문화에 대한 인식 새롭게 바뀌어야

 

조선시대엔 서울에도 자연촌이 형성되었고 나름의 마을신앙이 존속했다. 그러나 일제 때 행정구역개편으로 자연촌이 사라지고 인구증가 또한 토박이문화를 소멸시켜 전통신앙은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무형문화를 든다면 국사당과 도당(산제당), 부군당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인왕산의 국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자리에 있었다. 일제가 남산야외음악당 터에 저들 신사인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옮겨졌다.

도당제는 도당할머니와 도당 할아버지, 혹은 산신이나 산할머니, 서낭신을 주신으로 모셨으나 제당은 대부분 소멸되고 신목이나 제단만 남아 대개 10월에 도당 굿으로 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널리 유포되었던 부군당도 남근을 깎아 모시는 대표적인 지킴이들이다.

지금은 여의도로 변했지만 60년대만도 40여 가구가 살던 밤섬 주민들은 목선(木船)을 만드는 사람들로 그곳 부군당이 꽤 유명했다. 그들은 노고산동으로 집단이주해서도 1년에 한 번씩 정초면 부군제를 지내고 있다.

60년대부터 밀어닥친 강남개발을 시작으로 지금도 뉴타운 열풍이 대단하다. 도시는 판자촌이라 할지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른,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갖는다. 그러나 서울은 구세대 건물을 모두 부수고 새로 짓는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늘 새것이고 늘 신장개업이며 항상 공사 중이다.

 

수차례의 전란과 일제와 6.25를 견디며 남은 숭례문이 얼마 전 인식부족으로 소실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서울이 아직 흥인지문을 비롯해 장안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젠 문화행렬의 허례허식보다는 남아있는 문화재를 보존하고 무형문화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민족역사 속에서 몸과 정신을 다스리는 법을 익혀 정신과 육체를 가꾸고 쾌활하게 사는 삶의 모습이 다 무형문화다. 건강하게 즐기는 문화가 사회에 번질 때 서울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래 민속, 무형문화가 보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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