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앙이 뿌리내린 일본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일본왕실 관할 [스에아라타진자](陶荒田神社)를 지난 2012년 6월23일 마침내 찾아냈다.
도쿄대학 교양학부 오바야시 타료(大林太良) 교수는 오미나 이쿠타마요리히메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오타타네코’(大田田根子)이고, 아버지인 뱀신은 오쿠니누시노카미”(<日本神話の構造>1987)라고 논술했다. 그 발자취는 다음과 같다.

궁사 사카이 토모유키(阪井智之)와 교수
스진천황은 즉시 천하에 포고령을 내려서 대국주신의 제주가 될 대전전근자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스에무라’(陶邑)에서 대전전근자를 찾아냈다는 기별이 왔다. 스진천황은 왕족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몸소 그 고장에 거동하여 대전전근자에게 직접 물었다.
“그대는 대체 누구의 자식이오? ”
“제 아버지는 대국주신이며 어머니는 여신 이쿠타마요리히메라고 합니다.”
“아아, 그렇소. 그럼 이제 과인은 틀림없이 나라를 번영케 할 것이로다”라며 스진천황은 감격했다. 즉시 왕실에서 대전전근자를 제주로 삼아 대국주신에게 제사모실 준비가 진행되면서부터 어느새 각 고장마다 곧 질병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라 안은 진정됐다. 오곡은 풍성하게 여물었다. 12월 20일 천황은 대국주신의 아들 대전전근자로 하여금 제사 드리게 했다. 대국주신을 제사 드린 곳은 나라땅 미와산 기슭에 마련한 신전, 즉 지금의 ‘대신신사’ 터전이다. 이 때부터 고대 일본왕실은 미와산의 신체 대국주신에게 국가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이다. 마쓰마에 타케시 교수는 “대전전근자의 직계 후손인, 오미와(大神)씨 집안에서 미와산 오미와신사(大神神社)의 궁사(宮司)를 세습해 왔다. 오미와(大神)씨 가문은 본래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이거나 한국에 연고가 깊으며, 5C 이후에 신산(神山)이 된 미와산의 제사권(祭祀權)을 장악했다고 본다”([出雲神話]1976)고 지적했다.
국가를 신라 도래인들이 ‘나라’라고 부르기 시작한 터전이 바로 이 고장 나라현 사쿠라이시의 미와산 오미와진자 일대였다고 본다. 대전전근자가 살앗다고 하는 ‘스에무라’(陶邑)는 어딘가. 그 고장은 미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카이시(堺市) 동남부 도키산(陶器山) 서쪽 지역”([])이다. 이 고장은 남부 오사카 지방에서 야요이시대 말기에서 고분시대로 걸치며 신라 도래인들이 ‘스에키’(須惠器)라는 단단한 도기를 만들던 터전이다. 신라 도기 스에키는 ‘쇠처럼 단단하다’는 데서 ‘쇠기’(鐵器)라는 비유에서 ‘스에키’라는 일어 표현이 나왔다고도 한다. 또한 이 고장은 야요이시대 말기 이후부터 신라 하지씨(土師氏) 가문이 ‘하지키’(土師器)를 만들던 고장으로도 이름난다. 하지키란 신불(神佛)에게 제물을 바치는 점토로 구워낸 고배(高杯) 등 제기며 역시 이들 제작자들은 신라 천일창왕자의 후손들로 알려져 온다. 필자는 스에무라(陶邑)를 중심으로 금년 현재에도 계속 이 지역 도키신사(陶器神社)를 답사했다.
나는 지난 1월에 이어 최근 6월까지 세 번에 걸쳐 나는 일본 현지 탐빙을 계속하여
국가를 신라 도래인들이 ‘나라’라고 부르기 시작한 터전이 바로 이 고장 나라현 사쿠라이시의 미와산 오미와진자 일대였다고 본다. 대전전근자가 살았다고 하는 ‘스에무라’(陶邑)는 어딘가. 그 고장은 미와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카이시(堺市) 동남부 도키산(陶器山) 서쪽 지역”([])이다. 이 고장은 남부 오사카 지방에서 야요이시대 말기에서 고분시대로 걸치며 신라 도래인들이 ‘스에키’(須惠器)라는 단단한 도기를 만들던 터전이다. 신라 도기 스에키는 ‘쇠처럼 단단하다’는 데서 ‘쇠기’(鐵器)라는 비유에서 ‘스에키’라는 일어 표현이 나왔다고도 한다. 또한 이 고장은 야요이시대 말기 이후부터 신라 하지씨(土師氏) 가문이 ‘하지키’(土師器)를 만들던 고장으로도 이름난다. 하지키란 신불(神佛)에게 제물을 바치는 점토로 구워낸 고배(高杯) 등 제기며 역시 이들 제작자들은 신라 천일창왕자의 후손들로 알려져 온다. 필자는 스에무라(陶邑)를 중심으로 금년 현재에도 계속 이 지역을 답사 조사중이다.
필자가 오랜 세월 찾아헤매던 천일창 후손 [대전전근자](대국주신의 아들)을 모신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외떨어진 터전 [스에아라타진자](의 이 사당은 일본 최초로 사쿠라이시 미와산 [오미와신사] 터전에서 아버지 신라신 대국주신을 제사지낸 역사적 인물의 사당이다.
이 곳의 궁사 사카이 토모유키(阪井智之)로 부터 "오타다네코는 선대로부터 신라계 인물"이라는 말은 들었다고 했다. [스에아라타진자]의 "도기를 말하는 첫글자 (陶)는 [스에키] 즉 한국어로 쇄기(쇠그릇)"이라고 안다고도 했다.
이 곳을 찾아가자면 오사카에서 3시간 남짓 걸리나 초행길에는 좀처럼 찾기 힘들며 오사카역에서 JR전철로 ‘사카이’(堺)역까지 가서 택시로 약40분 이상 가야하므로 차삯이 만만치 않다.

이런 ‘하지키’(土師器)는 신라, 가야 등의 제기(祭器)와 너무도 닮았다.
단군신도의 바탕 만든 신라왕자 천일창이 게히신궁(氣比神宮)의 유일한 ‘일본 국가신’이라는 사실 최초의 고증
일본에서 신궁(神宮)이란 왕실 제정 법령 국가사당(式內大社 <延喜式神名帳>서기927년)이다. 한국 동해 건너 일본 열도 서북부 전체인 호쿠리쿠(北陸)에서 유일한 신궁은 쓰루가(敦賀)의 게히신궁(氣比神宮). 일본에서 두 번 째로 크다는 드높은 목조 도리이를 들어서면 너비 약 4만2천 재곱미터의 신궁 터전이 들어난다. 동서 방향 네동의 신전들중 가장 웅장한 본전 총사궁(總社宮) 앞에는 모두 일곱명의 천황가 국가신 신주를 기록한 검정색 석판이 서있다. 그 맨윗편 오른쪽 첫머리에 서열별로 나타낸 최고위 국가신은 ‘이사사와케대신’(伊奢沙別大神). 그는 다름아닌 신라 천일창왕자다. 일본왕실이 제사모셔오는 유일한 신라인 인간신(人間神) 천일창, 아니 국적 한국인 일본 국가신이다. 부끄럽지만 필자는 여러 해 전까지 그런 역사의 진실을 까맣게 몰랐다. 이에 이사사와케대신의 정체 천일창왕자를 밝히려 필자는 20여년간 동해 맞은편 쓰루가 일대를 간단없이 누볐다.
석판의 순서로 두 번 째 신은 추아이천황(仲哀, 192~200 재위), 세 번 째가 그의 처 신공황후(神功皇后) 그리고 다섯 번 째는 신공황후가 낳은 오진천황(應神, 270~310재위)이다. 신공황후하면 ‘신라를 침공한 여걸’로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미화시킨 여인. 이것은 무엇을 노린 국수주의의 역사왜곡인가. 미리 지적하여 두자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신공황후는 “신라 천일창왕자의 후손”(<일본서기>)이며 더구나 천일창왕자는 일본 게히신궁 최고의 국가신이라는데 대한 분노의 역공법이 아닌가 한다.
게히신궁이 처음 섰던 고대 초기 이 곳에서는 당연하지만 천일창대신 한분만의 신주를 유일하게 모셨다. 그러나 뒷날(서기 702년)에 가서 여섯명의 신을 천일창대신 밑에다 더 추가 합사했다는 발자취가 이 사당의 고문서 <게히신궁사기(氣比神宮社記, 서기902년)>에 전한다. 지금의 검은 석판에도 쓰여진 것처럼 “게히신궁의 초창은 벌써 2천 여년 전”이란다.
19세기 중엽, 이른바 메이지유신(1868)으로 일본에 군국주의가 등장한 직후 일본제국주의 정권은 종래의 국가 신궁들을 이른바 관폐대사(官幣大社)라는 간판 아래 몽땅 묶어 한손에 움켜잡았다. 조선침략의 칼을 빼든 그들은 당장 쓰루가 게히신궁으로 달려가 일본 유일의 한국인 국가신 천일창대신(天日槍大神)의 이름을 빼버렸다. 그 빈 자리에는 영리하달까 이사사와케대신이라는 호칭을 바꿔넣었다. 물론 그 당시 이사사와케대신이 천일창대신의 별칭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고 본다. 설령 일본 고대 역사학자라도 신궁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는다면 이사사와케대신의 정체를 쉬 알아낼 수 없게 숨긴 것이다.
앞책 <게히신궁사기>를 좀더 보면 “게히신궁에서는 천일창왕자의 신주를 신대(神代, 개국신화 시대)부터 이사사와케대신과 게히대신(氣比大神), 또한 다른 한자어로 역시 게히대신(食靈大神), 그 밖에 미케쓰노오카미(御食津大神) 등등” 서너가지 신의 이름으로 각각 존칭하였다는 것. 고대사학자 이마키 쿠니오(印牧邦雄)도 <후쿠이현의 역사(福井縣の歷史, 1962>)에서 “고래로 에쓰젠(越前, 후쿠이현의 옛 지명)의 국가 게히신궁은 민중의 존경을 받아 ‘게히궁’(?飯宮)이라고도 부르며 천일창왕자를 제사드렸다”고. 게히(?飯)라는 한자어는 앞의 게히(食靈, 식령)와 글자는 서로 달라도 만요가나(이두)식 문자 표현으로 ‘식량을 베풀어주시는 신령님'이라는 뜻. 뮈니뭐니해도 굶기지 않고 먹을 것 베풀어주시는 신이 으뜸이다. 후쿠이현의 역사 기록 <난조군지>(南條郡誌)에도 보면 당연하지만 “게히대신(氣比の大神)은 신라 천일창왕자”로 못박고 있었다. 도쿄 오차노미즈(お茶の水)대학 국문학과 쓰기다 마사키(次田眞幸) 교수는 “나는 게히신궁의 이사사와케대신은 신라 천일창신(天日槍命)이라는 고대 <신기지료(神祇志料)>의 기사만을 따르고싶다”(<古事記解說>1980)했다. 1933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출신인 쓰기다 마사키 교수는 고대 한자어 고문서 역사책 <고사기> 전문을 직접 번역 주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효교(兵庫)교육대학 나카가와 도모요시(中川友義) 교수는 <일본서기>의 개국신화에서 “천손족을 선도한 사루다히코(猿田彦命)는 본래 조선의 한신(韓神)”이라고 지적하면서 “조선 남부의 벼농사가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신라 신도(神道)도 함께 건너왔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사루다히코를 모신 자그만 신당이 게히신궁의 정문인 큰 도리이를 막 들어서면 왼쪽 어귀에 있다. “사루다(猿田)는 ‘논’을 가리키는 조선어 ‘쌀밭’에서 유래했다”(是澤恭三 <白鬚明神と猿田彦命>1962>는 흥미로운 주장. 한국어의 된발음이 서툰 일인들은 ‘쌀’을 ‘사루’라고 말한다. 또한 일본 개국신화에서 사루다히코신(猿田彦命)의 마누라는 여신 사루메노키미(猿女君)다. 역시 그녀의 이름도 ‘쌀 여신’. 사루메노키미는 개국신화에 등장하는 소란스런 아메노우스매노미코토(天鈿女命)의 후손이다. “우스매노미코토라는 이름속의 ‘우스매’라는 뜻은 조선어의 ‘웃음 여인(笑女)’이며 그녀는 바다를 건너 온 조선의 여신”(稻村?元?豊島寬彰 <東京の史蹟と文化財>1965)이란다.
천일창이 존귀한 쌀의 큰 신령님, 즉 식령대신(게히대신)으로 추앙받았듯이 계속하여 동해를 건너 온 신라인 집단 세력은 이 고장 미개한 채집 생활 선주민들에게 벼농사법을 널리 가르쳐 영양가 높고 맛난 쌀밥을 먹여주었고 천일창 사후에는 일본왕실 최고의 곡령신(穀靈神)으로 존숭한 것. 원시적인 바닷가 조개잡이며 나무 열매 따먹기 따위 채집 생활로 영양이 극도로 결핍했던 일본 “조몬시대 사람들의 키는 148~157 센티였고, 유아 사망률이 높아 40세를 넘는 사람도 적어 평균 수명은 약 30세였다”(靑木美智雄外<日本史>1993)고 한다. 그런 사실은 패총(조개무덤)에서 발굴한 사람뼈 연구로서 규명되었다. 그러기에 쌀밥을 먹으며 “한국 남부로부터 건너온 평균 신장 163센티의 도래인과 선주민 여인들이 혼혈하여 키가 큰 야요이인이 생겼다”는 것.
일본 야요이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65년 춘3월 밤, 신라땅의 계림(鷄林)에서는 흰닭이 울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금상자에서 총명한 아기 김알지가 알에서 태어났(<삼국사기>)거니와 도시샤(同志社)대학 사학과의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 1902∼1971) 교수는 “신라 김알지는 신라의 곡령(穀靈) 또는 곡신(穀神)의 존재”라고 지적하면서 “일본은 신라와 가장 가깝게 벼농사와 접근된다”(‘韓族の穀靈信仰と穀物儀禮’ 1973)고 했다. 신라의 벼농사며 양잠은 이미 박혁거세왕 17년(B.C.41년) 기사에 보이고, 제7대 일성왕 11년(서기144년)에 “식량은 백성에게 가장 소중하므로 각 고을마다 방죽을 잘 고쳐 완벽한 물관리로 논과 밭을 넓게 개척하라”는 왕명도 있었다.
한민족이 일찍이 만주 벌판의 농본(農本) 시대, 가을철 곡식 추수가 끝난 뒤 천신에게 감사드리며 제사 지낸 곡령 신앙은 부여(扶餘)의 영고(迎鼓)며, 고구려의 동맹(東盟, 東明), 예(濊)의 무천(舞天) 등등, 하늘의 태양과 그 관장자인 천신을 외경했다. 더구나 쇠붙이를 달구어 삽이며 괭이 따위 농기구며, 또한 전쟁 도구로서 칼이며 창을 만드느라 대장간을 세웠다. “천일창은 선진 한반도 벼농사와 대장간 등 철기문화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 왔”(谷川健一 <靑銅の神の足跡> 1979)던 것. 또한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 祐) 교수는 “칼은 옛날부터 일찍이 금속기(金屬器)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고대 귀화인계의 대장간 기술민 집단, 이를테면 천일창 전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라계 귀화인들의 신보(神寶)였다고 생각한다. 옥과 거울과 칼이라는 신보(神寶)를 천황이 갖추어 지니게 되는데서 비로소 주권의 표상인 ‘삼종(三種)의 신기(神器)’가 성립되었다”(<天皇家の秘密> 1977)고도 지적했다.
아지매(阿知女)라는 일본왕실 축문의
조선천신(韓神)과 웅녀신(熊女神)
[어신악](御神樂)의 [한신](韓神)의 노래(왕실 제사 때의 ‘축문’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축문은 말이 아닌 노래로써 부름, 저자주)는 어떤 내용이었던가. 구와지마가본(鍋島家本)에 쓰여 있는 것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韓神(本)
見志萬由不 加太仁止利加介 和禮可良加見波
加良乎支世武也 加良乎支 加良乎支世牟也
(末)
也比良天乎 天耳止利毛知天 和禮加良加見毛
加良乎支世武哉 加良乎支 加良乎支世牟也
(本方) 於介 阿知女 於於於於
(末方) 於介
고조선 [천부경] 정신 담긴
천황가 제사 축문 ‘한신’(韓神)은 ‘조선천신’(朝鮮天神)
한민족 고유 철학의 뿌리 [천부경] 정신 담긴 것이 일본 왕실 천신제사 축문(神樂歌, かぐらうた)의 ‘한신’(韓神)과 ‘한’(韓)에 대해서 제사 축문 연구의 권위인 우스다 진코로(臼田甚五郞)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韓)을 뫼셔온다는 제사 양식은 한국식(韓風)이다. 신 내리기의 신물(神物)잡기에서 연상되는 것은, 신성한 무녀(巫女, 일반적인 무당이 아니라 고대 왕실의 왕녀 등을 가리킴-저자주)가 신(神)을 향응하는 이미지다. 이 신악가(神樂歌)의 위치에서 고찰해 보자. 신의 잔치도 신주(神酒)를 권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터주신(地主神)인 한신(韓神)이 새로이 찾아오는 신인 천황(天皇) 및 천황가(天皇家)에 대해서 귀순(歸順) 접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상정된다.”
즉 우스다 진코로 교수는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왜왕(천황)이 된 한국인들이 새로 건너온 한국인들을 맞이하는 일로 추정했다. 일본의 국가가 통일된 것은 16세기 종반의 일이므로 그동안 오래도록 한반도에서 건너간 둘 이상의 왕가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즉 신라와 백제 두 국가로부터의 도래계 지배자들이다.
한신(韓神) 축문에서 한신(韓神)은 어김없는 한반도의 천신이다. 또한 축문에서의 “한(韓)을 모셔온다”는 뜻의 한(韓)은 여신인 아지메(阿知女)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 경우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신(熊女神)을 그 옛날 신라어(경상도 말)로 ‘아지메’로 호칭한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일본서기]의 스이닌(垂仁, 3세기경)천황 당시의 역사 기사에서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곰신단(熊の神籬, 구마노 히모로기)을 가지고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하는 기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에도시대(1607∼1867년)의 저명한 고증학자 도 데이칸(藤 貞幹, 1732∼1797년)은 곰신단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곰신단(구마노 히모로기)의 히모로기(ひもろぎ)는 신라어다.” 즉 ‘히모로기’는 제사 모시는 신단이라는 신라어(경상도 말)라고 한다.
오늘날 아지메(阿知女)에 대하여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최고위 무녀(巫女)로 본다”고 저자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 모친 웅녀(熊女)를 제정일치(祭政一致) 상고 역사시대의 왕실에서 천신 제사를 모시는 주도자로서의 무녀였을 가능성도 짚어보게 된다. 비근한 예로 일본 왕실 이세신궁에서 대상제 날 대상제 제사 의식에서 등극하던 아키히토천황의 친누이 이케다 아쓰코 씨가 왕실 제사복장을 하고 제사를 주도하는 무녀 역할인 재녀(齋女)로 등장했던 사실을 예로 삼고도 싶다.
신라의 천일창왕자가 ‘곰신단’을 모시고 왜왕실로 건너왔다고 하는 것은 스진천황의 아들 스이닌(垂仁, 2∼3C 경)천황 당시였고, 천일창왕자는 왜의 신라왕 정권에서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신에 대한 제사를 모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일본 천황가의 제사 담당관인 아베 스에마사(安倍季昌) 천황궁 제사 담당 악장(樂長)은 “아지메(阿知女)는 천지인(天地人)을 가리킨다고 본다”고 저자에게 직접 말했다. 또한 그는 그의 저서에서도 “아지메(阿知女)의 세 글자는 천·지·인(天·地·人)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 의해서 하늘은 오래고 땅은 영원하며 그 속에서 사람을 편안하게 살게 되도록 큰절을 올리고 기도 드리는 의식에서 축의(祝儀)를 제사 노래로서 부르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아지메는 놀랍게도 곧 우리 민족의 [천부경]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天一一, 地一二, 人一三。一積十矩。無化三。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運三四, 成環五, 七一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本心, 本太陽, 明人中。天地一一, 終無終一。」의 본뜻이 아니런가.
국제뇌교육대학워대학교 총장 일지 이승헌 박사는 오랜 연구 과정에서 일찍이 “[천부경]은 곧 하늘 땅 사람(天·地·人)에 대한 한민족 고유의 철학의 뿌리를 담고 있다”고 해설한 바 있다.
단군왕검의 건국이념의 뿌리 사상을 떠받들어온 한민족은 [천부경]의 철학 사상을 가지고 바다 건너 일본땅을 개척하여 뒷날 일본 왕실에서 아지메(阿知女)의 천지인(天地人) 철학정신을 받들며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터전을 펼쳤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고대로부터 일본 왕실의 제1차 주권(主權)은 제사권(祭祀權)이고, 제2차 주권은 정사권(政司權)이 아니었던가. 신라계의 스진천황은 신라신 대국주신을 제사지내게 됨으로써 신도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비로소 반석 같은 정사(支配)의 터전을 이루었다.
그런 견지에서 오사카교육대 사학과의 도리고에 겐사브로(鳥越憲三郞) 교수가 다음처럼 주장한 것은 공감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에서 빠져 있었던 큰 문제는 씨족이나 부족의 수호신, 즉 그들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신사(神社)의 제신(祭神, 신주)과 그것에 관련되는 종교 관념이다. 이는 고대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중세사·근세사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특히 고대에서는 그 사회를 움직이는 인자(因子)가 바로 ‘종교관념’이었다. 그 종교관념을 내버려두고 고대사회를 규명하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가진다.
여기서는 신라계 출신으로 왜의 지배자가 된 스진천황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스진천황에 대해 도쿄대학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2002) 교수는 “스진천황은 고구려계 기마민족의 후손으로 남하하여 가야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으로, 일본 최초의 정복왕이다”라고 내세운 바 있다. 일본 패전 직후인 1948년 5월에 발표한 그의 주장은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그 배후에 깔고 있는 학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주목해 두어야 한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스진천황은 신라신인 대국주신(대물주신)을 나라(柰良)땅 미와산에 모시고 일본 고대 역사상 최초로 제사권을 발동한 사제왕(司祭王)이기도 하다. 저자는 또한 신라인 집단인 이즈모(出雲)족 출신의 스진천황이 처음으로 그가 다스리던 국가를 한국어로 ‘나라(奈良)’라고 하여 이두식 표기를 했던 것으로 추찰한다. 이미 1900년에 역사지리학자인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1864∼1918) 박사는 “나라(奈良)는 이 고장을 점거하고 지배하던 이즈모족이 ‘국가’라는 뜻으로 지은 명칭”이라고 밝혔다. 그 밖에도 일본 고어학자인 마쓰오카 시즈오 교수도 ‘일본고어사전’에서 역시 똑같은 사실을 밝혔다. 마쓰오카 시즈오 교수는 ‘나라’라는 한글 글자까지 사전에다 직접 쓰면서, 한국어의 발자취를 입증한 바 있다.
도쿄대학 이학부 인류학교실 하니와라 카즈로(埴原和郞) 교수는 조몬시대 1천년 동안의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 집단의 숫자를 고대 묘지에서 발굴한 두개골 등을 분류 조사한 모델을 수식화시켜 시뮬레이션으로 통계치를 계산했다고 한다. 그 결과일본에 먼저 건너와서 살던 선주민 1명에 비해서 한반도 도래인은 8명이 넘게 건너왔다고 하는 연구 통계를 냈다.
하니와라 카즈로 교수는 그런 결과에 대하여 연구논문에서 밝히기를 “그것은 놀랠만한 숫자였다. 계산해낸 나 자신이 놀랠 정도였으므로 이 결과를 논문으로 읽은 사람들은 더욱 놀랬을 것이 틀림없다. 도래인들이 가장 많이 증가하던 추정에 의하면 1천년 동안 도래 인구는 약 150만명이고, 7세기 초의 시기에서는 조몬계하고 도래인계의 인구 비률은 1 : 8.6명이 된다”110)라고 진솔하게 지적했다. 하니와라 카즈로 교수는 인문학자가 아닌 의학 연구의 과학자이며 이러한 연구는 일본 전국의 인류학 교수들과 공동 조사연구의 결과였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왜나라 당시의 천황들은 조상신 제사 때에 한국어로 된 축문을 외우면서, 왕궁 신전에 모신 한국신인 한신(韓神)을 받드는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라는 궁중 제사를 지냈다. 그것은 우리가 문헌사학적인 견지에서도 공감할 만한 일이 아닌가 한다.

마쓰오카 시즈오(松岡靜雄)의 일본 옛말사전(日本古語大辭典, 1937)
지난 가을 와카사 답사 때 요코야마 궁사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요코야마 궁사는 10년 전에 필자가 물었던 질문을 되살리고는 “오리알은 잘 먹습니다. 하지만 건망증이 심해 기억력이 안 좋습니다”라고 말하며 크게 반가워했다. 문득 와세다대 미즈노 유(水野 祐) 교수의 혈액형연구가 떠올라 요코야마 궁사에게 혈액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A형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미즈노 교수는 1974년 펴낸 ‘고대의 이즈모(古代の出雲)’라는 책에서 “이즈모로 도래한 대부분의 신라 민족은 특히 A형 혈액형 분포율이 높은데, 역시 한국 동남부의 A형 혈액형 분포율과 매우 흡사하다”고 주장했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 祐) 교수가 “남조선의 한민족, 특히 그 동부의 신라계(新羅系) 민족은 일본 시마네현 일대로 바다를 건너온 이즈모족(出雲族)으로서 A형 혈액형률이 지극히 높은 인종에 속하며 서로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양자간의 교류는 진실로 자연스러운 상태를 보여준다”108)고 밝혀 큰 주목을 끌었다. 또한 그는 경상도 지방 사람들의 A형 혈액형률과 일본 이즈모지방 사람들의 A형 혈액형률이 거의 똑같다는 분포표까지 비교 제시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연구발표였다.109)
미호신사에서는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흥미로운 행사가 매년 열린다. 신주 소언명신 제사 때면 이곳에서는 어김없이 이 신사 소속 무녀(巫女)들의 내림굿이 펼쳐진다. 운두가 높은 모자를 쓴 신관(神官) 2명이 신전 마룻바닥에 나란히 앉아 소형 북과 징을 치며 장단을 맞추면 흰 두루마기와 붉은 치마를 입은 무녀가 춤을 춘다. 미호신사 무녀는 머리에 관을 쓰고 오른손에는 작은 방울이 잔뜩 달린 대를 잡고 왼손에는 비쭈기나무(?)를 든 채 하늘로 높이 들어 흔들며 덩실덩실 춤춘다. 그 모습이 우리네 무녀의 내림굿과 매우 흡사했다.
신라땅에서 바다건너 일본 이즈모로 념어왔다는 대국주신은 밀애의 명수였다. 그는 나라땅의 미와산으로 올라와 살면서 밤이면 애정 행각에 나섰다. 그가 요즘 자주 찾는 것은 대갓집의 어여쁜 처녀 ‘이쿠타마요리히메’였다. 실뱀이되어 남 몰래 방안에 찾아 들어서면 곧 훤칠하게 생긴 청년으로 디시금 변신했다. 이 늠름한 청년과 오미나(おみな、일본 옛말의 여자)와의 사랑은 날 새는지도 몰랐다. 어느 사이엔가 오미나 이쿠타마요리히메의 아랫배가 불룩해졌다. 오미나의 부모는 딸의 배가 부른 것을 눈치채고 놀랜 나머지 딸에게 넌지시 캐묻게 되었다.
“너는 혼자서 아기를 가졌구나. 사귀는 남자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아기가 생겼느냐?”
“실은 밤마다 잘생긴 젊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아직 이름도 몰라요. 매일 밤이면 제 방으로 찾아와서 함께 지냈더니 그만…….”
부모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젊은이의 정체를 알아내야만 했다. 부모는 딸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붉은 흙을 네 방 마룻바닥에 뿌리거라. 그리고 몰래 기다란 삼실을 바늘에 꿰어 그 사람의 옷에다 꽂아 두거라.”
여기서 지적하여 둘 것은 단군사학 연구를 위하여는 한민족의 선도(仙道) 연구가 반드시 요망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선도의 뿌리가 단군사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정경희75) 교수는 한국 선도와 단군에 관하여 논술하며 삼성(三聖, 桓因·桓雄·檀君) 인식의 중요성을 토대로 하는 선도의 사유 체계의 근간을 다음처럼 밝혔다. 즉 “한국선도의 사유 체계는 한국선도의 三大 경전인 『天符經』·『三一誥』·『參佺戒經』 이하 仙道史觀에 입각한 여러 仙道史書들인 『符都誌』·『桓檀古記』·『揆園史話』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한국선도의 핵심 이론인 ‘一·三·九論’이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속에는 선도수행의 본질이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한국선도의 으뜸 경전인 『天符經』에서는 ‘존재(계) 자체’를 ‘一’로 보고 ‘一’을 이루고 있는 존재의 세 차원으로서 天·地·人 삼원(‘三’)을 제시하고 있다. ‘一’과 ‘三’은 대체로 體·用의 관계로 이해되며, 天은 ‘정보(또는 無·空)’, 地는 ‘질료(물질)’, 人은 ‘氣에너지’로 해석된다”([韓國仙道와 ‘檀君’])고 한다. 필자도 단군사를 향한 선도 연구는 필수적인 연구 과제라는 것을 아울러 강조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