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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회 국민강좌] 고인돌왕국 고조선 2013.11.29  조회: 4251

 

<제 115 회 국민강좌 안내>

 

○ 주  최: (사)국학원

일  시: 2013년 2월 12일 (화) 저녁 7시 ~ 9시

○ 강  사: 하문식 교수(세종대 교수, 세종대 박물관장)

○ 주  제: 고인돌왕국 고조선


* 강사 소개


하문식 교수는 충북대학교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을 이수하였다. 1995년부터 중국 요령성 문물 고고연구소 객좌연구원으로 있으며, 현재 세종대학교 교수 및 박물관 관장으로 재직 중이다. 또한 2011년부터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활동한다.


주요저서와 논문으로는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연구(1999년)』, 『고조선의 강역을 밝힌다(2006년, 공저)』, 『고조선의 역사를 찾아서(2007년, 공저)』등이 있다.


[강의원고]

 

하문식교수 (세종대)

 

 

Ⅰ. 시작하면서


고인돌은 커다란 돌을 가지고 만든 하나의 구조물로 선사시대의 유적 가운데 외형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모습을 하고 있어 상당히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왔다.

고인돌은 큰 돌을 고이고 있다는 뜻이며, 괸돌, 탱석(?石), 지석묘(支石墓), 돌멘(Dolmen)이라고 불려진다. 지석묘는 일본에서 부르는데 이 말 뜻은 ‘굄돌이 있는 무덤’이란 의미로 고인돌의 기능을 무덤으로만 인식하고 있어 문제점이 있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이나 대석개묘(大石蓋墓)라고 하는데 석붕은 ‘돌로 만든 막’이라는 뜻으로 판자돌로 만든 돌방이 지상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이고 대석개묘는 커다란 돌이 지상에 있는 ‘큰 돌로 무덤방을 덮은 것’이란 뜻이다.

고인돌의 분포 지역을 보면 한반도를 비롯한 중국 동북지역인 요령성과 길림성, 산동성과 절강성, 일본 큐슈지역 등 동북아시아가 가장 집중 분포하고 있는 중심적인 곳이고 대만,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있다. 또한 인도 · 티베트 · 이란 · 파키스탄 · 팔레스타인에도 있는데 이곳에는 최근에도 고인돌을 축조하는 풍습이 있다. 유럽지역은 프랑스 · 포르투칼 · 덴마크 · 네델란드 · 영국 · 스웨덴 남부 등지에 분포하며 지중해 연안의 미노르카 · 말타 지역 그리고 흑해 지역의 카프카즈에도 있다. 또한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 수단에서도 조사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고인돌에 대한 옛기록은 고려 때 이규보가 금마지역(오늘날의 익산)을 여행하고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남아 있다. 그리고 보다 빠른 서기전 78년에 반고(班固)가 쓴 《후한서(後漢書)》에 고인돌의 외형적인 면을 관찰하여 덮개돌과 3개의 굄돌을 보고한 내용이 있고 그 이후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조야험재(朝野險載)》,《압강행부지(鴨江行部志)》등에도 고인돌에 관한 기록이 있다.1)

이렇게 세계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은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 고조선지역과 한반도의 남부지역에 가장 집중적인 밀집 분포를 하고 있으며, 여러 형식의 고인돌이 조사·발굴되었고 축조 시기도 다른 지역보다 이른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역·일본 등지의 동북아시아 지역은 고인돌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이 글은 고인돌이 밀집 분포하고 있는 고조선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산동성과 절강성, 동남아시아 지역, 인도 등지의 고인돌에 관한 대략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고 아시아지역에서 고조선의 고인돌이 차지하는 의미를 밝히도록 하겠다.


Ⅱ. 고조선지역의 고인돌


고조선의 무덤은 고인돌을 비롯하여 돌무지무덤 · 돌널무덤 · 동굴 무덤 · 움무덤 등이 있다. 이러한 여러 무덤은 대부분 돌을 이용하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시 사회의 무덤 축조 양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조선지역의 고인돌은 대체적으로 초기 강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공간적인 범위와 상당히 비슷하게 분포하고 있으며, 이것은 요동지역의 비파형동검 문화권과 거의 일치한다. 특히 고인돌에서 출토되고 있는 비파형동검, 청동도끼 거푸집,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 문화권의 동질성을 시사하고 있다.


1. 분포와 입지


고조선지역의 고인돌은 세계적인 분포 관계를 볼 때 중심지 역할을 할 만큼 집중적으로 밀집하고 있어 상당히 주목된다.

요령지역의 고인돌은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요남지구의 보란점(普蘭店) · 와방점(瓦房店) 북부와 개주(盖州) 남부의 구릉지대와 낮은 산기슭에 많이 있다. 특히 벽류하(碧流河) · 대양하(大洋河) · 혼하(渾河)유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어 물줄기를 통한 지세와의 관련성을 시사한다. 특히 이 지역에서 조사된 고인돌의 지리적인 분포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요하의 서쪽인 금주(錦州) · 부신(阜新) · 조양(朝陽)지구에서는 찾아지지 않아 요하가 경계선을 이루는 것 같다. 이렇게 요령지역의 고인돌 분포는 요동의 비파형동검 분포권과 거의 비슷한 양상이며, 개석식 고인돌에서 실제로 비파형동검이나 같은 문화 성격의 유물이 찾아지고 있어 문화의 동질성을 보여준다.

한편 요령지역의 고인돌 밀집 정도를 보면 요남지구는 집중적인 분포를 보이는 반면 요북이나 무순(撫順) · 단동(丹東) · 본계(本溪) 등은 그 밀집 정도가 낮거나 거의 발견되지 않아 지역적인 특징이 관찰된다. 이러한 지역에 따른 차이는 고인돌이 위치한 주변의 지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길림지역의 고인돌은 합달령(哈達 嶺) 남쪽과 장백산지(長白山地) 동쪽의 산과 높은 구릉지대에 대부분 분포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도 요령과의 경계 지역인 분수령 부근의 휘발하(輝發河) 유역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동풍(東豊)지역의 매하(梅河) · 횡도하(橫道河) 언저리의 산등성이나 산마루에는 개석식 고인돌이 집중 분포한다. 그런데 길림지역의 고인돌유적은 지리적인 조건 · 연구 분위기 등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개략적인 조사만 이루어진 상태라 앞으로 조사 결과에 따라 변화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지역의 고인돌은 황해도부터 청천강유역, 함북지역 등 전역에 분포하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곳의 분포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평안 · 황해지역의 서해안에 집중 분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고인돌문화가 서해를 통한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파 · 발전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특히 서북한지역의 대규모 탁자식 고인돌인 안악 노암리 · 은율 관산리 · 연탄 오덕리 · 배천 용동리 고인돌유적은 서해를 중심으로 요동반도의 개주 석붕산 · 보란점 석붕구 · 장하 대황지 · 해성 석목성 고인돌과 둥글게 호를 이루면서 분포〔環狀的 分布〕하고 있어 문화권의 설정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이렇게 규모가 큰 탁자식 고인돌이 분포하는 곳의 위치나 지세는 물론 축조 배경은 고인돌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요하며 고조선의 중심체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북한지역에서는 큰 강과 그 샛강을 따라 수백 기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은 황주천 유역의 1천여 기를 비롯하여 임진강 상류 300여 기, 정방산 기슭 360여 기, 석천산 기슭 470여 기, 연탄 두무리 350여 기, 연탄 오덕리 350여 기 등이며 100여 기 이상 되는 곳도 20여 곳이나 된다.

이렇게 한반도를 비롯하여 황해를 중심으로 요령과 길림지역에 고인돌이 밀집 분포하고 있으므로 ‘환황해(環黃海) 고인돌문화권’의 설정도 가능할 것이다.

고인돌이 자리한 곳의 지세는 강이나 바닷가 옆의 평지, 구릉지대, 산기슭이나 산마루 등으로 구분된다. 이렇게 고인돌의 분포가 주변의 자연 지세와 관련이 있는 것은 당시 사회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자연 숭배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평지에 있는 고인돌은 덮개돌(무덤방)이 강물의 흐름과 나란한 것이 특이하다. 이렇게 고인돌이 물과 관계 있는 것은 고인돌을 축조하였던 사람들이 물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으며, 당시 사회의 내세관 · 세계관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산기슭에 있는 고인돌은 비탈면이나 기슭의 널따란 지역에 자리한다. 고조선지역의 고인돌도 산줄기와 나란히 분포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평지나 구릉지대보다 높다란 지역인 산기슭이나 산마루에 자리하는 고인돌은 조망 문제가 고려되어 주변이 훤히 보이는 곳에 의도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이해되며, 제단의 기능도 가졌을 것 같다.

고조선 자역의 고인돌유적은 지역에 따라서 입지 조건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요령지역은 유적 주변의 자연 지세가 최대한 고려되었던 것 같다. 이곳의 고인돌은 유적 바로 옆의 산줄기나 강 흐름과 나란히 자리하거나 의도적으로 물줄기 근처에 자리하였던 것 같다. 한편 길림지역은 고인돌이 산마루나 산기슭에 있을 경우, 요령지역보다 지대가 높지만 주변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다시 말하여 길림지역은 산세가 험한 내륙인데 비하여 요령지역은 바다와 가깝고 비교적 산세가 완만하여 조망의 차이가 있다. 길림지역에서 지금까지 조사된 고인돌 가운데 매하구 백석구유적이 가장 높은 산마루에 있다. 북한지역은 강 옆의 평지나 높다란 구릉지대에 많이 분포하는데 산마루에 있는 것은 은율 관산리 1호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이와 같이 고조선지역의 탁자식 고인돌은 주변의 어디에서나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사방이 훤히 틔어 있는 조망이 좋은 곳에 분포하고 있어 그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2. 형식과 구조


고인돌의 구조는 형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몇 톤에서 몇 십 톤에 이르는 덮개돌의 운반과 축조에 대한 문제, 무덤방의 구조의 특징이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고인돌의 형식은 외형적인 짜임새의 몇가지 특징에 따라 탁자식 · 개석식 · 바둑판식으로 분류되며, 개석식이나 바둑판식은 지하의 무덤방 구조가 복잡하므로 속성에 따라 다시 여러 가지로 나누어진다.


1) 고인돌의 형식

덮개돌은 고인돌의 외형적인 모습을 나타내므로 상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또한 외형적인 중요성 때문에 그 자체가 위엄이 있어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왔다.

고조선지역의 탁자식 고인돌은 덮개돌이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크고, 굄돌과 잘 맞추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돌로 만든 탁자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고인돌을 ‘탁석(卓石)’ · '관석(冠石)‘ · ’관면식(冠冕式)‘이라고 불렀다.

요령지역의 탁자식 고인돌에서 덮개돌이 굄돌 밖으로 나와 처마를 이루고 있는 것이 10여 기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개주 석붕산 고인돌의 덮개돌은 이 지역 고인돌에서 가장 크며, 사방이 모두 굄돌 밖으로 나와 처마를 이루고 있는데 그 정도를 보면 동쪽 1.7m, 서쪽 1.6m, 남쪽 2.8m, 북쪽 3.25m이다. 이 고인돌은 사방으로 나온 처마와 큰 덮개돌이 조화를 이루어 웅장하고 위엄이 있다. 또한 와방점 대자 고인돌은 덮개돌이 처마를 이룬 모습을 더욱 시각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계단식 처마를 만들었다.

요령과 길림지역의 고인돌 형식을 보면 개석식보다는 탁자식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보편화 되었기에 탁자식 고인돌이 훨씬 많이 보고되었다. 하지만 최근 탁자식 고인돌 주변에 개석식이 있다는 보고가 많이 있어 앞으로의 조사에 따라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이 문제는 주로 탁자식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조사되었기 때문에 제한적인 자료의 분석 결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요남지구에서는 상대적으로 탁자식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지역에 따라 형식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요령지역의 탁자식 고인돌 가운데에는 덮개돌이 유별나게 큰 것이 비교적 조망이 좋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당시 사회의 건축·역학적인 기술 등 축조에 관한 여러 가지를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고인돌은 성격이 무덤뿐만 아니라 제단과 같은 상징적인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 주목된다.


2) 무덤방의 구조

고인돌의 무덤방은 형식에 따라 차이가 있다. 탁자식은 지상에 있지만 개석식은 대부분 지하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보편적인 모습에서 벗어난 것이 있어 주목된다. 보란점 벽류하 21호 고인돌은 개석식인데 무덤방이 지상에 만들어져 있다.

또한 개석식 고인돌인 보란점 벽류하 15호 · 16호 · 24호와 봉성 동산 9호 그리고 서산 1호에서는 무덤방 옆에서 딸린방〔副棺〕이 조사되었다. 벽류하 고인돌은 모두 판판한 돌을 가지고 만든 돌널이지만 동산과 서산 고인돌은 돌을 2~3층 쌓아서 만든 돌덧널〔小室 · 耳室〕이다. 그리고 벽류하 24호는 덮개돌 바로 밑의 무덤방 옆에 조금 얕게 파 단(段)이 진 이층대(二層臺)를 만들었다. 이러한 딸린 방에는 부장품이 껴묻기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내세관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해석된다.

고조선지역의 고인돌에서 조사된 또다른 특징은 탁자식의 경우 축조 과정에서 굄돌을 똑바로 세우지 않고 전체적인 안정감을 고려하여 안쪽으로 조금 기울어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축조 기술의 발전에 따라 터득한 건축 역학의 한 원리로 이해된다. 이러한 안기울임은 덮개돌이 비교적 큰 것 가운데 많으며, 보란점 석붕구 1호, 와방점 대자, 장하 백점자, 대석교 석붕욕, 해성 석목성, 유하 대사탄 1호, 은율 관산리 1호, 연탄 송신동 22호, 강동 문흥리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굄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수평을 유지하기 위한 흔적이 조사된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무순 산용 1호 고인돌을 보면 남쪽 굄돌은 북쪽 것과 높이를 맞추기 위하여 길쭉한 돌을 2층으로 얹어 놓았으며, 북쪽 것은 3줄의 돌을 얹어 서로 수평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것은 유하 태평구 11호, 매하구 험수 10호, 안악 노암리, 용강 석천산 12호에서도 조사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쐐기돌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리고 굄돌과 마구리돌이 잘 맞추어져 무덤방이 안정감을 이루면서 폐쇄된 공간을 이루도록 맞닿는 곳에 길쭉한 홈이 발견되었다. 이런 고인돌은 개주 석붕산, 장하 대황지와 백점자, 해성 석목성 1호, 유하 태평구 11호, 안악 노암리가 대표적이다.

길림지역의 고인돌 가운데 유적의 지세가 아주 폐쇄적인 곳에 위치한 동풍 용두산, 대양 1호, 조추구 2호는 무덤방의 가장자리에서 나무테 흔적이나 의도적으로 만든 얕은 흙띠가 조사되었다. 이것은 무덤방 안에서 주검을 화장하기 위하여 만든 구조물로 해석된다. 이러한 무덤방의 구조나 독특한 묻기 방법은 고인돌 사회의 장제에 관하여 시사하는 점이 많으며 길림 남부지역에서만 찾아지는 특징이다.

서북한지역의 고인돌에서는 하나의 무덤방을 여러 칸으로 나눈 것이 조사되었다. 이렇게 무덤방을 칸 나누기한 것은 고인돌의 형식과는 관계가 없지만 탁자식에서 많이 찾아진다. 그 양상을 보면 무덤방을 3~4칸으로 나누었으며, 바닥은 여러 가지다. 대부분 무덤방 안에서 사람뼈가 발견되고 있는데 연탄 송신동 22호에서는 여러 개체의 사람뼈가 있었다. 이런 독특한 모습인 무덤방의 칸 나누기는 일정한 묘역을 형성하여 여러 기의 고인돌이 한 유적에 집단적으로 있는 집체무덤과 비교된다. 하나의 무덤 영역에 여러 기의 무덤방이 같이 있어 서로 친연성이 강한 점, 무덤방의 크기로 보아 굽혀묻기나 두벌묻기를 하였을 가능성이 공통점이다.

또 고인돌 주변에 돌을 쌓아 묘역을 이룬 것이 서북한지역에서 조사되었다. 탁자식 고인돌에서는 무덤 수가 1기만 있어 개별무덤을 이루며, 개석식은 개별무덤도 있지만 한 묘역에 여러 기가 있는 집체무덤도 있다. 묘역을 이룬 모습은 대부분 강돌이나 막돌을 쌓은 돌무지 형태이나 평원 원암리 7호와 8호, 상원 귀일리 2호처럼 돌을 깔아 놓은 것도 있다. 이처럼 같은 묘역에 여러 기의 고인돌이 있는 것은 무덤의 속성상 서로 친연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친연 관계는 핏줄을 바탕으로 한 가족관계일 가능성이 높으며, 가족 단위의 공동무덤이 아닐까 한다.


3. 껴묻거리


고인돌의 껴묻거리는 무덤방의 안과 밖에서 모두 찾아지고 있다. 무덤방 안에서는 대부분 의례에 쓰인 것으로 묻힌 사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살림살이에 사용하였던 것은 무덤방의 주변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은 묻힌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제의 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고인돌에서 출토되는 껴묻거리는 대부분 토기와 간석기이고 드물게 청동기, 꾸미개, 짐승뼈 등이 있다.

여기에서는 고조선 시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미송리형 토기와 청동기에 대하여 살펴 보겠다.


1) 미송리형 토기

고인돌에서 발견된 미송리형 토기는 고조선지역의 고인돌문화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미송리형 토기는 표주박의 양쪽 끝을 자른 모양으로 목이 있는 단지이다. 외형적인 특징은 단지 양쪽에 손잡이가 달렸으며, 몸통 가운데 부분이 부르다가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오므라든다. 또한 몸통과 목 부분에는 묶음식 줄무늬〔弦紋〕가 있다. 이 토기가 출토된 지리적인 범위는 상당히 넓은데 한반도에서는 대동강유역의 이북인 서북지역이고 중국 동북에서는 주로 요하 이동지역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비파형동검 분포권과 미송리형 토기의 출토 지역이나 유구가 거의 비슷하여 문화적인 맥락에서 시사하는 점이 많다.

이 토기는 보란점 쌍방 6호, 봉성 동산 7호와 9호, 서산 1호, 북창 대평리 5호, 개천 묵방리 24호, 평양 석암 2호와 10호, 상원 매미골 1호와 방울뫼 4호, 장연 용수골 1호에서 찾아졌다.

미송리형 토기의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덧띠무늬와 줄무늬가 있다. 덧띠무늬는 쌍방 고인돌에서 출토된 토기에만 있는데 하나는 초승달처럼 가늘게 휜 반달모양이고 다른 것은 세모꼴이다. 주로 목과 몸통 쪽에 있는 줄무늬는 3~4줄이 한 묶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산 9호와 서산 1호 것은 토기 전체에 있다. 대평리 토기는 목과 몸통에 3~5줄의 줄무늬가 있지만, 묵방리 것은 몸통에 평행 줄무늬가 양쪽에 있고 그 사이에 W자 모양의 무늬가 있어 좀 특이한 모습이다.

미송리형 토기가 찾아진 고인돌은 탁자식과 개석식이 섞여 있는데 요령지역은 개석식에서만 발견되고 있어 서로 차이가 보인다.

한편 요령지역의 장하 대황지와 수암 태노분 고인돌에서도 미송리형 토기 조각이 찾아져 여러 고인돌에서 출토될 가능성이 많다.


2) 청동기

고인돌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청동기는 비파형동검을 비롯하여 비파형투겁창, 청동 화살촉, 한국식 동검, 청동 끌, 청동 송곳, 청동 꾸미개가 있으며 가끔 거푸집과 검자루 끝장식〔劍把頭飾〕이 출토된다.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의 표지 유물로 보란점 쌍방 6호, 수암 백가보자 12호, 개주 패방 고인돌 등에서 찾아졌다. 동검의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쌍방 6호 것 뿐이며 나머지는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 쌍방 6호 출토 동검은 검날의 양쪽에 있는 마디 끝이 검 끝과 가까이 있고 마디 끝의 아래쪽은 밋밋하여 고졸한 느낌을 지니고 있어 초기 동검의 성격이 강하다.

비파형 투겁창은 상원 방울뫼 5호 고인돌에서 찾아졌다. 이 투겁창은 보성 봉용리와 여수 적량동 고인돌유적에서 출토되었으며 최근 평양 표대 10호와 덕천 남양리 16호 집터에서도 발견되었다. 방울뫼 출토 투겁창은 거의 완전하며 몸통과 투겁의 길이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한국식 동검은 평양 오산리와 성원 백원리, 중·남부지역의 양평 상자포리, 영암 장천리, 순천 평중리, 김해 내동 고인돌에서 찾아졌다. 이 동검이 출토된 고인돌의 형식은 탁자식과 개석식이 섞여 있으며, 백원리 고인돌에서는 청동 장식품과 놋비수 등의 다양한 청동기가 껴묻기되어 있어 묻힌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청동 유물의 성격과 연대 문제, 공반 유물과의 관계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청동 화살촉은 은천 약사동 고인돌에서 찾아졌다. 전체적으로 보면 2단인 슴베 부분이 좀 긴 것 같고 날 부분은 예리한 편에 속한다. 이밖에도 김해 무계리, 보성 덕치리 15호 고인돌에서 찾아졌다.

청동 끌은 은천 우녕동 19호 고인돌에서, 송곳은 상원 장리 1호에서 발견되었다. 출토된 고인돌의 형식은 모두 탁자식이며 유적의 군집 정도는 여러 기가 밀집된 분포 양상이다.

장리 고인돌에서는 청동 끌 이외에도 청동 방울, 청동 교예 장식품 등의 청동 의기가 출토되었다. 이들 청동 의기는 주조 기술이나 소유자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 면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아 시사하는 점이 많다.

청동 단추를 비롯하여 고리, 팔찌 등이 동풍 조추구 2호와 보산촌 동산, 상원 방울뫼, 성천 백원리 고인돌 등에서 출토되었다. 이러한 청동기들은 대부분 거칠게 만들었으며, 발달된 주조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것은 아닌 것 같다 청동 단추의 크기는 3~4㎝, 두께는 1㎝ 안팎으로 서로 비슷하다. 외형적인 형태는 둥근 꼴로 겉면이 볼록한 모습인데 방울뫼 것은 고리가 있어 실생활에 이용되었던 것 같다.

거푸집은 도끼 거푸집으로 보란점 쌍방 6호와 벽류하 21호 고인돌에서 출토되었다. 쌍방 것은 활석에 흑연이 조금 섞인 것을 돌감으로 하였으며 2조각이 1쌍이다. 생김새는 사다리꼴이고 서로 합하면 구멍이 마련되며, 위·아래쪽에는 쉽게 맞출 수 있도록 선과 기호를 새겨 놓았다. 거푸집에 새겨진 도끼는 날쪽이 길고 허리가 잘록한 부채꼴이며 위쪽에 13줄의 볼록한 줄이 있다. 벽류하 21호 것은 2조각이 1쌍을 이루지만 부서진 한 쪽만 출토되었다. 주물을 부어 넣던 구멍을 합하였을 때 끈으로 묶었던 자취가 남아 있다. 이러한 활석 거푸집은 주변의 중국이나 일본에서 출토된 것과 비교할 때 비파형동검 문화권인 고조선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어 문화권에 따른 하나의 특징으로 해석된다.

한편 청동기 제작에 기본이 되는 거푸집을 껴묻기하였다는 것은 고인돌이 축조되던 당시의 청동기 제작 정도 또는 이 고인돌에 묻힌 사람의 신분 관계나 직업을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4. 연대


고조선지역의 고인돌에 대한 연대 문제는 상당히 일찍부터 여러 연구자들이 많은 견해를 밝혀 왔지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연대 설정에 대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고인돌과 관련되는 여러 자료를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검토하여야 된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주목된다.

요령지역의 경우, 장하 양둔의 탁자식 고인돌 주변에서 찾아진 토기와 석기는 장해 소주산 유적의 상층에서 출토된 것과 거의 비슷하여 같은 시기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소주산유적의 상층 연대는 같은 시기의 곽가촌 상층이나 상마석 중층의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자료로 보아 4,000b.p.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장하 대황지, 와방점 유수방, 보란점 유둔, 금현 소관둔, 수암 백가보자 고인돌 옆에서도 상마석 상층에서 출토된 토기와 석기가 찾아져 비슷한 시기로 해석된다. 상마석 상층은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5~14세기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밝혀졌다.

북한지역도 고인돌의 연대에 관하여 여러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 견해차가 너무 커 어려움이 많다. 특히 1990년대 초부터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고인돌 유적의 절대연대 측정값은 기존의 연대값과 큰 차이가 있다. 전자상자성공명법(ESR), 핵분열흔적법(FT), 가열발광법(TL) 등으로 얻어진 연대값은 강동 구빈리가 4,490±444b.p., 증산 용덕리 4,926±700b.p., 성천 백원리 3,324±465b.p. 등이다.

그런데 북한지역의 고인돌 연대는 출토 유물에서 보편성이 있는 팽이형토기를 통하여 알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노암리, 천진동 6호, 평촌 10호 고인돌에서 찾아진 팽이형토기의 아가리 부분은 남경유적의 팽이형토기 출토 1기 집터와 영변 구룡강유적에서 조사된 것과 비슷하여 서로 비교된다. 또한 노암리 고인돌에서 출토된 납작밑은 남경유적의 2기 집터에서 찾아진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남경유적은 1기의 36호 집터에서 출토된 숯을 방사성탄소연대 측정한 결과 2,890±70b.p.로 밝혀져 기원전 13~9세기에, 구룡강유적은 2,740±70b.p.로 나와 기원전 11~8세기에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북한지역의 고인돌은 기원전 10세기 경에 상당히 보편적으로 널리 축조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연대는 고인돌 축조의 상한 연대가 결코 아니며 앞으로 자료가 보완되면 보다 뚜렷한 시기가 설정될 것이다.


5. 기능과 축조


1) 기능

고인돌의 기능에 관하여는 탁자식 고인돌을 중심으로 여러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특히 요령지역의 고인돌은 조사가 시작된 초기부터 그 기능에 대한 의견이 옛문헌을 중심으로 거론되었다.

《三國志》<魏書 : 公孫度條>에서는 토지신을 제사하는 곳으로 여겼으며, 《白虎通》<社稷>에는 땅 위에 돌을 세워 놓은 것으로 토신(土神)이나 사신(社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와 같이 신을 제사지내고 받드는〔敬奉〕곳에는 큰 돌을 세웠던 것이다.

지금까지 고인돌에 대한 기능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첫째, 고인돌 그 자체를 신비한 상징의 대상으로 여기면서 기념이나 종교적인 성격을 지           닌 종교 제사 기념물.

둘째, 선사시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공공활동을 하는 집회 장소의 역할

셋째, 선조 제사 장소

넷째, 무덤의 기능

먼저 종교 행사지로서 고인돌의 기능 문제다.

고인돌을 축조하였던 당시에는 급격한 환경 변화에 따른 적응을 위하여 공동체 나름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집단적인 욕구의 일환으로 협동심을 가지고 추진할 수 있는 대상이 상징적인 기념물이며 이런 의미에서 고인돌이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비함을 상징하는 제단이 고인돌이며 당시 사람들이 이곳에서 종교적인 행사를 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요령지역의 고인돌유적에서 탁자식이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이런 것으로 해석되는데 입지 조건을 보면 1기는 좀 높다란 곳에 있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되는 제단 기능의 고인돌은 있는 곳의 입지 조건과 분포 상황, 외형적인 크기에서 다른 고인돌과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제단 고인돌은 어디에서나 쉽게 바라볼 수 있도록 주변보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1차적으로 웅장함을 나타낸다. 또한 독립적으로 일정한 범위에 분포하는 경우가 많으며 규모가 월등하게 큰 모습으로 외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금현 소관둔, 대석교 석붕욕, 와방점 대자, 개주 석붕산, 해성 석목성 고인돌 등이 있다.

또한 고조선 지역의 와방점 대자, 개주 석붕산 유적의 탁자식 고인돌 가운데에는 실제로 후대에 종교 장소로 이용된 것이 있어 제단의 기능에 대하여 시사하는 점이 많다.

다음은 무덤으로서의 고인돌 기능이다.

고조선 지역에서 조사된 개석식 고인돌은 무덤이고, 탁자식 가운데 입지 조건, 분포 상황으로 볼 때 무덤과 제단의 기능을 함께 지닌 것이 있다.

무덤 고인돌은 한 곳에 떼를 지어 분포하며, 직접적인 자료인 사람뼈가 출토되고 축조 과정에 묻은 껴묻거리가 찾아진다. 고조선 지역의 탁자식 고인돌 가운데 한 유적에 떼를 이루고 분포하는 경우가 많으며 사람뼈가 찾아진 고인돌도 많아 무덤 고인돌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한편 서북한지역의 몇몇 탁자식 고인돌의 경우 무덤방을 칸 나누기한 점이나, 개석식에서 묘역이 설정되어 여러 기의 고인돌이 함께 있는 점 등은 무덤으로서의 성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2) 축조

고인돌의 축조는 당시 사회의 여러 문화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모아져 이루어졌으며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하나의 역사(役事)다. 이런 점에서 고인돌 축조는 단순한 건축이나 역학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축조에 필요한 노동력의 동원 문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인돌의 축조 과정에서 먼저 고려된 것은 방위 개념인 지세와의 관련성인데 이것은 자연 숭배 사상과 연관이 있었을 것 같다.

다음은 덮개돌과 같은 큰 돌을 옮기는 것인데 운반 방법에 관하여는 실험고고학적인 연구가 있다. 고조선 지역에서는 지렛대식이나 추운 겨울철에 나무썰매 같은 것이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것은 요남지구의 많은 고인돌 유적이 강 옆이나 평지 그리고 구릉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입지 조건으로 볼 때 그러한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 북한지역에서는 강물을 이용하여 뗏목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보고되기도 하였다.

한편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 가운데에는 덮개돌의 가장자리에 여러 줄의 홈이 있는 것이 조사되었다. 대석교 석붕욕 고인돌의 덮개돌은 남쪽에 10×5㎝ 되는 홈이 3줄 있고 와방점 대자 고인돌도 2줄의 홈이 있다. 이것은 덮개돌을 옮길 때 효율적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또 고인돌유적을 축조할 곳에 미리 단(壇)을 만들어 주변보다 좀 높다랗게 한 점이 특이하다. 이렇게 단을 만든 것은 어디서나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당시 사람들이 주변 지세에 가울인 관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런 유적은 금현 소관둔, 장하 백점자, 대석교 석붕욕, 은율 관산리, 강동 문흥리 고인돌이 있다.

덮개돌과 굄돌, 굄돌과 마구리돌을 튼튼하게 맞추기 쉽도록 고인돌을 축조할 때 굄돌에 홈을 파거나 줄을 새긴 흔적이 조사되었다. 이것은 고인돌의 축조 과정이 치밀한 계획 아래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하고 있어 주목된다.


6. 묻기와 제의


1) 묻기

묻기〔葬制〕는 다른 문화 요소보다도 강한 보수성과 전통성을 가지고 있기에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고인돌을 축조할 당시는 농경이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인구 밀도가 높아 죽음이 늘 가까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고인돌을 축조한 사람들은 사회적 기능 유지의 차원에서 당시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장례 습속을 따랐을 것이다.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 가운데 무덤방에 묻은 과정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그래서 무덤방의 크기와 구조, 조사된 사람뼈에 따라 여러 가지를 유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에서 찾아지는 두드러진 특징은 화장(火葬)에 관한 것이다. 고인돌의 묻기 가운데 하나인 화장이 지금까지는 많이 조사되지 않았지만 최근 중국 동북지역의 연구 성과가 알려지면서 고조선 지역 고인돌 사회의 묻기 방법으로 널리 이용되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조사된 유적으로는 개주 화가와보, 보란점 쌍방, 수암 태노분, 유하 통구, 동풍 조추구와 대양, 두가구, 와방정자산, 삼리, 상원 귀일리, 사리원 광성동, 연탄 풍담리 고인돌 등이 있다. 특히 길림 남부지역의 개석식 고인돌에서는 거의 대부분 무덤방 안에서 화장의 흔적이 찾아지고 있다.

장례 습속에 따라 화장의 방법으로 주검을 처리하는 것은 그 절차와 처리 과정에 따라 많은 비용이 필요하므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화장 기술은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 상당히 효율적으로 실시되어 왔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화장은 일찍부터 유행하였으며 주검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된 화장에 관한 기록은 《列子》,《呂氏春秋》,《新唐書》 등에 나타나고 있다.

화장을 한 이유는 당시의 장례 습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영혼에 대한 숭배,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한 두려움, 지리적인 환경 요인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길림지역의 조추구 고인돌을 비롯한 대양, 두가구, 삼리, 용두산 유적에서는 무덤방 안에서 불탄 재와 많은 양의 숯은 물론 덜 탄 나무조각 등이 찾아져 무덤방 안에서 화장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추구, 삼리, 두가구 고인돌에서는 화장이 끝난 다음 사람뼈를 부위별로 모아 놓는 간골화장(揀骨火葬)이 조사되어 주목된다.


2) 제의

고인돌은 많은 노동력에 의하여 축조되었기에 공동체 속에서 그에 따른 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고인돌 유적에서의 제의 흔적은 무덤방 주변에서 찾아지는 토기조각이나 짐승뼈 등으로 알 수 있다. 조사된 자료가 제한적이지만 토기를 의도적으로 깨뜨려 버린 것은 당시의 장례 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며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에서도 널리 찾아지고 있다.

한편 금현 소관둔의 북쪽 고인돌에서는 무덤방 안에 짐승뼈가 껴묻기 되었고 보란점 벽류하 24호에 껴묻기된 항아리 안에는 새뼈가 들어 있었다. 새는 하늘〔天界〕과 땅〔地界〕을 연결하는 영적인 존재이며 옛기록과 고고학 자료에서도 이미 장례 의식과 관련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풍 조추구 3호 고인돌에서는 붉은 칠이 안팎으로 된 항아리가 찾아져 장례 의식에 이용된 붉은 색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이런 붉은 색은 죽음에 대하여 지녔던 사유의 한 모습으로 영생을 바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예기치 않게 받게 될 위험을 멀리하여 주는 벽사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또한 서북한지역의 황주 신대동 2호 고인돌에서는 돌돈이 찾아졌다. 이 돌돈은 무덤에서 찾아지는 경우가 상당히 드문 편으로 그 기능으로 볼 때 장례 습속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돌돈의 주요 기능이 석기를 만드는 돌감이었다는 점에서 이것이 무덤에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내세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Ⅲ. 아시아에서 고조선 고인돌의 위치


세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은 여러 가지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고조선 지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전역에서 조사된 고인돌의 수적 자료를 보면 동북아시아는 물론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세계 어느 지역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것은 다양한 고인돌의 형식과 함께 이 지역의 고인돌이 초기부터 상당한 기간 동안 계속적으로 축조되어 왔음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특히 이곳의 고인돌은 규모 면에서 그 크기가 다양하므로 축조한 집단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다음은 고인돌의 밀집 분포 정도에 관한 것이다.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 유적을 보면 대형의 고인돌이 1기만 자리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10기 이상 떼를 이룬 모습으로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가운데 유하 태평구 유적, 황주천 유역, 정방산 기슭, 석천산 기슭, 연탄 두무리와 오덕리 유적에는 100여 기 이상 1천여 기가 집중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세계적으로 비교하여 볼 때, ‘고인돌 왕국’이라고 불려도 지나치지 않다고 여겨진다. 특히 북한지역에는 100여 기 이상 고인돌이 분포하는 곳이 20여 곳이나 된다고 보고되었다.

고인돌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을 보면, 고조선 지역의 고인돌에서는 석기와 토기, 청동기, 꾸미개 그리고 뼈연모와 짐승뼈 등 상당히 다양한 종류가 찾아졌다.

이러한 유물을 분석한 결과 이 지역에서 고인돌이 축조된 시기는 기원전 15세기 이전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고인돌이 이렇게 기원전 15세기 이전에 축조되었다면 이 시기의 문화상(文化相)을 이해하는데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먼저 고인돌을 축조하였던 당시 사람들에게는 급격한 환경 변화에 따른 적응을 위하여 집단간에 공동체 나름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방안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집단적인 욕구의 일환으로 거족적인 협동심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은 상징적인 기념물의 축조가 가장 효과적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인돌은 이런 상징적인 의미에서 축조가 되었을 것이고 여기에는 당시의 사회적인 여러 요인들이 반영되었을 것이기에 다른 어떤 문화요소보다도 축조 시기의 문화적인 배경과 요인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이러한 축조 시기는 일본을 비롯한 다른 여러 아시아지역의 고인돌 유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르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고인돌의 기원 관계를 설명할 때 고조선 지역이 그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고 판단된다. 즉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고조선 지역에서 고인돌이 처음 축조된 다음 일본 등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면 당시의 문화 교류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을까? 이 점에 관하여는 직접적인 자료가 부족하여 해석에 여러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시대부터 바다를 통한 해양활동의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어 앞으로 보다 많은 자료가 모아지고 적극적인 해석이 진행된다면 고인돌문화의 기원과 전파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으로 기대된다.


고인돌 이해에 도움이 되는 글


국립 나주문화재 연구소 엮음, 2012, 『한국의 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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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문식, 2007.「고인돌 왕국 고조선과 아시아의 고인돌 연구」『고대에도 한류가           있었다』, 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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