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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회 국민강좌] 일본고대사와 한민족 2013.12.06  조회: 5525

 

     “일본의 신도(神道)는 한민족의 소도(蘇塗) 제천문화의 한 갈래”

 

사단법인 국학원(원장 장영주)은 2013년 9월 10일 오후 7시 서울 종로구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김철수 박사(중원대학교 교수)를 초빙하여 일본고대사와 한민족에 대하여 제122회 국민강좌를 개최했다.

 

 

<제 122회 국민강좌 안내>

○ 주  최: (사)국학원

○ 일  시: 2013년 9월 10일 (화) 저녁 7시 ~ 9시

○ 장  소: 대한출판문화협회 4층 강당

○ 강  사: 김철수 박사 (중원대학교 교수)

○ 주  제: 일본고대사와 한민족  

 

[원고]

 

 

일본 고대사와 한민족



김 철 수(중원대. 2013. 9. 10)



일본 신도문화의 산실이자, 일본 정신사의 양대 메카, 이세신궁(伊勢神宮)과 이즈모 대사(出雲大社).

더욱이 이세신궁은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天照大神을 모신 신사이며 일본정부의 개각 때면 정부관료들이 참배하는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이즈모 대사 역시 이세신궁과 더불어 일본 고대사를 대표하는 신사로,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사관 중 하나인 일선동조론과 관련된 스사노오 신의 아들 大國主神을 제사하는 신사이다. 일본의 이러한 양대 신사가 모두 고대 한민족과 연결된 신사이다. 심지어 이세신궁은 처음에 한민족과 관련된 신을 모셨으나, 일본의 소위 ‘만세일계’ 왕실과 일보 고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일본 왕실의 최고신 天照大神으로 왜곡되어 버린 곳이다.

더구나 이 양대 신사는 일본문화를 둘러본 서구 학자들이 극찬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67년 가을, 부인과 함께 이세신궁을 방문한 토인비는 이곳이 ‘모든 종교가 통합되어 있는 세계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holy place)’이라 극찬하였다. 또 1890년 일본을 찾은 그리스계 미국기자 라프카디오 한(Lafcadio Heam)은 시마네현을 둘러보고 ‘이즈모는 신들의 나라’이며 ‘그 중에서도 가장 신성한 땅이 이즈모국(出雲國)’이라 하며, 아예 귀화하여 이름을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로 바꾸고 일본여성과 결혼하여 살았다.

이처럼 외국인들이 극찬한 두 신사. 고래로부터 일본인의 정신적 구심점이 된 신궁·신사를 중심으로 한 신도神道가 바로 동북아 제천문화의 변형인 것이다.


Ⅰ. 소도문화


『삼국지』 「魏志東夷傳」 (馬)韓條에는 고대 한민족의 소도에 관한 기록이 있다. “나라의 읍락에서는 각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때 한 사람을 天君이라 하였다. 또 모든 나라에 각기 別邑이 있어 이를 蘇塗라 부르고, 큰 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놓고 신을 섬겼다(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마한에 이어, 동일 문화권역이었던 백제에도 소도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최치원이 撰하고 진성여왕 7년(893) 분황사 승려였던 혜강이 비문을 書刻한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비문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옛날 우리나라(동국)가 셋으로 나뉘어 솥발처럼 서로 대치하였을 때에 백제에 ‘소도’라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甘泉宮에서 金人에게 제사지내는 것과 같다(昔當東表鼎峙之秋, 有百濟蘇塗之儀, 若甘泉金人之祀)”고 했다.

 

이러한 소도는 『삼국지』에 기록되었듯이 대부분의 나라들(諸國)에 세워졌었다고 보는 것이 가능하다. 고대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天神地祇와 시조신께 천제를 올리면서 공경과 정서적 공감대를 확인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천제를 지낼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천제를 올리는 특별한 장소, 곧 聖所가 별읍이고 소도였다.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는 이를 보다 자세히 기록하였다. “삼한의 옛 풍속에, 10월 上日에, 모두가 나라의 큰 축제에 참여하였다. 이때 둥근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땅에 대한 제사는 네모진 언덕에서 지내며, 조상에 대한 제사는 角木에서 지냈다. 山像과 雄常은 모두 이러한 풍속으로 전해오는 전통이다. 제천할 때는 반드시 임금(韓)께서 몸소 제사지내시니, (중략) 소도에서 올리는 제천(蘇塗祭天) 행사는 바로 九黎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蘇塗祭天, 바꾸어 말하면 제천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이 소도였음을 이르는 말이다. 각 나라는 천신지기, 시조신을 대상으로 일정지역에서 각자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그 ‘일정지역’이 ‘소도’였다. 군왕이 직접 제사지내는 이러한 소도제천은 구려 곧 동이의 교화의 근원이라 하여 모든 나라가 천제를 지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이렇듯 소도를 신단을 중심으로 한 성소로 보는 입장은 단재 신채호가 대표적이다. 그는 소도를 ‘수두’로 보았다. “태백산의 수림을 광명신의 棲宿所로 믿어, 그 뒤에 인구가 번식하여 각지에 분포하면서, 각기 거주지 부근에 樹林을 길러 태백산의 것을 模像하고 그 수림을 이름하여 ‘수두’라 하니 ‘수두’는 神壇이란 뜻이다. 매년 5월과 10월에 ‘수두’에 나아가 祭를 올릴 때 1인을 뽑아 祭主를 삼아 수두의 중앙에 앉히어 ‘하느님’ ‘천신’이라 이름하고 여러 사람들이 제를 올리고 수두의 주위에는 금줄을 매어 閑人의 출입을 금한다.”

 

단재는 ‘수두’ 곧 소도의 원형을 태백산(=백두산)의 수림에서 찾을 수 있고, 이 숲에는 광명신이 머물러 있다고 보았다. 그러다 인구가 증가하고 거주지가 확장되면서 여러 지역으로 뻗어나간 사람들은 태백산의 수림을 본 따 숲과 신단, 곧 ‘수두’를 만들고 그 주위에 금줄을 매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소도는 숲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소도는 일정크기 규모의 수풀이 우거진 장소, 혹은 평야나 들을 끼고 있는 조그마한 야산이나 구릉지대로 보여졌다. 여기는 주위가 금줄로 둘러쳐 있어 제의가 행해지는 성소였으며 별읍이었다. 『삼국지』에는 소도와 별읍이 동일하다고 보아 소도를 중심으로 마을(邑)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의 소도문화를 정리하면, ①소도는 천제를 올리는 제단 곧 신단을 중심으로 한 聖所였고, 소도의 원형은 태백산의 수림(숲)이었다. 이러한 소도 주위에는 금줄이 매어져 있었다. ②소도에는 신단수인 큰 나무 곧 聖木이 있었고 여기에 방울과 북을 걸어놓고 신을 섬겼다. 소도제천할 때에는 신단수 주변에서 가무새신이 이루어진다. ③소도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자(제사장)가 천군이었다. 제정일치 시대에는 오직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었다.



Ⅱ. 일본의 신도문화


【일본신사의 원형과 마쯔리】

고대 일본신사의 원형을 살펴보면, 신사에는 本殿이나 神殿,社 등이 항상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신은 항상 신사에 常駐하고 있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신사를 뜻하는 社는 야시로(ヤシロ)라고 한다. 그 어원은 ‘야ヤ=屋’+‘시로シロ=領域’이며, 신의 자리(座)를 세우기 위해 설치된 특별한 장소이다. 곧 야시로는 ‘신의 땅(神地)’라는 의미로 성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시로가 반드시 常設의 神의 宮,神殿,社殿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처럼 신사에 社殿 및 그에 부수하는 건축물들이 구비되기 이전에, 신사는 단지 성스러운 숲(森)과 차이가 없었다.

 

古社로 알려진 奈良지역에 있는 大神(오오미와)神社를 살펴보면 이는 명확해진다. 오오미와 신사는 일본 최초의 국가인 야마토 왜(大和倭) 조정이 탄생할 정신적(종교적) 토대가 이루어진 신사로,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신사의 시원을 찾고 있다. 보통 신사의 구조는 거울 등 神體가 모셔진 本殿과 일반인이 참배하는 拜殿이 있으나, 오오미와 신사에는 이러한 본전에 해당하는 것이 없다. 메이지 시기에 들어와서 오오미와 신사는 정부에 신전을 세우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오미와 신사의 기도 대상은 신사 뒤편에 위치한 숲이 우거진 산, 곧 미와산(三輪山)이며 이 산 자체가 神?였기 때문이었다. 미와산은 현재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는 禁足地로, 神?山 신앙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이러한 경우는 많은 신사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七支刀를 보관한 나라현 天理市에 있는 石上(이소노가미) 신궁도 古社로 배전 뒤에 숲으로 이루어진 布留山(후루산)이 신체산이었다. 大正시대까지도 본전이 없었다가 1913년에 본전이 세워졌다. 나라현 나라시의 春日(가스카)大社도 마찬가지였다. 三笠山(미가사산)이 신체산이었다.

 

일본에서는 신사를 모리(モリ)라고도 하였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노래집인 『萬葉集』에서는 杜, 森, 社, 神社를 모두 ‘모리’라 읽었다. 신사를 모리(森 또는 社) 곧 ‘숲’으로 본 것이다. 이는 고대 일본인에게 숲 곧 삼림이란 신들의 영이 깃든 신성한 영역으로 사람이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이라고 생각했음을 뜻한다. 이처럼 신사마다 신성한 지역으로 만들어진 산(숲)이 있고 이를 神體山이라 하였다.

 

일본 신사에서 행해지는 마쯔리는 신을 맞이하여(迎神), 社 곧 야시로에 모시고 제례를 행하여 다시 보내드리는(送神) 것이다. 여기서 社는 나중에 ‘神社’가 되었고, 마쯔리에서는 이곳이 곧 제례를 행하는 ‘祭場’이었다. 신의 祭場인 이러한 야시로는 본래 神座가 있는 산의 숲(森)으로 ‘杜’(もり)라 하였다. 단순히 자연의 森林이 아니라 신의 정원(神庭)이었고 祭場이었으며, 그 제장에 선 건물이 지금 ‘神社’인 것이다.

 

신은 자신의 神庭인 모리(杜)에 강림할 때, 구체적으로 그곳에 있는 바위(岩)나 나무(木)에 내려온다. 본래 마쯔리는 이러한 신이 내린 곳을 찾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은 落雷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낙뢰에 의해 깨진 흔적이나 불에 그슬린 나무 등을 찾기도 한다. 나중에는 화살을 날려 화살에 맞은 나무를 찾아 神木으로 정하기도 한다. 시메나와(注連?)로 그 주변을 둘러싸 神庭의 경계를 표시하여 結界한다. 때문에 神座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최초의 마쯔리는 그 神座 앞에서 행해지게 되며, 그곳이 祭場이고 최초의 야시로(社)가 된다.

 

이상과 같이 神은 社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마쯔리의 경우에만 강림하고, 신은 곧바로 신사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장소로 강림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 신사에서 행해지는 마쯔리(祭り)의 기본구조이자 마쯔리의 원형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편의상 사람들은 보다 준비된 마쯔리를 위하여 건물(가설의 祭殿. 단지 供物을 둘 정도)도 만들게 되었다. 점차 인간의 욕망을 위하여 훌륭한 祭場을 바라게 되었고 다양한 건축물인 신사들이 나타난 것이다. 祭場=神庭은 곧 고정된 건물이 되었고 신은 그곳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전통적인 신사발생의 모습이며 성소신앙에서 신사가 발생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웅족의 신단, 히모로기】

 

구체적으로 일본 신사의 원형은 히모로기(神籬)에서 찾기도 한다. ‘히모로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본열도에서 본격적으로 국가형태를 갖추고 일본문화의 단초를 마련한 조정은 야마토 왜(大和倭. 4~6세기) 왕권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야마토 왜 왕권 시기인 제 11대 垂仁천황 3년 3월에 신라에서 왕자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무리를 이끌고 일본으로 왔다. 이 때 아메노히보코는 7개의 神物을 갖고 건너갔는데, 그 중 하나가 ‘곰(熊)의 히모로기(神籬)’였다.

 

히모로기는 무성한 나무의 숲으로 신을 숨긴 것으로, 신단 곧 신령을 제사지내는 祭壇이었다. 또한 그 신단에 있는 큰 나무로 『삼국유사』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태백산으로 내려왔던 神壇樹를 말하고 있다. ‘곰의 히모로기’에서 ‘곰’(熊)은 한민족과 관련이 깊은 토템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곰 신단’이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에 의해 야마토 왜로 건너간 것이다. 그래서 이능화는 “히모로기는 본디 조선 물건”이라 했고, 宮崎道三郞 같은 학자도 ‘히모로기는 조선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히모로기는 넓게 보면 신단을 모신 옛 조선의 성소인 소도를 말한 것이었고, 구체적으로 본다면 신의 정원(神庭)이자 祭場인 숲속에 있었던 성스러운 나무(聖木)인 신단수였다. 최남선이 지적한 수두가 수림을 뜻하는 동시에 거기에 있는 신단을 의미했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처음에는 숲 속에 신이 있다는 관념에서 큰 나무를 대상으로 제사지냈고 이 숲을 ‘모리’(森. 社)라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히모로기와 관련해서 신사를 세울 때 필요한 신노미하시라(心御柱)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즈모 지역에 스사노오의 후손인 오오쿠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를 모신 이즈모(出雲)대사의 옛 모습을 보면, 높이 48m의 고층 목조신전을 짓기 위해 땅 깊숙이 반석에 9개의 큰 기둥을 세웠다. 이러한 고층신전을 지탱했던 9개의 기둥 중에 가장 중앙에 있는 기둥을 신노미하시라, 곧 心御柱이다. 이 중간 기둥인 신노미하시라는 신사, 곧 신단의 중심 기둥(나무)으로 히모로기이며, 소도 신단의 큰 나무인 신단수로 보인다.


그러면 신사에서 ‘제사 모시는 신’은 누구였고 ‘제사를 주관하는 자’는 누구였을까? 소도에서 올리는 천제는 하늘에 올리는 제사였기 때문에 제사의 대상은 하늘 곧 천상의 至高神이었다. 일본의 성소인 신사에서도 천상의 지고신에 제사하고 있었을까? 2009년 현재, 일본 내에 신사의 수는 약 8만 8천개소이며 그곳에서 제사하는 신들도 다양하다. 일본신화에 나오는 신들, 조상신과 우지가미(氏神), 우부스나가미(産土神), 그리고 역사 속에 등장하는 각종 영웅신 등이 모셔지고 있다. 때문에 고대 성소인 신사에서 모셔졌던 신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요즘 신사의 祭神이 아닌 일본열도에서 역사적으로 유서있고 대표적인 신사를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세신궁은 현재 일본신화에서 일본열도를 만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신의 세 자녀 중 天照大神를 제신으로 받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와 모든 신사들이 그 아래 위계서열을 자리하고 있다. 그러면 이세신궁은 한민족의 문화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이는 우선 제신(祭神), 곧 아마테라스 신에 대한 문제에서 출발가능하다. 이세신궁에서는 처음부터 아마테라스 신을 제신으로 하고 있었던가? 그리고 언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제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었던 것인가?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기 때문에 이 문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이세신궁의 창사부터 다루어 나가면서 하나 하나 살펴보겠다. 국가 최고신을 이세신궁에 제사하게 된 것은 언제였을까를 확인하는 일은 국가 최고신을 제사한 이세신궁은 언제 創祀되었던 것일까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살펴보았던 성소와 히모로기도 이세신궁에서는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가를 함께 설명하겠다.



Ⅲ. 이세신궁의 創祀와 祭神 그리고 心御柱


【이세신궁의 창사】

 

이세신궁의 탄생,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세신궁의 창사를 둘러싼 다양한 설들이 있다. 그러나 기록으로만 본다면, 『일본서기』에는 이세신궁의 창사를 이세에 야시로(祠)가 세워진 ‘垂仁 천황(11대) 25년 3월’의 일이라고 하였다. 編年을 충실히 한다면, 이 기록을 바탕으로 볼 때 이세신궁의 창사는 야요이 (?生)시대 중기로 거슬러 올라 기원전 5년의 일이 된다. 그러나 이세에 야시로(祠)를 세웠다는 기록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뒤에서 보겠지만 아직은 天照大神이 명확히 나타나기 이전이라 天照大神을 이세에 제사지냈다는 내용이나 수인천황의 재위년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신뢰하기가 어려운 기록이다. 이는 후세에 이루어진 사실을 『일본서기』를 편찬하면서 앞당겨 기록함으로써 이세신궁의 창사 년대를 앞당기기 위한 역사 왜곡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세신궁의 창사와 관련하여 한 가지 주목할 필요가 있는 사실은 齋王 관련 기록이다. 재왕은 소도의 천군과 같이 성소인 신사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자’이다. 일본에서 고대부터 행해진 제사의 祭主는 당연히 천황이었다. 재왕은 이러한 천황을 대신하여 이세신궁에서 최고신을 모시기 위해 왕궁에서 파견된 자로, 보통 천황의 여식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일본서기』에는 스이닌 천황 시대에 倭姬命가 처음으로 이세신궁에서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일본서기』는 그 후 줄곧 ?王 관련 기사가 없다가, 雄略천황(21대)의 代에 다시 등장한다. 웅략천황 원년(457년) 3월에 “3인의 妃를 두었다. 元妃는 葛城圓大臣의 딸 韓媛이라 한다. 白髮武廣國押稚日本根子天皇(淸寧천황)과 稚足姬皇女를 낳았다. 이 皇女는 (재왕이 되어)伊勢大神의 祠를 모셨다”고 하였다. 신궁의 창사와 재왕의 임명과 파견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면, 제도화된 ?王의 이세신궁 파견은 대략 5세기 후반 웅략천황의 시대에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유력시 된다.

 

웅략천황(456-479)이 재위한 5세기는 어떤 시기였을까? 광개토대왕비문를 보면, 辛卯年(391)부터 5세기 초반에 걸쳐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지역을 공격하면서, 왜와도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3)에 이어 장수왕(재위 413-491)이 등장하면서 고구려의 강성으로 점차 왜 뿐만 아니라 백제도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었고 백제 개로왕이 전사하였다(475년). 477년에는 백제패망의 정보가 웅략천황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祭神】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웅략천황이 강렬한 국가의식으로부터 국가신을 제사하는 이세신궁을 창사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웅략천황이 이세신궁을 창사한 것은 이러한 대외적 긴장관계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는 흠명천황 때의 기록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옛적에 웅략천황의 세에 고구려에 공박 당하였을 때에 누란의 위기가 있었다. 그때 천황이 신기백에게 명하여 계책을 신기에 물어보신 일이 있다. 신직이 신의 말을 빌어, ‘처음에 나라를 세운 신을 모셔와서 망하려고 하는 왕을 구하면 반드시 나라가 안녕이 되고 백성 또한 안녕하게 되리라’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나라가 안녕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나라를 세운 신이란 천지초창의 때 초목도 말을 하였을 때에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신이다.”

 

웅략천황이 이세신궁에 모신 국가 최고신은 ‘천지창조의 시기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에 나라를 세운 신’이었다. 그러면 현재의 祭神인 天照大神이 그때의 국가 최고신이었을까? 그런데 23대 顯宗천황 3년(487) 조에 보면 “월신이 사람에게 지펴 ‘나의 선조 고황산령이 미리 천지를 만드신 공이 있다’”고 했고 또 “일신도 사람에게 지펴 ‘반여의 전지를 나의 선조 고황산령에게 바치라’”고 하였다. 곧 ‘천지창조의 시기 하늘에서 내려와 처음에 나라를 세운 신’은 高皇産靈尊(다카미무스비노미코도)임을 기록하였다.

 

5세기 후반기부터, 야마토 왜는 고구려와 같은 전제적 통일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그 정신적 핵심으로 지고의 ‘天’에 유래하는 왕권사상을 도입하려 했다. 야마토 왜의 왕은 고구려의 왕과 같이 ‘天帝之子’가 되고자 했다. 웅략천황은 祭祀場[祠]을 이세에 만들었고, 여기에서 ‘이세대신’인 국가 최고신 高皇産靈尊를 제사하였다. 『일본서기』에 이세에 모셔진 국가 최고신은 웅략 이전, 줄곧 伊勢大神(또는 日神)으로 표기되어 있고, 그 내용은 타카미무스비였다.

 

타카미무스비 신은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神代記’에 보이는 ‘造化三神’ 중 한 신으로, 만물의 생성?생장을 관장하는 신이다. 메이지 시대 역사학자 久米邦武는 일본의 “신도가 祭天의 옛 풍속,” ‘일본의 신도는 祭天報本에서 생겨난 풍속이다’라 지적하면서, “일본 천황들은 天照大神을 모시고 제사지낸 것이 아니었다. 고대의 倭韓은 모두 동일한 천신을 제사지냈다. 고조선 시대에 영고, 동맹과 마찬가지로 일본천황들도 新嘗祭(니나메사이)를 지냈다.” 그는 일본 천황들이 본래 제사에서 받들던 신이 오늘날 알려진 일본의 시조신이자 천황가의 皇祖神인 아마테라스가 아니라, 소도에서 제천 시에 받들었던 천신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久米邦武의 지적도 처음부터 이세신궁에 모셔졌던 신은 오늘날처럼 아마테라스 신이 아니라 소도제천의 제신과 동일한 지고신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초대 신무천황이 최초로 제사지냈던 신은 아마테라스가 아닌 타카미무스비였다. “지금 나는 몸소 高皇産靈尊을 나타내기로 하겠다(顯齋). 너를 齋主로 하여...” 라 하였다. 신무왕은 제사의 장소를 산중에 설치하고, 천신을 제사했다. 타카미무스비에 대한 제사는 아마테라스에 선행하고, 야외에서 거행되었던 것이다. 타카미무스비 신은 “별명이 타카키高木의 신”이었다(是高木神者、高御産?日神之別名。” 『고사기』). 이 타카미무스비는 高木으로 상징되었고 高木은 돈독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이 나무는 神木이다. 이 나라는 木國이다.”라 했던 것이다. 부연할 필요도 없이 이 고목은 동북아 소도에 세워졌던 神檀樹였던 것이다. 고목 밑에서의 宴도 행해졌다.

 

당시 야마토 왜는 타카미무스비 신을 국가 최고신으로 받들고 있었고, 아직 천황제도 황태자 제도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왕은 호족(群臣)들로부터 推擧되고 있었다. 따라서 왕은 대대로 교체되어 재정립되었다. 왕의 권위는 선대로부터 계승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지고신인 타카미무스비 신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었다. 타카히무스비 신은 대왕의 권한을 초월한 지고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야마토 왜 왕의 즉위식이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웅략천황은 “有司에 명해, 壇(타카미쿠라)를 泊?(하즈세)의 아사쿠라朝倉에 설치하여 천황의 위에 즉위하였다. 여기에 궁을 정했다.”고 하였다. 泊?(하즈세)의 朝倉는 미와산의 남쪽 산록이며, 여기에 壇을 설치하였다.

 

문맥으로 봐서 이곳은 옥외라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다. 대왕은 登壇하여, 최고신에 서약을 세우고, 최고신으로부터 付託을 받아 즉위하는 절차였다. 이러한 의례를 거쳐 왕이 되고 궁을 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단은 아무 데나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큰 나무(大木, 高木) 아래 설치하였다.

 

齊明天皇 2년(656) “전신령의 꼭대기에 둘러 담을 쌓았다.[전신은 산의 이름이다. 이를 大務(다무)라 한다]. 또 정상의 두 槻木의 근처에 觀(도교의 사원인가)을 세웠다. 양규궁이라 하였다. 또는 천궁(도교에 의한 이름인가)이라 하였다.” 高木 밑에 단을 설치하고, 등단한 천황은 高木을 올려다 보고, 고목을 향해 선서하고, 고목의 신으로부터 付託을 받는 것이다. 36대 효덕천황 조를 보면 “황태자(효덕천황)는 大槻의 나무 아래에 군신을 소집하여 맹세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酒宴을 베풀었다.

 

이 나무는 신성한 나무였다. 함부로 베어내거나 할 수 없었는 신목이었다. 31세 용명천황의 “불법을 믿고 신도를 공경하였다(天皇信佛法尊神道)”고 했지만, 제36세 효덕천황은 “불법을 존중하고 神道를 가벼이 여겼다.[생국혼사의 나무를 자른 것들이 이것이다]” 라고 했다. 37대 제명천황 7년에도 “천황이 조창궁광정궁에 옮겨 거주하였다. 이 때 조창사의 나무를 모두 베어 이 궁을 지은 고로 (뢰)신이 노하여 대전을 무너뜨렸다. 또 궁중에 鬼火가 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高木의 신은 최고신인 타카미무스비의 神體이다. 高木 밑에서 즉위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즉위식에서 일본 왕들은 高木의 신 타카미무스비로부터 통치권을 받는 것이다. 타카미무스비의 神體인 高木은 거대한 히모로기였고, “천황은 왜희명을 지팡이(御杖 신이 나타날 때 매개로 하는 나무의 역할)로 삼아” ‘이세대신의 祠’를 이세국의 땅에 세웠다.

 


【이세신궁의 히모로기】

 

그러면 이세신궁의 히모로기는 어디에 있을까? 앞서 지적하였듯이, 히모로기는 심어주이다. 이세신궁의 제사는 바로 이세신궁 正殿의 床下 중앙에 있다고 하는 한 本의 柱, 심어주에서 시작된다. 이세신궁에는 내궁과 외궁에서 三節祭(산세쯔사이)라 해서 매년, 3개의 중요한 마쯔리가 행해지고 있다. 10월의 神嘗祭(간나메사이), 6월과 12월에 행해지는 月次祭(쯔기나미사이)이다. 내궁의 正殿에는 삼절제의 때에만. 이 때 올리는 식사는 格別한 것으로, 由貴大御饌(유키노오오미케)이라 부른다.

 

 由貴는 이 上이 없는 貴하다고 하는 의미이며, 語源은 신에 올리는 齋酒(유키)이다. 御饌은 신에 헌상하는 식사로, 大御饌의 때는 특별히 헌상한다. 그 供進은 宵(밤)와 ?(새벽), 곧 오후 10시와 오전 2시 2회에 걸쳐 행해지는 秘儀이다. 옛날은 正殿(쇼우덴)의 床下에 大物忌(오오모노이미)가 들어가고, 유귀대어찬은 ‘心의 御柱(신노미하시라)’에 올려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세신궁의 제사가 심어주에서 시작됐던 것을 반영하고 있다.

 

심어주야말로 神體로 다루어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이후, 유귀대어찬은 床下의 심어주에 대해서가 아닌, 正殿 앞에 공양되게 되었다. 그리고 심어주의 直上에 해당하는 正殿 중앙에는 神體로서 거울(鏡)이 안치되었기 때문에, 神鏡에 바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생각된다. 심의 어주는 ‘天의 御柱’(아메노미하시라)로도, ‘天의 御量柱’(아메노미하가리노하시라)라고도 불린다. 이세신궁에서는 20년 마다 정전을 옮기는 식년천궁이 행해진다. 천궁이 완료된 이후에도 심어주 만은 그대로 남아있고, 20년 후에 다시 천궁이 행해질 때는 이 남겨진 심어주의 위치가 기준이 된다. 심어주를 중심으로 해서 神域의 ‘소우주’가 형성된다. 이 하시라가 天의 御量柱라는 것도 측량의 기준에서 유래한 것이다. 천의 어주는 하늘과 땅을 연결한 세계의 基軸이 되는 것이다.

 

홀로 세워진 하시라는 신이 빙이해 내린 히모로기이다. 하시라에 빙의한 신은 하늘에서 지상인 이 땅으로 내려온 신이었다. 심어주는 柱라 해도 극도로 짧으며, 오히려 나무 捧이라 하는 것이 가깝다. 그러나 히모로기는 高木을 상징한 것이며 곧 타카미무스히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伊勢內宮의 배후에는 소도와 같은 성소로 광대하게 펼쳐진 원시림이 있고, 이곳은 예로부터 高麗?(고우라이비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곳은 과거에 도래인의 入植地였다고 한다. 김달수는 이세신궁 주변에 있는 韓神(가라카미)山은 五十鈴川의 對岸의 꼬불꼬불 구부러진 路地의 안쪽에 있고, 접근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元宮이 있는 땅에 韓神山이란 이름이 남은 것은, 원래는 이곳이 도래인의 入植地였던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였다.


【일본 최고신의 교체, 皇祖神의 출현】

 

그러나 7세기 후반 발발한 임신의 난에서 대승리를 거둔 천무천황이 즉위하면서, 이세신궁을 둘러싼 양상은 일변한다. 天武천황(40대. 673-686)은 50여 년간 공백이 있던 이세에 재왕 파견을 결정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임신의 난을 거쳐 천무천황이 673년에 즉위하고, 愛娘을 ‘천조태신궁’에 봉사하는 ?王에 임명하고, 674년 ‘이세신궁’에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더 큰 변화가 있었다. 이 때 재왕이 봉사하던 신은 이전의 타카미무스히가 아니라 아마테라스로 바뀌어 있었다. 천무, 지통조의 시대에 국가 최고신이 타카미무스비에서 아마테라스로 轉換되었다는 것은 정설이 되고 있다.

 

왜 천무, 지통조에 아마테라스라 하는 ‘황조신’이 새롭게 국가 최고신으로 세워졌는가? 천무천황은 한반도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주변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임신의 전쟁(672)에서 승리하여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천무천황 직전의 천지천황은 제명천황의 뜻을 이어 백제의 부흥과 원조를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이제 백제가 멸망한 마당에 야마토 왜의 정체성은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임신의 전쟁에서 권력을 장악한 천무천황은 전대 이래의 모든 제도를 일신하여 나갔다. 토착화된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여 모든 것을 새로 바꾸고 새 틀을 짰다. 일본 고래의 의복제도를 금지하고, 의복령을 제정하고 관위제도 바꿨고 文武官 선임제, 호적 및 일력의 제정과 사용, 성씨제 실시, 불교행정의 개혁, 승마제 실시, 국가 기본법(율령:‘大寶令’) 편찬(701) 등 행정전반을 개혁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왕경을 조영하고, 도읍도 옮겼다(694). ‘천황’이란 호칭도 ‘천황대제’에서 차용하여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천황대제는 자미원을 구성하는 자리, 하늘의 성스러운 황제를 말한다는 천황대제별인 북극성을 말한다. 천황은 ‘北辰의 별’ 곧 북극성을 신령화한 용어였다. 『일본서기』나 『고사기』에는 607년부터 천황칭호가 사용되었지만, 공식화된 것은 이 때 곧 천무조부터였다.

 

야마토 왜는 ‘새로운 천황’ 중심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670년에는 아예 국호도 ‘일본’으로 바꾸어 버렸다. 『삼국사기』를 보면, 문무왕 10년(670) 12월에 “왜국이 이름을 고쳐 日本이라 하고 스스로 ‘해 나오는 곳에 가까워 이처럼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역사편찬 작업도 시작하여 720년 『일본서기』가 편찬되었다. 『일본서기』는 일본 정부에서 편찬한 최초의 正史로 일본의 神代부터 持統 때까지(초기-696) 기록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무, 지통조에 아마테라스라는 ‘황조신’이 국가신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그러면 아마테라스는 어떤 신이었는가? 아마테라스는 織殿에 살고 있던 신의 옷을 짜는, 織姬로서의 前史가 있다. 『일본서기』는 ‘天石窟’ 신화에서, “천조대신이 神衣를 짓는(織) 齋服殿에 살고 있다”고 하며, 一書도 또 日의 神은 “織殿(하타도노)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신을 위해 옷을 짓는 ‘히루메=日의 妻’, 이러한 前身을 최고신 아마테라스는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웅략 이전, 이세에 모셔진 국가 최고신으로 줄곧 伊勢大神(또는 日神)으로 표기되어 있다가 천무천황 원년(672)에 ‘天照太神’이 돌연 출현한다. 그것이 임신의 난에서 행군 중 천무에 의한 望拜기사이다. 주목되는 것은 그러한 아마테라스의 경유지가 임신의 난에 大海人(오오아마)軍의 행군경로에 관계가 깊다는 것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천무천황 원년에 “멀리서 천조태신을 望拜하였다”고 하였다.

 

천무‘천황’도 ‘황조신’ 아마테라스도 출현했던 것이다. 천무천황은 새롭게 황조신를 발안하고, 국가신을 제사하는 장이면서 오래도록 재왕 부재의 상태에 있던 이세신궁에 ‘황조신’ 아마테라스를 진좌시키는 것으로 황통의 기원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자신의 愛娘을 재왕으로 파견하고, ‘황조신’을 제사하는 것을 개시했다. 그러함으로서 황손, 곧 신의 자손으로서의 ‘천황’-결국 천무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근거지웠던 것이다. 그래서 ‘황조신’을 모신 場(=이세신궁)과 제사하는 자(=천황을 대신한 재왕에 의한 제사)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천황’의 혈통상의 선조를 ‘황조신’으로 규정하고, 이를 국가 최고신에 위치부여한 것은 황조신의 자손(황손)인 천황이 사람이면서 신인 것을 의미한다. 육신을 가진 신, 곧 現人神(아라히토가미)의 탄생이다. 이에 의해 천황은 왕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祭神이 타카미무스히에서 아마테라스로 바뀌면서 이세신궁은 바뀌어 태어난 것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천무천황 681년 정월부터 3월에 걸쳐, 신사 및 제사 그리고 율령 및 國史의 편찬에 관한 국가정책을 내놓고 있었다. “畿內 및 諸國에 天社地社의 神의 宮을 修理하라.” ‘天社地社의 神의 宮’은 天神地祇, 곧 天神과 國神을 제사모시는 상설의 신사를 말한다. ‘修理’는 오늘날 의미의 수리가 아니고, 古語의 수리에는 修繕의 의미만이 아닌 새롭게 만든다는 의미가 있다. ‘기내 및 諸國’의 제국은 기외의 제국을 가리킨다. 幣帛은 신에게 바치는 것(=供物)이다. 폐백을 바치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奉幣라고 하고, 이 경우는 조정에서 諸國의 신사에 나눠주는 것으로 班幣라고 한다. 조정으로부터 有力社로 인정되어 班幣를 받는 신사가 官社이다.

 

이세신궁을 정점으로 한 관사제의 개시는 이 때쯤부터라고 보여지며, 천황이 奉한 황조신 밑에 전국의 관사의 신들이 위치지워지게 되었다. 관사의 신들은 皇祖 아마테라스 다음에 따르게 되고 이와 함께 皇祖를 讚하며, 수호한다. 官社制는 황조신과 천황의 덕과 권위를 전국에 침투시켜, 천황지배의 정통성에 실체를 부여했다. 관사제를 바탕으로 황조신과 천황의 권위와 존엄이 증가되었고 확실하게 여러 지역에 침투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국의 官社는 천황의 아래, 명실공히 관리되었던 것이다.



Ⅳ. 신들의 고향 이즈모에 위치한 일본 최고最古의 신사, 이즈모 대사


시마네현 이즈모 지역은 말 그대로 ‘일본 섬나라의 뿌리’[島根]가 된 곳이며, 일본 신화가 출발하는 지점이다. 일본의 신화시대는 우리의 신라시대에 해당하며, 이즈모 신화는 큐슈의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보다도 시기적으로 앞선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즈모(出雲)는 수많은 신화의 무대가 되고 있어 ‘신들의 고향’‘신들의 수도’‘신화의 나라’‘구름의 나라’ ‘하늘의 나라’라 불린다. 그리고 여기는 신교의 유습이 신라를 거쳐 일본열도로 흘러들어간 곳이다.


【신라국과 스사노오】

이즈모 신화는 그러나 신라와 이즈모의 연결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신화이다. 이즈모 신화는 높은 하늘나라인 다카마노하라(高天原)에서 일본열도를 만들어가는 고대신화, 그리고 일본 왕실가의 정점에 위치한 소위 황조신皇祖神 아마테라스오오가미(天照大神)와 관련되어 있다. 곧 아마테라스의 소위 남동생으로 알려진 스사노오노미코도(須佐之男命, 素盞鳴尊)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 내용을 간추려 살펴보자.

‘높은 하늘나라’(高天原)에는 최초에 우주를 개벽한 조화삼신造化三神이 있었고, 그 뒤에 7대의 천신天神들이 이어 내려왔다. 그 7대 천신의 마지막에 천상에서 일본열도를 만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세 신[三神], 곧 태양신[日神]인 아마테라스오오가미와 달신[月神]인 쯔쿠요미노미코도(月讀尊), 그리고 바다의 신이자 대지의 신인 스사노오노미코도가 있었다.

 

그 가운데 스사노오는 성격이 난폭하여 하늘나라를 혼란시키고 아마테라스 신과도 불화하였다. 그러던 중 높은 하늘나라에서 추방되기에 이르자, 스사노오는 어머니의 나라, 뿌리의 나라를 가고자 했다[물론 이 신화내용은 그대로 믿기 보다는 한일 고대사와 연관되어 숨겨진 그 의미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점이 많다].

 

그래서 높은 하늘나라에서 나온 “스사노오는 아들 이다케루노미고토(五十猛尊)를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에 내려와 소시모리(曾尸茂梨)에 살았다. 그리고는 … 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항해하여 이즈모국(出雲國)에 도착했다.” 동행한 아들 이다케루는 올 때 “많은 나무의 종자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가라쿠니(韓地)에 심지 않고 쯔쿠시(筑紫. 큐슈 북부 지역)로부터 시작하여 대팔주국(大八洲國. 일본국) 전체에 심어 나라 전체가 푸르렀다. … 이가 기이국(紀伊國)에 머무르고 있는 큰 신(大神)이다.” 또 스사노오는 “가라쿠니(韓鄕)에는 금과 은이 많다. 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그 나라로 건너가려 하여도 배가 없으면 건너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즈모로 건너온 스사노오는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자신을 ‘국신’(國神)이라 소개했다. 일본신화에는 천신天神과 국신이 나오는데, 보통 천신은 높은 하늘나라인 고천원의 신들이고 국신은 일본열도에 본래부터 있던 신들이다. 따라서 천신들은 ‘어디선가 들어온’ 신들을 말한다. 국신이라면 천손이 강림하기 이전 일본열도에 정착해 살고 있던 지역신들이다.

 

노인은 스사노오에게 자신의 자녀들이 꼬리가 여덟 달린 야마다노오로치(八岐大蛇)라는 뱀으로부터 여러 해 동안 괴롭힘을 당했다고 토로했다. 스사노오는 노인을 도와 가라사이의 칼(韓鋤之劒)[‘사이’를 ‘쇠’ 혹은 ‘쇠로 만든 삽’의 음이기 때문에 ‘한국의 쇠로 만든 칼’이라는 뜻이다]로 그 큰 뱀을 퇴치하게 된다. 그 칼로 큰 뱀의 목을 베고 배를 갈랐다. 이 때 뱀의 배에서 나온 칼이 쿠사나기의 칼(草?劒. 草那藝之大刀)이다. 나중에 이 칼을 아마테라스에게 주었고[니니기노미코도瓊瓊杵尊가 이 칼을 갖고 일본열도로 내려온 것이 소위 ‘천손강림’ 신화이다], 이것이 일본 천황가의 ‘삼종의 신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국토이양 신화】

 

스사노오는 계속해서 일본열도를 평정해 나갔다. 참고로 여기서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아마테라스오오가미의 후손 니니기노미코토의 천손강림보다도 먼저 신라를 거쳐 일본열도에 최초로 발을 디딘 천손이다. 곧 일본열도에 첫발을 디딘 신은 큐슈에 내려온 니니기가 아니라 이즈모에 건너온 스사노오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스사노오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작업도 일본의 고대사를 밝히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그것이 신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여기에 내포된 의미를 찾는 일이 중요하지만. 뿐만 아니라 스사노오는 신라 소시모리에 살았었기 때문에 일본열도의 곳곳에서 ‘소시모리=우두牛頭천황’으로 모셔지고 있다. 이렇게 둘을 동일인으로 보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여하튼 일본 고대사는 지배집단인 천신이 열도에 산재한 국신들을 정복하고 나라를 평정하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스사노오가 평정한 나라(葦原中國:일본)는 큐슈의 다카치호 구시후루 봉우리에 내려온 아마테라스의 후손인 니니기노미코도에게 이양된 것이다. 이양한 자는 스사노오의 후손 오오쿠니누시노가미(大國主神)[오오모노누시노가미大物主神, 오오아나무치노미코도大己貴命이라고도 불렸다. “韓의 神”이라고도 한다. 『廣辭苑』]였다.

 

아마테라스의 명을 받고 일본열도를 이양받기 위해 이즈모에 사자로 내려온 신[建御雷神]이 있었다. 그 신은 파도치는 바다에 삼지창을 거꾸로 꽂고, 그 위에 앉아 일본열도를 통치하는 오오쿠니(大國主神)에게 (일본)국토양도를 요구했다.

 

오오쿠니는 니니기에게 국토를 양도했다. 이것이 소위 일본 국토이양(出雲國讓り) 신화이다. 그리고 나라를 평정할 때 사용한 창인 히로호고(廣矛)를 그에게 주며 말했다. “지금 내가 나라를 바치니 누가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까. 이 창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면 반드시 평안할 것이다.”

 

그리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일본열도(葦原中國)를 헌상하겠습니다. 단지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거주할 장소로, 천신의 아들이 황위를 이어 갈 훌륭한 궁전처럼, 땅 깊숙이 반석磐石에 큰 기둥(宮柱)을 깊게 박아, 고천원을 향해 치기(千木)가 높이 치솟은 신전을 만들어주신다면, 저 멀리 유계(幽界. 신명세계-인용자)로 은퇴(隱退)하겠습니다. 다른 많은 신들도 거역하지 않을 겁니다.”

 

곧 현세의 일은 니니기가 맡고, 유계[신명계]의 신사(神事)는 오오쿠니가 맡는다는 안이었다. 이래서 타협안이 이루어졌고, 신궁이 조영되었다.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 계열간에 역할분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아마테라스 후손은 일본나라[정치]를 경영하고, 스사노오 후손이 신의 일[종교]을 맡게 되었다. 나라를 양도한 오오쿠니의 아들들은 ‘푸른 잎의 나무로 만든 울타리[靑柴垣]’(『고사기古事記』)로 숨어버렸다. 이 울타리가 ‘신이 깃드는 장소,’ 곧 앞서 말한 히모로기(神籬)이며 소도였다.


【이즈모에 세워진 48m의 고층신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사가 바로 이즈모 대사였다. 이 신사가 일본열도에 산재한 신궁·신사의 모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즈모에는 “훌륭한 궁전처럼 땅 깊숙이 반석에 큰 기둥을 깊게 박아, 고천원을 향해 치기가 높이 치솟은 신전”이 지어졌다. 우선 땅 깊숙이 반석에 9개의 큰 기둥을 박았다.

 

2000년에는 13세기(1248) 세워졌던 이즈모 대사 본전을 지탱했던 기둥이 발견되었다. 이 기둥을 보면 직경 1.3m의 기둥 세 개를 묶어서, 지름 3m가 넘는 하나의 기둥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나의 기둥을 만드는데 큰 나무 세 개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9개의 기둥 중에 가장 중앙에 있는 기둥을 신노미하시라, 곧 심어주(心御柱)라 했다. 혹자는 이 중간 기둥인 심어주를 소도 신단의 큰 나무 곧 신단수라 보기도 한다.

 

이러한 9개의 기둥위에 ‘궁전같은 신전’이 세워졌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고대의 이즈모 대사는 높이 48m의 고층신전으로 거대한 목조 건축이었다. 일설에는 100m 높이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는 현실상 불가능한 높이였다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오오쿠니의 바램대로 신전 지붕위에 치기를 세웠다. 치기는 신사지붕 위에 고천원을 향해 X자형으로 세운 커다란 목재였다. 이 치기는 소도에 세운 큰 나무의 형상이었다.

 

동북아 고대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이즈모의 놀라운 고층 신전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것이다.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은 신전의 모습.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올라 당도하게 되는 신전. 그것은 다름 아니라 고대 이즈모 대사의 고층 신전이 바로 피라미드 형 구조였다는 사실이다. 동북아 신교문명에서 보면 광개토대왕릉이나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장군총 등 적석총의 형태에서 볼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신라를 바라보는 최고신】

 

그리고 궁전처럼 지어진 이 신전 안에 신체神?가 모셔졌다. 여기에는 당연히 신라에서 건너온 스사노오노미코토가 모셔져야 했지만, 스사노오의 후손인 오오쿠니누시노가미가 모셔졌다. 앞에서 보았지만, 오오쿠니는 바로 일본열도를 아마테라스 계열에 이양한 신이었다. 이 또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 정통 왕조의 시작이 야마토 왜였다는 사실을 안다면, 스사노오 보다는 국토를 아마테라스 계열에 이양한 오오쿠니를 제사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신에 스사노오는 야쿠모 산속에 소가신사(素?神社)에 모셔졌다. 야쿠모산은 이즈모 대사의 신체산이다. 소가신사는 그 속에 자그마하고 허름한 섭사攝社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어찌보면 이즈모 대사의 주객이 바뀐 감이 없지 않다. 주인공이 뒷방 노인이 되어버린 신세와 다름없어 쓸쓸함마저 느끼게 된다.

 

이즈모 대사의 신체에는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담겨있다. 그것은 신체 곧 신상神像이 앉아있는 방향이다. 이즈모 대사의 신체의 방향 곧 오오쿠니누시노가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서쪽인 것이다. 이즈모 대사의 본전本殿과 배전拜殿 건물은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이것이 신사를 조성할 때 가장 일반적인 방향이다. 그리고 보통 신사의 본전 안에 있는 신체도 남쪽을 향한다.

 

그러나 이즈모 대사의 신체는 서쪽을 향해 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지도를 펴고 신체가 바라보는 이즈모 대사의 서쪽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라. 그러면 바다와 맞닿은 곳에 히노미사키(日御崎) 언덕이 나타날 것이고, 또 그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스사노오가 고천원에서 나와 살았던 신라가 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이즈모 대사의 신체가 선조의 고향, 뿌리의 나라인 신라를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팔백만신이 모이는 10월 상달】

 

이제 그 신사의 원형을 간직한 곳, 신체가 선조의 고향 신라를 향해 앉아있는 이즈모 대사를 돌아볼 차례가 되었다. 이즈모 대사 경내로 들어섰다. 이즈모 대사는 신라에서 이즈모로 들어온 신교의 유습을 간직한 신사이다. 그리고 일본열도에 신도를 확산시킨 터전이었다. 때문에 이즈모 대사는 일본열도에 산재한 800만신의 총 본산이었던 것이다.

 

이즈모 신사에는 이를 가늠할 수 있는 널리 알려진 풍속이 있다. 신유월(神有月 가미아리쯔기)이 그것이다.

 

신들의 고향, 이즈모.

 

이즈모 대사에는 신유월이라는 특이한 기간이 있는 것이다. 곧 음력 10월 상달이 되면 일본 전역에 모셔진 팔백만 신들이 모두 이즈모로 모여든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 전역에는 각 지역의 신들이 모두 이즈모로 가 버렸기 때문에 거꾸로 ‘신이 없는 달’ 즉 신무월(神無月 간나쯔기)이 된다. 이처럼 음력 10월달은 일본 전역으로 보면 신무월이지만, 유독 이곳 이즈모 대사만은 일본 전역의 팔백만 신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신이 있는 달’인 신유월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즈모로 몰려든 신들은 이즈모 대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막부시대 이전의 기록들을 보면, 이즈모에 온 신들은 이즈모 대사의 본전 동쪽과 서쪽에 마련된 19사社에 숙소를 잡아 머무른다. 그래서 숙소는 동쪽 19사와 서쪽 19사로 모두 38개이다. 신들은 이곳 이즈모 대사에 모여 회의를 개최한다. 본사의 서쪽 방향에 있는 상궁上宮이 신들의 회의소이다. 신들은 38개의 숙소에 머물다가 회의를 위해 상궁으로 가는 것이다.

 

회의는 10월 11일부터 17일까지 7일 동안 개최된다. 7일간의 회의에서는 우선 신들이 각자 담당하는 지역에서 지난 1년간 일어난 일들을 낱낱이 보고하게 된다. 또 향후 1년간의 지역 현안을 상담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맡은 지역에서 앞으로 1년 동안 행해지게 될 모든 일들이 결정되고, 심지어 사람들 사이의 인연도 정해진다. 특히 미혼 남녀의 인연도 여기서 결정된다. 곧 남녀의 짝을 맺어주는 것이다. 때문에 오오쿠니는 일본에서 ‘인연의 신’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참으로 흥미로운 풍속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도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이다.

 

그러면 이러한 이즈모 대사의 신유월 풍속, 곧 일본열도의 신무월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나는 나름대로 하나의 답안을 제시할 수 있다. 음력 10월 상달, 이즈모 대사로 모여든 일본열도의 8백만의 신들은 과연 여기서 멈추었을까? 나는 동북아의 고대 종교문화사 곧 신교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다면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들은 여기 모여서 스사노오가 배를 타고 건너온 곳, 조상의 고향인 한반도로 건너갔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신교는 해마다 삼신상제를 모시는 제천행사를 행하였다. 따라서 고대 삼한시대에 한민족의 조상들도 10월 상달이 되면 제천행사를 열었다. 이 때 받드는 천제天祭는 하늘의 삼신상제에 지내는 제사였다.

 

그러면 왜 10월에 제사를 모셨을까? 바로 10월은 일년 중 달(月)이 운행을 시작하는 첫 달이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이러한 10월을 열두 달 가운데 첫째가는 상上달이라 하여 가장 귀하게 여겼다. 따라서 10월은 사람과 신명들이 한데 어울려 즐기는 한해 시작의 달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10월 상달에 신라와 연결된 이즈모에 몰려든 신들, 곧 일본열도에서 자신의 지역을 떠난 신들이 이즈모 지역을 통해 한민족의 천제에 참여한 것은 아닐까? 이것이 이즈모 대사의 38개 숙소에 머물던 신들이 서쪽으로 가서 회의를 열고 인간사와 신명계의 일들을 결정지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일본 내에서 이와 관련된 주장을 했던 학자가 있었다.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 도쿄대 교수였다. 그는 ‘일본 신도는 삼한 제천의 옛 풍속’(1891년 발표)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 글은 일본 고대사를 보는 적확한 판단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었다. 일본 왕실 신궁에서도 매년 10월 3일에 신상제新嘗祭(니나메사이)를 지낸다. 이런 풍속들은 모두 삼한시대 한민족이 하늘의 삼신상제를 모셨던 천제의 옛 풍속에서 왔음을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구메 교수는 일본 신도계의 강력한 반발을 받아 교수직마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모든 신사를 주의깊게 살펴보라. 어떤 신사든지 그 정문에는 고려의 개[高麗犬 고마이누]가 지키고 있다. 왜 고려의 개가 일본의 신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신궁?신사가 한반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리고 구메 구니다케의 지적처럼 삼한 제천의 옛 풍속이나 신교의 유습이 아니라면 고려의 개가 지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세 개의 도리이와 대형 시메나와】

 

신들이 몰려드는 10월, 이에 맞춰 이즈모 지역은 마쯔리(祭)를 준비한다. 소위 신맞이 축제[신영제神迎祭]로 일본열도의 팔백만 신을 맞이하는 행사이다. 동네를 청결하게 하고 음주가무를 금지하여 경건하고 정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행사는 음력 10월 10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첫날인 곧 10월 10일, 용뱀[龍蛇]이라 불리는 바닷뱀[海蛇] 크고 작은 것 다수가 해안으로 몰려들어 온다. 이즈모 대사의 서쪽에 있는 바닷가인 ‘태양의 언덕’ 곧 히노미사키(日御崎) 언덕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용뱀을 맞이하여 모신다. 그리고는 풍작, 풍어를 기리고 재난을 피하기를 기원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 용뱀들은 사람들의 인연도 가져다 준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이 정해준 인연을 받아들이려 한다. 이것이 일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용사신앙龍蛇信仰이다. 동네를 다니다 보면 대나무에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진 풍선, 곧 용뱀을 주렁 주렁 매달아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용사 곧 신을 받아들이는 신앙인 것이다.

 

이즈모 대사로 가기 위해서는 세 개의 도리이(鳥居)를 지나야 하다. 도리이는 신성한 지역의 입구임을 알리는 문이다. 그 첫 번째 도리이가 시내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본에서 제일 크고 높은 25m 높이의 도리이이다.

 

그리고 그 길로 곧바로 나아가면 이즈모 대사 경내로 들어섰음을 알리는 두 번 째 도리이가 있다. 여기를 지나면 이즈모 대사를 둘러싼 소나무 숲 사이로 길게 뻗은 길이 나타난다. 이 길을 따라 10여 분 곧바로 가면 청동으로 만든 마지막 도리이를 마주하게 된다.

 

세 개의 도리이를 지나면, 처음 마주치는 건물이 배전(拜殿)이다. 이즈모 대사를 찾는 대다수는 이 배전에 걸린 대형 시메나와(注連繩)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다른 신사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대형의 시메나와이기 때문이다. 신사를 안내하는 가이드는 관람객들의 놀라움을 보면서 의기양양하게 설명을 해댄다. 여기 걸린 시메나와의 본체는 용을 상징하고 그 아래 드리워져 있는 것은 비와 번개를 상징화했단다.

 

시메나와는 분명 고대 한반도의 신교문화에서 사용했던 ?줄, 검줄, 신줄 혹은 금줄이라 불렸던 것이다.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전에는 금줄을 내걸었다. 금줄은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여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줄이다. 신교의 유습이 남아있는 일본의 신사에도 고대 삼한의 풍속에 따라 금줄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이즈모 대사에는 그러한 일본 신사의 원형인 금줄, 곧 시메나와가 걸려있다.

 

그런데 이곳의 시메나와는 다른 곳과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크기도 비교할 수 없이 크지만, 그 형태도 대형 새끼줄로 왼 새끼줄이다. 다른 신사와는 정반대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일반 신사의 시메나와는 사전社殿에서 보아서 좌측을 상위上位로 한다. 이것은 소위 좌우존비본말론(左右尊卑本末論), 곧 왼쪽을 귀하게 생각하고 근본으로 보는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에 익숙한 참배자들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은 이즈모 대사의 정반대 형태의 시메나와를 보면서도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이처럼 일본열도에서 이즈모는 종교·정신사적으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지역이다. 보통 신사라면 배전에서 두 번 손뼉치기를 하면서 예를 표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이즈모 대사에서만은 4번을 친다. 특별한 예禮를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손뼉치기는 우리의 절하기[배례拜禮]에 해당한다. 우리는 절하기에서 재배(再拜)와 사배(四拜)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만큼 네 번 손뼉치기는 이곳의 위상을 짐작케 해준다.


【메이지 시대의 신사정리 정책】

 

그런데 19세기 중반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신도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를 국가의 공식종교[국교]로 지정하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신궁·신사를 일제히 정리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메이지 정부 4년째인 1871년 5월 14일, ‘신사神社의 의儀는 국가의 종사宗祀로 일인일가一人一家의 사유私有에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태정관 포고太政官布告 제 234호가 공포되었다. 이로써 ‘신사는 국가의 종사’라는 공적公的 성격이 정식으로 규정되면서 국가신도國家神道 시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일본정부는 신사를 일반 종교와 분리시켰다. 그리고는 신사의 모습에 국체론적國體論的(‘만세일계’의 일왕을 중심으로 백성을 신민으로 재편하여 ‘천황제 국가’ 형성을 목표로 하는 국가주의) 사상을 결합시켜 ‘국교國敎’로서의 특권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왕실의 황조신皇祖神인 아마테라스를 제사하는 이세신궁을 중심으로 신사사격제도神社社格制度를 정리한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이세신궁을 정점으로 하여 전국의 모든 신사들의 위계서열을 정리하고 이로써 국가지배 이데올로기를 형성하여 나갔다. 이즈모 대사도 이런 바람을 피할 수 없어 대사大社의 사격을 부여받았다.


【신라를 향한 히노미사키】


고대 이즈모 지역에는 국토 끌어오기(國引き) 신화가 있다. 먼 옛날 이곳 이즈모는 자그마한 나라였다. 어느 날 이 나라의 어떤 한 신이 “구름이 사방으로 퍼지는 이즈모라는 나라는 작은 나라구나. 앞으로 더 넓게 만들어야겠다.” 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여기 저기서 땅을 끌어와 이곳 해안에 붙여 나라를 넓히었다. 사키(佐伎), 요나미(良波), 고시(高志)와 같은 지역들이었다. 이들 지역 대다수는 한반도의 고구려 등에서 끌고 온 땅이었다.

 

그 중 이즈모에서 중요한 지역이 이곳 히노미사키였다. 이즈목 너무 좁다고 생각한 신은 신라에서 땅을 끌어오면서, “고금지라?衾志羅의 곶을 여분의 토지로 이으니 국토가 넉넉하구나”라고 했다. 고금지라는 당연히 ‘신라’였다. 갈대를 헤쳐 세 줄로 꼰 새끼줄로 풀을 당겨오듯 신라의 땅을 슬슬 조용히 끌고 온 것이다. “나라여 와라, 나라여 와라”하면서 이렇게 끌고 온 나라는 고즈(去豆)의 절벽에서 야호니키즈키(八穗爾支豆支)의 곶까지였다. 곧 지금의 히노미사키 언덕 일대가 바로 신라에서 끌어온 땅인 것이다.

 

이런 연유를 가진 ‘본래’ 신라의 땅을 밟으니 마치 그 옛날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몰려왔다. 물론 국토 끌어오기 신화는 그대로 믿기 보다는 여러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등대를 내려와 히노미사키 신사로 향했다. 신라에서 끌어온 땅이니만큼, 이곳은 옛 신라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이곳 신사가 자리한 뒷산이 한국산韓國山, 곧 ‘가라쿠니산’이었다. 예전에는 이 산에 신사가 있었는데 소위 ‘한국(韓國) 신사’였다. 그러나 지금 이 산 앞에는 히노미사키 신사가 들어서 이곳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아마테라스와 스사노오를 제신으로 한 두 개의 신전이 불균형스럽게 세워져 있다.


【초라한 한국신사】

 

그런데 걱정이 앞섰다. 한국신사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산 아래 아주 자그마하고 초라한 한국신사의 모습이 남아있다 했는데, 언뜻 귀동냥한 바로는 한국신사의 흔적을 지웠다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히노미사키 신사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히노미사키 신사의 옆을 돌아 한국산 앞으로 달려갔다. 자그마한 신사가 보였다. 그러나 팻말이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역시 소문대로 흔적을 지워버렸는가? 가까이 다가가 앞의 판자와 둘러친 금줄 뒤를 살펴보았다.

 

아, 있었다! 뒤편에 ‘한국신사’라는 빛바랜 팻말이 보였다.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심한 것도 잠깐이었고 곧 이어 서글픔이 몰아쳤다. 너무 작고 초라한 모습이 나를 슬프게 했다. 히노미사키 신사의 말사로 취급받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큰 신사에 딸려있는 작은 신사를 섭사攝社 혹은 말사末社라 부른다. 신사에 따라서 다수의 섭사나 말사를 가진 곳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신사도 많은 편이다. 한 예로 이세신궁의 경우는 125사의 섭사?말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이즈모 대사에도 몇 개의 섭사가 딸려 있다. 이즈모 대사의 섭사 중 하나가 뒤쪽 신체산인 야쿠모 산 기슭에 스사노오를 제신으로 모신 소가신사(素?社)이다.

 

그러고 보면 이즈모 대사나 이곳 히노미사키 신사 모두 주객이 바뀌어버린 모습이다. 이즈모 대사는 신라에서 건너온 스사노오가 주신主神이 되었어야 했을 터이고, 한국산 밑에 중심 신사는 분명 한국신사였을 터인데. 이렇게 구석진 곳에 내팽겨지듯 한 초라한 한국신사의 모습을 보니 울분감이 솟아올랐다. 제멋대로 역사를 뒤트는 이들의 모습에서 이리 저리 뜯기고 왜곡되어버린 우리역사의 참담한 현실이 생각나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감정일까?



에필로그...



일본을 이해하는 굵고 튼튼한 뿌리, 아니 일본문화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신도神道 역시 동방 한민족의 천제문화가 일본열도로 전해진 것이다. 이후 신도는 변모를 거쳐 수많은 신을 숭배하면서 인간의 불행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일본인의 정신세계의 토양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조선의 단군왕검 치세기에는 큐슈지역이 한민족으로 가득찼고, 백제 때는 수많은 백제인들이 각각의 지식과 기술을 지니고 도래하여 야마토 지역의 문화를 일구고 불교문화를 이식하여 주었다. 이렇듯 한반도를 빼놓고 일본 고대사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부산에서 맨 눈으로 쓰시마를 볼 수 있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가까운 것만이 아니다. 부산의 해안에서 뗏목을 띄우면 해로를 따라 큰 풍랑을 만나지 않고 저절로 닿는 곳이 쓰시마 섬이다. 이즈모 지역도 경북 포항과 바닷물길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고대에 이러한 물길은 문화의 고속도로 역할을 했다. 쉽게 건너갈 수 있었던 쓰시마 섬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거리에 이키섬이 있고, 이키섬을 거쳐 작은 섬들을 따라 항해하면 큐슈 북부해안에 닿는다. 한반도 남부와 동해 남부에 살던 이들은 고도의 항해술이나 조선술이 없더라도 쉽게 큐슈 북부와 이즈모 지역으로 건너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고천원에서 뿌리의 나라, 어머니의 나라인 한반도를 그리워했던 스사노오노미코도, 신라의 소시모리에서 이즈모로 배를 타고 건너간 스사노오 신화, 그리고 연오랑·세오녀 설화, 단군조선부터 백제 때까지 걸쳐 일본열도로 물밀 듯이 몰려든 한민족에 대한 역사기록들은 모두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문화 고속도로로 연결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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