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강좌

국학을 쉽고 재미있게 배우실 수 있습니다.

Home > 국학배움터 > 국민강좌

[135회 국민강좌] "전쟁국가 일본" 이성환교수(계명대학교) 2016.01.28  조회: 1930

2014(단기 4347)년 10월14일 개최된 135회 국학원 국민강좌에서

이성환교수(계명대학교)가 발표한 "전쟁국가 일본" 주제로 발표한 자료입니다.



전쟁국가 일본                   


                                                      이성환(계명대학교)




  제2차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 역사는 그 이전의 전쟁의 시대와 그 이후의 평화의 시대로 양분된다. 근대국가의 출발점인 명치유신으로부터 77년간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빈번하게 전쟁을 일으켰으며, 1945년 패전으로부터 현재까지 69년간은 세계에서 유일한 평화헌법 체제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은 ‘해석개헌’을 통해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하는 등 이전의 전쟁국가로 회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근대 일본은 명치유신이후 끊임없이 전쟁을 계속해왔다. 명치유신이후 일본은 1차대전 때까지는 10년마다, 그 이후는 5년마다 전쟁을 일으켰다. 이를 10년 주기설 또는 5년 주기설이라 한다. 일본은 왜 이렇게 빈번하게 전쟁을 일으켰을까. 이처럼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을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권력자의 의지만으로는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것은 당시의 국제환경과 함께 일본의 국가적 특질에 의해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자주 회자되는 말 가운데 “강한 것에는 덤비지 말고 복종하는 것이 상책이다(長い物には?かれろ. nagai mononiha makarero. Kings have long arms and have eyes and ears)”는 속담이 있다. 일본 사회는 힘(power, 武)의 논리가 작동,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명치유신 이전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섬이라는 폐쇄된 범위에서 무사들을 중심으로 한 봉건체제가 유지된 것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힘의 지배원리는 명치유신 이후 접하게 된 근대세계에 그대로 투영되어 일본의 국제사회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게 된다. 일본은 국가 간의 관계를 힘을 배경으로 한 상하관계 또는 지배와 피지배(침략과 식민지)의 관계로 인식했다. 국제사회는 국가 간의 ‘공존’의 장이 아니라 침략과 피침략의 장으로 여겨졌다. 힘이 약한 나라는 침략의 대상으로, 힘이 강한 국가는 편승(동맹)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전자이며. 당시 최대의 강국이었던 영국 및 독일과의 동맹(영일동맹, 삼국동맹)은 후자에 해당한다. 명치정부가 부국강병을 모토(motto)로 하여 일찍이 대만정벌과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한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본에게 있어서 근대화를 통한 부국(富國)은 강한 강병(强兵, 군사력)을 위한 수단이었던 셈이다.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일본이 군사화를 추진하는 현재의 상황도 근대일본의 부국강병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이를 바탕으로 본 강의에서는 근대일본의 전쟁역사를 검토하고, 현재 일본이 지향하고 있는 군사 국가화를 전망한다.(이하의 내용은  2010년 2월 24일 『매일신문』에 소개된 필자가 집필한 『전쟁국가 일본』을 소개한 기사이다. 본 강의는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집단적 자위권, 미일동맹강화, 한일관계 등 현재적 상황을 덧붙여 진행할 것이다). 




  『전쟁국가 일본』은 전쟁으로써 전쟁을 부양하고, 전쟁으로써 나라를 부양해온 일본의 근현대 전쟁 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분석이자, 전쟁이라는 틀로 1800년대 후반부터 1945년까지 일본을 둘러싼 국제관계를 들여다보는 책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게 전쟁(청일 전쟁, 러일 전쟁,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은 군사력으로 국가발전을 이루려는 그들의 국시 같은 것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나라를 일으키고 부를 쌓았으며, 전쟁(태평양 전쟁)을 통해 그때까지 쌓은 부를 잃었고, 또한 전쟁(6·25전쟁, 베트남 전쟁)을 통해 일어섰다.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이겼다. 두 전쟁 당시 일본은 국운을 걸었지만 청나라와 러시아에게는 국지전적인 성격이 강했다. 전쟁에 패했음에도 청나라와 러시아가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 점에서 일본은 운이 좋았다. (운 역시 실력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일본은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일본의 대(對)청나라 전쟁 승리는 군사력 차이라기보다는 정치, 사회적 근대화의 차이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신분제 폐지와 국민 개병제 등을 통해 국가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는 이른바 ‘근대적 국민’을 양성했다. 이에 반해 청국군은 자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야 하는 이유를 몰랐다. 평양전투 당시 1만 7천 명의 일본군을 맞이한 청국군 1만2천명은 밤중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싸우지도 않고, 장비와 식량을 모두 버리고 도망친 것이다. 지휘관인 이홍장 자신도 전투로 생기는 병력 손실은 곧 자기 세력의 약화로 판단했다. 청국군은 자신이 살아야 사는 것이었고, 일본군은 자신이 죽어서 나라가 살아야 자신이 산다고 믿었다. 일본이 전사자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하고 위령제를 지내는 것은 결국 ‘멸사봉공’을 가르치려는 교육인 셈이다.




  러일 전쟁은 어른과 아이의 전쟁이었으나 결과는 아이의 승리였다. 러시아의 발틱 함대는 일본 해군과 싸우기 위해 7개월에 걸쳐 북해, 대서양, 희망봉, 인도양, 중국해를 돌아 1만 6천 해리를 항해했다. 러시아군의 항로는 대부분 영국 해군의 세력 하에 있었고, 당시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은 항해하는 러시아군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1만 6천 해리를 항해하는 동안 발틱 함대는 석탄과 물의 보급, 병사들의 휴식 등을 취할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일본 해군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맹훈련을 거듭하며 발틱 함대를 기다렸다. 쓰시마 해협으로 들어왔을 때 러시아 함대는 병사들의 피로와 정비 부족으로 함포를 쏘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전투 개시 30분 만에 승패는 갈렸다. 러시아내 사회주의 발흥으로 불안해진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작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 니콜라이 2세의 안이한 대응이 낳은 결과였다.




일본의 전쟁은 경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청일 전쟁에서 얻은 배상금으로 산업 발전을 도모했고, 러일 전쟁 때는 배상금이 없었으나 조선과 만주 등 해외 시장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차 세계대전을 통해서는 엄청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또 6·25전쟁 특수로 전후 복구의 성장 발판을 마련했고, 베트남 전쟁으로 1960년대 고도성장을 구가했다.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 역시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을 점령하려는 일본은 자원 확보를 위해 동남아 진출을 원했고, 미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미국은 독일이 유럽을 장악하고, 일본이 아시아를 장악하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중일 전쟁 당시 미국이 중국을 지원했던 이유다. 일본이 중국을 공격하자 미국은 자국 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석유 수입의 4/5를 미국에 의지하고 있던 일본은 궁지에 몰렸다.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묶어놓은 다음, 동남아시아를 완전히 정복하겠다는 생각으로 진주만을 기습했다. 동남아시아를 정복해 자원을 확보한 뒤, 미국과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진주만 기습 후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수마트라 전역을 점령해 석유를 비롯한 전략 물자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어느 정도 자급자족 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을 잃는 대패로 태평양의 제해권을 상실했다. 태평양을 장악한 미국은 항공모함을 동원,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패배의 시작이었다.




이 책 ‘전쟁국가 일본’과 함께 ‘국화와 칼'(루스 베네딕트 지음)을 읽어보면 일본인의 전쟁관, 국가관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었는데, 거기에는 ‘세계를 대동아권, 유럽권(아프리카 포함), 미주권, 소련권의 4대권으로 해 전후 강화회의를 통해 지도자의 지위를 점하여 질서를 유지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일본은 다양한 국가의 대등한 공존이 아니라 1등 국가와 2등 국가, 3등 국가 등으로 위계질서를 세워야 평화롭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2010년 2월 24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8163&yy=2010#axzz3Edhb4Fs3









이전글 [제136회 국민강좌] "기독교를 넘어서 종교란 무엇인가""송상호목사"
다음글 [134회국민강좌] 한민족과 해속의 삼족오- 김주미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