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단기 4348)년 2월10일 개최된 139회 국학원 국민강좌에서
이찬구박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가 발표한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진실 " 주제로 발표한 자료입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의 진실
-신묘년기사를 중심으로-
이 찬 구 대전대 철학박사,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기획국장, 『천부경』(상생출판, 2014), 『돈:뾰쪽돈칼과 옛한글연구』(동방의빛,2012), 『고조선의 명도전과 놈』(동방의 빛, 2013) 등
1. 일본의 요코이 해석(1889년)
碑文中有大關係于我者, 辛卯渡海、破百殘新羅爲臣民數句,是也、古來漢?韓史乘、唯書我寇邊通聘, 未嘗書百濟新羅爲臣民於我, 蓋諱國惡也、此碑建於三朝鼎峙之世, 成于高句麗人之手, 故不復爲二國諱, 能使當日事實, 暴白於一千六百餘年之後, 其功可謂偉矣、明治卄一年十月 橫井忠直 識
이 碑文 中에 우리 日本과 크게 관계된 부분이 있으니 辛卯年 (AD 391)에 바다를 건너가 百濟와 新羅를 破하고 臣民을 삼았다는 몇 구절이 그것이다. 古來로 한국과 中國의 歷史書에는 우리나라(日本)가 나라의 변경을 도적질했다든가 통빙(通聘)했다는 것은 써 왔지만, 백제와 신라가 우리 일본의 臣民이라고 쓴 것은 없다. 그것은 한국과 中國이 日本을 미워하거나 혐오해서 쓰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 碑는 三國時代에 세워진 것이고, 또 고구려 사람의 손으로 써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 고구려 사람들은 百濟와 新羅 두 나라를 위해서 꺼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當時의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그것이 1600년 뒤인 오늘날에 와서 폭로되어 드러나게 되었으니, 그 공적이 가히 위대하다고 할 것이다. (명치21년 1889년 10월 橫井忠直 씀)
2. 단재 신채호의 발견
광개토경평안호태왕의 비의 단편 비문이 지금 봉천성 집안현 북 2里許에 있는 바, 長이 약 21척(6.34m)이니 滿人 榮禧가 발견하여(영희가 처음 탁본을 입수한 것은 기원 1903년)印行하매 비에 缺字가 많더니 그 뒤에 日人이 그 비를 차지하여 印行발매하여 그 缺字를 혹 석회를 도부하여 첨작한 곳이 있으므로, 학자가 그 眞을 失함을 恨한다.
3. 정인보 해석 (1930년)
사실의 모순 :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濟新羅以爲臣民이라 한 것이 決定事實이면 첫째, 廣開土王이 丙申年에 百濟를 칠 때 日本軍과 接觸없이 純然히 百濟兵과만 싸우다가 國城에 이르러 國王과 盟約한 것을 보아 百濟主權이 그때까지 依然하였음을 볼 것이니 前六年의 남에게 破降되지 아니 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정인보 「廣開土王陵碑 碑記」1930)
4. 정인보 해석2 (1955년)
『百殘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利』
“(정인보)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屬民으로 계속하여 朝貢을 바쳐왔다. 倭가 辛卯(391년)에 일찍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왔으므로 고구려는 또한 일찍이 바다를 건너가 攻略하여 서로 쳤다. 백제가 倭와 통하여 신라에 침해하였으므로 신라는 大王의 臣民으로 여기고 있는데 백제가 이를 背叛하여 신라를 침해할 수 있는가 怒하여 六年 丙申(396년)에 大王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討伐하여 新羅를 保護하였다.”
5. 북한의 박시형 (1966년)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오랜 속민들로서 이전부터 조공을 바쳐 왔다.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 왔기 때문에, 우리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가서 그들을(왜)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하고 그들을 저희 신민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대왕은 6년 병신년에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토벌하여 승리하였다.”
6. 중국의 王健群 (1984년)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 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백잔과 신라는 과거에 우리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조공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부터 왜구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서 그들을 신민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공을 받지 못해) 영락대왕 6년 병신에 호태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왕건군)
7. 이형구 (1985년)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後 以辛卯年不貢 因破百殘 (倭寇) 新羅,以爲臣民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해왔는데, 그 후 신묘년으로부터 불공하므로 (광개토대왕은) 백잔(백제) □□신라를 파하고 이를 신민으로 삼았다.
8. 삼국사기(김부식 1145년) <廣開土王>조
秋七月 南伐百濟 拔十城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391년) 가을 7월, 임금의 병사가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9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를 출동시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여 있었다. 임금이 일곱 방면으로 병사를 나누어 공격하도록 한 지 20일 만에 병사들이 그 성을 점령하였다.
二年 秋八月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創九寺於平壤
三年 秋七月 百濟來侵 王率精騎五千 逆擊敗之 餘寇夜走 八月 築國南七城 以備百濟之寇
2년(서기 393) 가을 8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하자 임금이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3년(서기 394) 가을 7월, 백제가 침략하였다. 임금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그들과 싸웠다. 살아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지역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범에 대비하였다.
四年 秋八月 王與百濟 戰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八千餘級
4년(서기 395) 가을 8월, 임금의 병사가 패수(浿水)에서 백제와 싸워 그들을 대패시키고, 8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목을 베었다.
9. 환단고기 고구려본기
一自渡海 所至擊破倭人 倭人百濟之介也 百濟先與倭密通
使之聯侵新羅之境 帝躬率水軍”(『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한번은 바다를 건너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하셨는데, 왜인이 백제를 돕고 있었다. 백제는 앞서 왜와 은밀히 내통하여 왜로 하여금 잇달아 신라 국경(강역)을 침범하게 하였 다. 이에 태왕께서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나갔다.
10. 또 다른 해석?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와 같이 단군의) 오랜 족속민(族屬民,권속민)이다. (고조선 이후) 고구려가 오래 전부터 조공관계를 유지해 왔다. (태왕으로서) 신묘년(391)에 (족속민이 아닌) 왜적이 (신라를) 내침(來侵)하므로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擊破) 하였으나 백제가 (왜적과 연합하여) 잇달아 신라의 국경(國境)을 쳐서 (자기의) 신민(臣民)으로 삼으려 하므로 영락 6년 병신년(396)에 태왕(太王)은 몸소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왜적(倭賊)과 백잔(百殘)을 토벌(討伐)하고...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王)而倭以辛卯年來. (故)渡海破. 百殘連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倭殘.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일본측의 변조조작설 제기-
재일사학자 이진희 《광개토대왕릉비의 연구》 1972.
이형구 《광개토대왕릉비의 신연구》 1985
*첨부 탁본 4348. 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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