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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회 국민강좌] "천자의나라 고구려" - 김병기교수 2016.01.29  조회: 2713

2015(단기 4348)년 5월12일 개최된 142회 국학원 국민강좌에서

김병기교수(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요하문명 유적,유물과 그변천 " 주제로 발표한 자료입니다.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


1. 고조선과 고구려의 계승문제

  중국 동북공정의 중심에 있는 ‘홍산문화’는 현재 중국에서 앙소문화, 하모도문화와 함께 중국의 3대 문명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000~3,500년에 해당하는 시기의 유적·유물이 이곳에서 발굴되고 있다. 이와 함께 하가점상층문화(기원전 2,500~1,500년)는 한국인과의 연관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경우는 우리 고조선의 청동기문화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홍산문화의 백미인 ‘우하량유적’에서는 대형 여신묘, 적석총, 옥기가 다량 출토되고 있는데 이 유적을 통해 이미 이 지역이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하고 있다고 설명되고 있다. 하가점하층문화에서 나타나고 있는 빗살무늬토기, 비파형 동검, 다뉴세문경 등의 유물은 고조선의 표지유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때문에 고조선과의 연관성이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 고조선의 영토

  기원전 8~6세기 요동반도에서는 강상무덤, 누상무덤이 발굴되었는데, 150명~60명의 순장자가 함께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강력한 세력가가 지배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 무덤들은 고조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7세기에는 고조선이 제나라와 교역을 하였다는 것이 중국 사서에 나타나고 있다.


  기원전 5세기 말 전국시대에 이미 고조선은 중국과 충돌하고 있다. 기원전 3세기 초에는 연나라 진개가 침입하여 서쪽 2,000여리를 침탈당하기도 하였는데, 이 기록은 고조선이 대동강 유역의 소국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기사로 이용되기도 한다.


  기원전 206년 한나라가 성립하여 고조선과 적대적으로 대치하게 된다. 결국 기원전 109년 고조선은 한나라와 ‘조한전쟁’을 벌인다. 세계 최강국인 한나라의 5만 군대와 1년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고조선(위만조선)의 국력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위만조선이 망한 것도 전쟁에 패배했다기 보다 위만왕조와 조선유신 사이의 내부분열에 의해 한나라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기원전 108년 한 무제는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는데, 그 설치 지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낙랑군의 위치를 난하-갈석산-장성 끝이라고 밝히는 사마천의『사기』기록을 검토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고조선은 대동강 유역의 소국이 아니라 거수국(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는 제국이었음을 중국 사서들은 밝히고 있다. 한나라의 고조선 침입도 ‘지배’보다 ‘위협’을 제거하는데 현실적인 목표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고조선 유민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조선은 한나라에 멸망당했다기보다 내부분열에 의해 스스로 붕괴했다. 그리고 승리한 한나라의 장수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고, 패배한 조선의 지배층은 모두 제후로 봉해졌다. 니계상 참은 홰청후로, 한음은 적저후로, 왕겹은 평주후로, 장은 기후로 삼았다. 최는 온양후가 되었다. 더구나 그들이 봉해진 지역은 오늘날의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들은 후에 고조선 유민들의 부흥운동에 참여했다가 처단되었다.


  그러면 옛 고조선 지역에 남아있던 고조선의 유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삼국사기』‘시조 혁거세조’에 ‘조선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며 6촌을 이루고 있었다’는 기사에 보듯이 고조선 유민들은 박혁거세가 등장하기 전 경주지역에 나누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고조선 도읍지나 그 부근에 살다가 고조선이 멸망하자 망명한 사람들일 수가 있고, 원래 경주지역에 살던 고조선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신라뿐만 아니라 만주와 한반도에 세워진 다른 고대국가들도 모두 고조선 유민들이 세웠다고 볼 수 있다.


-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했나?

  북부여의 해모수와 고구려의 주몽에 대한 고대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자. 해모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북부여조’에 나타나는데 기원전 59년 천제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웠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해모수의 아들이 해부루라는 것이다. 주몽에 대해서는 『삼국사기』‘동명성왕조’에 나타나는데,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고구려조’에서 단군과 해모수는 동일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단군은 사람 이름이라기보다는 고조선 임금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부여를 세운 해모수는 고조선의 임금이 되니 부여는 고조선의 임금 단군이 세운 것이 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본기에 이르기를, 비서갑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부루라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해부루의 부친, 즉 해모수가 단군이라는 것이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가 모두 단군과 해모수를 동일인물이라고 전하고 있는데 북부여를 세운 단군, 즉 해모수는 고조선 왕실의 후예일 가능성이 있다. 『삼국유사』‘북부여조’에 천제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한다’며 주몽의 건국을 예견하는데, 이는 주몽 역시 고조선 왕실의 후예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일연이나 이승휴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고대 사서에서 북부여왕 부루와 고구려 시조 주몽이 모두 단군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었음을 뜻한다. 곧 부여 왕실도 단군의 핏줄이고, 고구려 왕실도 단군의 핏줄이란 뜻이다. 왜 이런 기술이 나타나게 되었을까? 두 나라 모두 고조선, 즉 단군조선의 왕통을 계승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군신화의 전승은 후대로 이어졌다. 기원전 2세기 중반 산동성 무씨사당 화상석에는 환웅의 하강, 풍백·우사·운사와 지상통치, 곰족과 호랑이족, 단군탄생, 단군통치를 상징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고조선 계승의식은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나타난다. 만주 집안현에 있는 장천 1호분에는 나무아래 굴속에 곰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단군사화의 내용대로 사람이 되기 위해 마늘과 쑥을 먹으며 100일이 되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굴 바깥에는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굴을 뛰쳐나간 호랑이가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굴 밖으로 뛰쳐나간 호랑이를 기다리는 것은 말탄 무사들의 화살이다. 이는 호랑이족이 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는지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또 하나는 각저총에 나타난다. 이 벽화는 근육이 울퉁불퉁한 두 씨름꾼이 맞붙어 싸우는 왼쪽 나무 아래 곰과 호랑이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나뭇가지의 수많은 열매와 형상들은 두 부족의 싸움에서 승리한 쪽이 가질 수 있는 전리품을 상징할 것이다. 이 역시 단군사화의 내용을 가리킨다.


  고구려 말의 ‘다물’은 고토 회복이라는 뜻이다. 중국에 빼앗긴 고조선의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는 고조선 문화를 계승하고,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한다는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던 나라다.


  고조선의 유민이 신라를 건국하였으며, 또한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3국은 모두 고조선의 후예며 같은 민족적 동질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2. 고구려의 요서 경략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살펴보면 그 나라의 성격은 물론 강역도 드러난다. 고구려가 705년간 존속하는 동안 중원 대륙에는 서한, 신, 동한, 삼국, 위, 진, 남북조, 수, 당이라는 수많은 나라들이 명멸했다. 고구려는 이 수많은 나라들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우호관계를 맺어가며 나라를 지키고 강역을 넓혀갔다. 이 나라들과 고구려는 만주 서쪽을 두고 다투었기 때문에 이 나라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고구려의 서쪽 강역이 보인다.


  모본왕 2년(49) 장수를 보내 동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는데 요동태수 채융이 은혜와 신의로 대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이때 공격한 지역은 오늘날 북경 일대와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 지역이다.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 때문인지 이 사실은 우리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다. 이 기록은 『후한서』‘광무제본기 하’에도 나오는데, ‘요동 변방의 맥인이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략했는데, 요동태수 제융이 불러 항복시켰다’고 했다. 고구려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맥인이라고 쓴 것은 고구려에게 동한의 강역이 대거 유린되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고구려가 산서성 태원까지 기습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수한 기마 전투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는 기마부대를 동원해 북중국 여러 곳을 공격함으로써 동한의 혼을 빼놓았다. 이렇게 보면 요동태수의 ‘은혜와 신의’ 운운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만하지 않은가? 막대한 금전을 뜻하는 것이다. 요동태수 채융이 막대한 금전을 바치며 공격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므로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북평, 어양, 상곡 등이 공격당했는데 요동태수가 해결 당사자로 나왔다는 것은 이 지역이 당시 요동지역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태조왕 3년(55) 고구려는 요서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아 동한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성을 쌓았다는 것은 영토를 지키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요서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모본왕 2년(49)의 공격 때 요서지역까지 차지했음을 의미한다. 요서지역에는 한때 고구려의 10개 성이 있었던 것이다.


  태조왕 53년(105) 장수를 동한의 요동에 보내 6개 현을 공략했으나 요동태수 경기가 군사를 보내 대항하여 고구려가 크게 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후한서』‘고구려조’나 ‘화제본기’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태조왕 59년(111) 사신을 동한에 보내 방물을 바치고 현도군에 소속되기를 요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통감』에는 이 해 3월에 태조왕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침략했다고 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느 기록이 사실일까? 『후한서』‘안제본기 영초5년(111)조’에는 부여가 변경을 공격하고 관리들을 살상했다고 전한다. 부여까지 나서서 동한을 공격하는 판국에 고구려가 현도군에 소속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태조왕 66년(118) 예맥과 함께 동한의 현도군을 습격하고 화려성을 공략했다. 


  태조왕의 잇단 공격을 받은 동한은 반격전에 나선다.


  태조왕 69년(121) 동한의 유주자사 풍환이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동한으로서는 동북방의 전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이들은 예맥을 쳐서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아 갔다. 그러자 태조왕은 아우 수성(차대왕)에게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역습하게 하여 현도와 요동 두 군을 공격하고 적 2,000명을 죽였다. 『후한서』‘건광원년(121)조’에도 유주자사 풍환이 두 군의 태수를 거느리고 고구려와 예맥을 토벌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태조왕은 보복전에 나섰다. 『후한서』에는 예맥이 다시 선비와 함께 요동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추격하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태조왕은 동한에 대해 보복하기 위해 선비족과 손을 잡았다. 『삼국사기』에는 이에 대해 ‘태조왕이 선비 군사 8,000명과 함께 요대현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이 전사했다’며 더욱 자세히 전한다.


  이처럼 태조왕 때 고구려와 동한의 전쟁은 시종 고구려의 우세로 이어졌다. 태조왕은 69년(121)과 70년(122) 마한·예맥의 군사를 동원해 요동을 거듭 공격하는데, 이때 부여에서 오히려 동한의 편을 들어 공격하는 바람에 패전한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 고구려가 승리를 거두었다. 


  태조왕 94년(146) 요동군 서안평현을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 잡았다.


3. 고구려의 군사력


- 좌식자 1만여 명의 수수께끼

  고구려는 지리적 조건 자체가 강하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고구려의 초기 성장 자체가 주변 여러 부족은 물론 세계 최대 강대국인 한나라와 싸워 이기는 과정이었다. 『후한서』‘동이열전/고구려전’의 기록은 고구려의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기력이 있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며 …

  고구려인들이 특별히 싸움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고구려 시조 주몽은 물론 유리왕, 대무신왕, 모본왕, 태조왕 등 초기  왕들은 모두 정복군주였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끊임없이 후한의 군현들을 공격하고,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다물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부정적으로 기록한 이유는 고구려가 끊임없이 자신들과 대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는 주변의 나라들을 복속하여 그들로부터 조세를 징수하여 부족한 식량을 충당해 갔다.


  고구려의 사회구조는 농사를 짓는 일반 백성과 농사를 짓지 않는 대가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대가들이 다름 아닌 전문 전사집단이다. 『삼국지』‘위서동이전/고구려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는데, 이처럼 앉아서 먹는자(坐食者)가 만여 명이나 된다. 하호(下戶)들이 먼 곳에서 곡식·소금·생선을 운반해 그들에게 바친다.

  이들은 중국인의 눈에는 앉아서 먹는 존재로 보였지만 이들이야말로 무위도식하는 인구가 아니라 전문적인 전사집단인 것이다. 아마도 이들 전사 집단은 말을 탄 기병이었을 것이다. 이들 전사집단은 고구려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으면서 외적이 침략하면 나아가 목숨을 바쳐 고구려의 안전을 지키는 존재였다.


  고구려의 전사집단에도 문제는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 전사집단이 국가의 일원적인 군사체제에 편입된 세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조직적인 군사체제의 일원이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나부의 무력이었다. 고구려의 초기 군사조직은 계루부인 왕실에 속한 국왕 직속부대와 각 나부에 속한 군사로 이원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 5나부에 속해있던 군사들은 왕권이 강화되면서 점차 국왕의 통제권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선비족 모용씨나 백제 등과 대규모 전쟁을 치르면서 전 주민을 국왕의 일원적 통제 아래 효율적으로 통솔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경험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 고구려의 군대 체계와 전술

  황해도 안악군에 있는 안악3호분의 행렬도는 4~5세기 경 고구려의 군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기병, 보병, 궁수, 도부수, 군악대, 의장대 등 다양한 병사들의 장비와 무장을 사실대로 묘사하고 있다.


  먼저 기병은 중기병과 경기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중기병은 말과 사람이 갑옷으로 중무장을 한다. 최강의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중기병의 주 임무는 적진돌파와 적 대형의 파괴다. 오늘날의 기갑부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중기병의 단점은 기동력이 떨어지고 고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말갑옷의 무게가 40여kg, 기병의 무장이 20여kg이 넘는다. 따라서 중기병은 속도와 이동거리에 제한을 받게 된다. 또한 고비용과 전문성 때문에 중기병은 병력수의 제한을 받는다. 대체로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의 기마민족은 중국에 비해 훨씬 많고 우수한 중기병을 확보하고 있다.


  경기병의 역할은 수색, 정찰, 적진교란, 적진돌파와 대형파괴, 추격이다. 후일 유럽을 정복하는 몽골군의 경우도 경기병은 최고의 기동력과 놀라운 활솜씨로 중장기병의 돌격을 엄호하고, 적진을 초토화했다. 특히 적진의 측면이나 후면으로 돌아들면서 쏘아대는 화살은 적진을 교란시키고 대형을 무너뜨리는 가공할 효력이 있었다. 고구려의 경기병도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보병도 중보병과 경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중보병은 중기병과 마찬가지로 미늘갑옷을 입는데, 소매는 반팔이고 상의만 착용하였다. 보병 가운데서도 가늘고 긴 방패를 들고 어깨에 갈구리 창을 멘 보병이 최고의 정예부대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밀집대형을 이루며 보병부대의 최전방에 배치되어 적의 기병의 돌파를 저지하게 된다.


  경보병의 주력은 도끼를 맨 도부수다. 이들은 전혀 갑옷을 걸치지 않았다. 이들의 주임무는 길을 내거나 목책 등의 방어기구를 설치하거나 공성구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도끼는 이러한 작업에 필수적인 도구다. 전투에서도 도끼는 유용한 무기가 된다. 미늘갑옷은 창과 화살같이 찌르는 힘에는 강하지만 베거나 도끼와 같은 강한 충격을 동반한 공격에 취약하다. 이들은 중보병의 이선에 서 있다가 갈고리 창에 걸려 떨어진 기병이나 중장보병을 공격했을 것이다.  


  궁수는 어깨에 활을 메고, 허리에 전통을 찼다. 활은 기병의 활과 똑같은 맥궁이다. 맥궁은 강하고 사거리가 길기로 중국에도 소문이 났을 정도다. 궁수는 공격 때는 아군을 엄호하고, 수비 때는 돌격해 오는 적군을 공격한다. 특히 쳐들어오는 적의 중기병이나 보병을 저지하는 데는 궁수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적이 먼 거리에 있을 때는 진형의 앞에 나가서 사격하고, 적이 접근하면 이선으로 후퇴하면서 사격한다.


  옛날 전투에서 승패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형이다. 대형을 잘 유지하느냐 허물어 지느냐에 따라 전투의 승패가 갈리게 된다. 일단 대형이 허물어지거나 측면이 노출되면 대개는 싸움을 포기하고 후퇴하게 된다.


  이러한 적의 대형을 허무는 중요한 임무는 대개 기병대가 담당한다.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을 보내 밀집대형의 측면 혹은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가는 전술이다.


동양의 중기병대는 알렉산더나 로마의 기병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는데 그 비밀이 바로 안장 밑에 다는 발받침인 등자였다. 유럽에는 등자가 8세기경에나 보편화되었다. 그래서 알렉산더와 유럽의 기병은 등자없이 말을 탔다. 등자가 있으므로 기병들은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으며, 어떠한 자세로도 화살을 날릴 수 있었다. 유럽의 기병들이 돌격해서 창으로 직접 찌르지 못하고 근접하여 창을 적에게 던지는 것도 등자가 없어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 달리며 활 쏘는 기술을 기사(騎射)라고 한다. 무용총 수렵도에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장면이 있다. 이 그림을 보면 말을 탄 용사는 앞으로 사격을 하기도 하지만, 몸을 뒤로 돌리고 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을 유럽에서는 파르티아사법이라 불렀다. 이 파르티아사법 역시 등자 덕분에 가능했다. 등자를 몰랐던 유럽의 기사들은 말 달리며 활을 쏘는 동양 기병대의 솜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더욱이 몸을 뒤로 돌려 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몽골군과 싸워 본 유럽인들은 몽골군이 달아날 때 절대로 쫓지 말라고 경고했다. 달아나다가 몸을 돌려 날리는 화살의 위력에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4세기경까지 삼국 가운데 고구려가 병력·무장·전술운영 능력 면에서 앞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군의 힘의 우위는 이 시기 건축한 임진강·한강 유역의 고구려 진지가 주로 공격 위주의 소규모 보루들이라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백제나 신라지역의 산성은 요새화된 방어성의 형태였던 것이다.


4. 연개소문의 비도술


  사서들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등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는 ‘연개소문이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중국의 여러 경극(京劇)들은 전혀 다른 이유가 있음을 말해준다.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 가운데 ‘독목관(獨木關)’이 있는데 여기에서 연개소문은 ‘날아다니는 칼(飛刀)’, 곧 비도술을 사용하는 장수로 묘사된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전통무술인 비도술의 전수자이기 때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한국에서는 왕을 시해한 무도한 인물로 묘사되었을 때 중국에서는 경극으로 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활발하게 전승되어 왔다. 송원(宋元) 대 민간 문학인 「설인귀정료사략」(설인귀가 요동을 정벌할 때의 일들)이 그것으로 연개소문과 당태종, 설인귀가 주인공이다. 물론 중국에서 만든 이런 사화나 경극은 설인귀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여기에서도 정관 18년(645) 당태종의 고구려 침공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도전해오자 직접 출정했는데, 그 전날 밤 연개소문에게 포위되었다가 흰색 도포를 입은 소년에게 구출되는 꿈을 꾼다. 당태종은 실제 전쟁에서 연개소문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는데 흰옷을 입은 설인귀가 나타나 구해준다는 내용이다.


  설인귀는 지금의 산서성 직산현인 강주 용문 사람으로 무술이 뛰어나고 활솜씨도 천하무적이었다. 그러나 평민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출세를 못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고구려 원정이 발표되었을 때 그는 부모의 상중이었는데, 부인이 이번 기회에 한 번 출세해 보라고 등을 떠밀어 입대시켰다. 당나라 장수 유군앙이 고구려군에 포위되었을 때 달려가 고구려 장수를 베고 구출한 것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한 설인귀는 안시성 싸움 때 백의를 입고 출전해 공을 세워 당태종으로부터 많은 재물과 유격장군을 제수받았다.


  이런 설인귀가 연개소문의 맞수로 등장하며 끝내 승리하는 영웅으로 그려지는 것은 빈천한 곳에서 장군이 된 그의 이력이 중국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남의 눈에 띄기 위해 일부러 흰옷을 입고 출전한 담력도 민중들의 사랑을 받을 만했기 때문에 민간소설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끌었다.


  설인귀의 ‘신통력 있는 화살’, 즉 신전(神箭)과 맞붙는 것이 연개소문의 ‘날아다니는 칼’, 즉 비도술이다. 비도는 일부 전통무예 연구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하던 검이나 도를 던지는 고구려 특유의 비도술, 또는 비검술의 실상이다. 연개소문이 비도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출중한 무술 실력 때문이다. 작은 단도가 아니라 웬만한 사람 같으면 한손으로 들기도 어려울 묵직한 칼을 던진다는 것은 여간한 완력과 무술 실력을 갖지 못하면 상상할 수 없는 가공할 무기인 것이다. 옛 전투에서는 장수끼리 맞서 싸우다 승부가 나면 그것으로 전투가 끝나는 경우가 아주 많았는데 창이나 칼을 가지고 덤빈 중국 장수들은 열이면 열 비도술을 구사하는 고구려 장수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창이나 칼이 닿기도 전에 묵직한 칼이 번개처럼 목을 관통했거나 갑옷도 뚫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문학에는 연개소문의 비도와 설인귀의 신전이 싸우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추네


  화살과 비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적하네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네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보배가 대적하니


  두 장수 모두 신통력으로 겨루네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에 나오는 ‘분하’나 ‘어니하’라는 지명도 주목해야할 지명이다. 분하는 오늘날 산서성 태원을 가로지르는 강이고, 어니하는 황토강, 즉 황하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분하나 어니하가 중요한 것은 연개소문이 패주하는 당태종을 당나라 내륙 깊은 지역까지 추격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깊숙한 곳까지 가서 당태종 이세민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많다. 단재 신채호는 당나라 때 소설 「규염객전」의 주인공을 연개소문으로 보았는데,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규염객은 부여국 사람으로 중국에 와서 태원에 이르러 장수 이정과 교분을 맺고 그의 처 홍불지와는 남매의 의를 맺었는데 그 목적은 중국의 제왕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 고조 이연의 아들 이세민을 만나보고는 그 기세에 눌려 이정에게 중국의 제왕이 되려는 계획을 단념했음을 고하고 귀국해서 난을 일으켜 부여국 왕이 되었다


신채호는 ‘부여국은 곧 고구려요, 규염객은 곧 연개소문이라 한다. 연개소문이 중국을 침략하려 하여 그 국정을 탐지하기 위하여 일차 서유(西遊)한 것은 사실이다’라면서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만났다고 유추하고 있다.


  단재는 「규염객전」외에 「갓쉰동전」의 갓쉰동도 연개소문으로 파악하고 있다. 갓쉰동 역시 적국 달딸국으로 잠입해 달딸국왕과 그 아들 등을 만나는데, 단재는 달딸국은 당나라이며 국왕의 아들은 이세민이라는 것이다.


  단재는 『독사신론』에서 ‘연개소문이야 말로 우리 4000년 역사 이래 제일로 꼽을 영웅’이라고 극찬했으며, 『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곧, ‘연개소문은 첫째 고구려 전통의 호족공화(豪族共和)라는 구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둘째 장수왕 이래 철석같이 굳어온 서수남진(西守南進) 정책을 변경해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으며, 셋째 이를 위해 국왕 이하 대신 호족 수백 명을 살해해 자신의 독무대로 만들고 당태종을 격파해 중국대륙을 공격했으니, 그 선악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인물이었다’는 것이다.


5. 고구려인의 천하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우리 고대사에 대해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지만 중국 자료에 의존한 결과 우리의 사상과 천하관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중국의 역대 조정에 조공한 기록은 자세한 반면 고대 한국인들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던 중 고구려인들이 직접 비문을 작성한 광개토태왕릉비가 1880년대에 중국 집안현에서 발견되어 고대 한민족의 세계관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광개토태왕릉비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모두루묘지도 발견되어 우리는 단편적이나마 고구려인들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자료를 갖게 되었다.


  광개토태왕릉비와 모두루묘지에는 천하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두 금석문에 나타난 고구려인들의 천하관은 놀랍게도 자신들을 천하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는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해 조공관계를 자세하게 기술한 『삼국사기』의 세계관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과연 고구려의 천하관과 중국의 천하관은 어떻게 같으며 어떻게 다를까?


  광개토태왕릉비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에 있는 높이 6.39m의 거대한 응회암으로 조성된 비석이다. 비문은 당시 유행하던 예서체의 글씨로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넘쳐나 강인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잘 보여준다. 비의 네 면에 새긴 글자 수는 원래 총 1,775자이지만, 탈락되었거나 마모되어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141자 있어서, 이 글자들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국, 일본, 중국, 북한 사이에 아직도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능비는 광개토태왕이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414년 아들 장수왕이 위대한 정복군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이 비는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 고대사의 많은 부분을 보완해 주는 일차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비문 내용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고구려 시조 추모왕의 신비스런 출생과 건국 이야기, 왕가의 내력, 호태왕의 치적, 비를 세운 목적을 간단히 기록했다. 둘째 부분은 호태왕이 정복사업을 벌인 이유와 과정, 결과를 열거했는데 바로 이 부분을 둘러싸고 각국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복의 결과 거란과 백제를 정벌했고, 신라에 침범한 왜를 격퇴시켜 신라를 구했으며 동부여 등을 멸망시켜 정복한 지역이 모두 64성 1,400촌이었다는 내용이다. 셋째 부분은 왕릉을 관리하는 묘지기에 대한 규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런데 비문은 고구려가 천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혀 주목받고 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중국의 남북조 왕조에 조공을 바친 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반면, 광개토왕릉비는 이런 사실은 일체 기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천하의 주인공임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은 첫머리부터 당당한 선언을 하고 있다.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창업하신 터다. 왕은 북부여에서 오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셨는데 …


  천제란 천하의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적인 존재인 천신을 뜻하는데, 추모왕이 천제의 아들이니 곧 황제를 뜻하는 천자인 것이다. 추모왕의 어머니를 낳은 하백은 물의 신을 뜻한다. 곧 추모왕의 아버지는 하늘의 신이고, 어머니는 물의 신을 이었으니 그 아들인 추모왕이 천하의 주인임은 당연하고 이런 성스런 왕통을 이은 고구려왕이 천자인 것 또한 당연하다.


  비문은 이처럼 능비의 주인공인 광개토태왕이 시조 추모왕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지는 신성한 왕통을 계승했음을 상기시키면서 호태왕의 탁월한 업적으로 이룩된 고구려의 영광과 평화를 과시하고 있다. 또한 왕릉의 묘지기에 대한 규정을 선포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탄탄하게 보장받으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비문의 제1면 5행에 ‘영락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대왕의 위업은 사해에 떨쳤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광개토태왕이 사해, 곧 천하의 지배자임을 과시한 말로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국이라는 고구려인의 천하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런 표현은 광개토태왕릉비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길림성 집안현 하양어두 근처의 하해방촌에 있는 모두루묘지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모두루는 광개토태왕 때 북부여 방면에서 지방관으로 있던 인물인데, 그의 묘지에서 발견된 묘지문의 첫머리도 광개토태왕비문 만큼이나 당당하다. 


  하백의 손자이며 일월의 아들인 추모성황은 원래 북부여에서 오셨으니, 천하 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운 곳임을 알 것이다.


  ‘천하 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운 곳임을 알 것이다’라는 구절은 당시의 고구려인들이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국이라는 사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인들은 이런 사상에 따라 고구려를 중심으로 천하의 모든 국가들이 고구려에 복속되거나 복속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천하관은 중국의 춘추시대에 나타나서 전국시대와 진한 대를 거치면서 일정한 내용을 갖춘 정치적 개념으로 정립되었는데, 이는 중국의 왕조들이 정치적·군사적·문화적 우월성을 배경 삼아 동아시아 한자문화권 내의 여러 나라로 전파시켰다. 이를 ‘중화사상’이라 하는데, 중국인들은 이런 천하관에 따라 자신들을 중화(中華)로 격상시켜 인식하면서 주변 여러 나라와 민족들을 오랑캐로 격하하였다. 중국이 주변 이민족들을 남만, 북적, 서융, 동이라면 사이(四夷)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을 중국인이 규정한 ‘동이’가 아니라 ‘천하의 주인’으로 인식했다. 중국 역대 황제들이 써온 천자라는 말을 시조 주몽부터 ‘천제의 아들’이라고 사용한 것이 이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고구려인들의 이런 천하관은 광개토태왕비와 모두루묘지 뿐만 아니라 중원고구려비에도 하늘을 지킨다는 뜻의 ‘수천(守天)’이란 용어로 나타나 있다.


  고구려인들은 만주와 한반도의 주변국을 자신의 천하관 아래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능비에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으로 고구려에 조공해왔다’, ‘동부여는 추모왕의 신민이었다’라고 기록했듯이, 고구려는 자신의 인접 나라들을 조공국으로 간주한 것이다.


중원고구려비에 신라를 ‘동이(東夷)’ 라고 기록하고 신라왕을 ‘매금(寐錦)’으로 부른 것은 고구려의 천하관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고구려의 천하관은 중국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의 천하는 고구려왕의 지배력이 실질적으로 미치고 있거나 미쳐야 한다고 여기는 범위의 지역이다. 중국의 천하는 하늘 아래의 모든 세상을 뜻하는데, 고구려인들은 이 천하가 몇 개의 지역권으로 구성되었다고 인식했다. 고구려는 몇 개로 나뉜 지역권 중 하나의 중심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요컨대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와 몽골 지역의 국가와는 병존책을 추구하고, 자신의 세계라고 여긴 동북아시아에서는 패군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능비에 나타난 ‘호태왕’이란 표현은 고구려의 임금을 백제나 신라 등 인접국의 왕보다 위에 있다는 의도적인 표현이다. ‘태왕’은 보통 왕들보다 등급이 높은 표현으로 중국 임금들이 다른 나라의 왕들을 제후라고 표현하며 자신들은 황제라고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다. 같은 황제라는 표현 대신 태왕이라고 자칭한 것은 유목민족이 그 최고 권력자를 ‘선우’라 부르면서 ‘왕중 왕’을 표현한 것과 같은 의미며 고구려의 독자적인 자부심이었다.


  신라처럼 고구려에 복속하지 않고 저항하는 백제를 ‘백잔(白殘)’이라고 부른 것도 중국이 주위 나라들을 동이나 남만 등으로 부른 것과 마차가지 표현이다. 고구려인들은 이런 천하관에 따라 동북아 지역 인접 국가들과의 관계를 조공관계로 규정하고, 하늘의 후예인 고구려왕은 이런 국제질서를 담당하는 주체로 자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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