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단기 4348)년 6월9일 개최된 143회 국학원 국민강좌에서
정경희교수(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조선후기 사회와 정조의 단군사상 " 주제로 발표한 자료입니다.
18세기 모두가 안주한 ‘조선중화주의’의 한계를 직시한 임금, 정조
정조대왕, ‘제천祭天’을 꿈꾸다.
정경희(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교수)
목 차
1. 양란(왜란?호란)과 민족적 각성
2. 민족적 각성의 두갈래 길, ‘기자’와 ‘단군’
3. 정조의 길, ‘단군’
4. 정조의 한국선도 전통 수용과 단군의 위상 제고
5. 원구단 제천 기능의 회복
6. ‘조선중화주의’의 한계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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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란(왜란?호란)과 민족적 각성
한국고대 이래의 전통사상인 ‘한국선도韓國仙道’는 삼국시대 이래 불교와 습합되기 시작하였는데, 고려시대에 이르러 선仙·불佛 사상 이외에도 현실적인 통치체제의 정비와 운영을 위해 유교이념이 적극 도입되었다. 특히 여말선초의 시기에는 성리학이 도입, 조선 건국의 이념적 지주가 되어 주었다. 조선 건국초기인 15세기에는 왕조개창이라는 변혁의 와중에서 성리학은 형식적인 이해에 그쳐 기존의 사상, 곧 선도, 불교, 중국도교 등과 공존하였으나 점차 조선사회가 안정되고 또 성리학을 전공한 새로운 지식층인 사림이 성장하면서 학문적 이해가 심화되어 갔다.
조선건국후 약 2백 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 양란(왜란과 호란)으로 조선사회는 뿌리부터 흔들리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양란을 거치면서 강렬한 민족적 각성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각성에 바탕하여 양란의 후유증을 극복해야 하는 당면 과제를 안게 되었다.
2. 민족적 각성의 두갈래 길, ‘기자’와 ‘단군’
민족적 각성에 바탕한 양란의 후유증 해결의 과정에서 성리학을 위시한 기성의 사상들은 새롭게 반성되기 시작하였는데, 본고에서는 크게 두 측면에 주목해 보았다. 첫째 기존의 성리학 이념이 양란 이후 각성된 민족의식과 맞물려 더욱 강화된 측면과, 둘째 성리학 이념과 대척적인 고유의 선도 전통이 주목된 측면이다.
양측의 차이는 특히 역사인식 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첫째 성리학 이념을 강화하는 방식은 유교문화의 상징인 ‘기자箕子’의 전통을 강조하는 ‘정통론적 역사인식’으로 드러났으며, 둘째 고유의 선도 전통에 주목하는 방식은 ‘단군’을 강조하는 ‘선도적 역사인식’으로 드러났다.
양란 이후 민족적 각성을 통한 양란 후유증의 해결이라는 지상과제가 설정되었고, ‘성리학 이념의 강화’ 및 ‘선도 전통에 대한 주목’이라는 양대 방향으로 과제 해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면 17세기 후반·18세기, 숙종~정조대에 이르러 그 과제는 일단락되었다.
조선후기의 가장 영명한 3명의 군주인 숙종·영조·정조에 의하여 조선사회는 재조再造, 후기적인 안정과 번영을 이루어 내었기 때문이다. 이러하다면 이들 3명의 군주들은 양란 이후의 성리학 이념의 강화 및 선도 전통에 대한 주목이라는 양대 방향성을 어떻게 조정하고 어떠한 접합점을 찾아내었던 것일까?
양란을 통한 민족적 각성은 성리학 이념을 강화하는 방식 또는 성리학과 대척적인 고유의 선도 전통을 강조하는 방식과 같이 전혀 상반된 방식으로 드러났다. 이중 성리학 이념을 강화하는 방식은 역사인식 면에서 유교문화의 상징인 ‘기자’의 전통을 강조하는 정통론적 역사인식, 곧 ‘기자마한정통론’으로 드러났으며, 고유의 선도 전통을 강조하는 방식은 ‘단군’을 강조하는 ‘선도적 역사인식’으로 드러났다. 특히 17세기 후반 숙종대 이후 성리학의 정통론적 역사인식이 가장 강화되던 시기에 선도적 역사인식도 덩달아 부각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사상이 극도로 강화될 때 이에 대한 반성적 사유 또한 강화되는 현상으로 해석된다.
숙종대 이후의 국왕들의 ‘기자’ 및 ‘단군’ 인식에서 이러한 경향이 확인되고 있는데, 특히 숙종이나 영조는 ‘기자’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으로 ‘단군’에 대해서도 새롭게 주목하는 모습을 보였다.
3. 정조의 길, ‘단군’
반면 정조는 그간 높아질 대로 높아진 ‘기자’의 위상은 차치해 두고서 오히려 단군에 주목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조는 성리학국가의 국왕으로서 국가이념인 성리학을 일차적으로 준거삼으면서도 치열한 학문적 연마를 통하여 성리학의 원류인 육경고학六經古學의 근원적 가치를 중시하였고 더하여 유교 외에도 불가나 도가 전통까지도 포용하는 개방적인 삼교관三敎觀을 보였다. 이러한 개방적 삼교관에 따라 중국도가 전통을 포용하며 직접 조식調息 수행까지 행하였는데, 정조의 이러한 면모는 중국도가와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지닌 한국선도 전통을 포용하게 하는 학문적 바탕이 되어 주었다.
4. 정조의 한국선도 전통 수용과 단군의 위상 제고
정조는 선도제천仙道祭天의 전통을 긍정하고 한국선도의 으뜸 경전인『천부경天符經』까지도 인식하는 등 고유의 선도 전통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에 토대하여 단군묘檀君廟(숭령전崇靈殿)·삼성사三聖祠에 대한 지속적인 치제와 관심, 단군묘檀君墓 수치修治, 삼성사三聖祠 제품祭品·제의祭儀 정비 등의 방식으로 단군의 위상을 제고하였다. 숙종이나 영조가 기자의 위상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단군에 대해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하였다면 정조는 특히 단군에 대한 관심을 확대 계승하여 단군의 위상을 제고한 것이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양란 이후 민족적 각성을 통한 양란 후유증의 해결을 위하여 ‘성리학 이념의 강화’ 및 ‘선도 전통에 대한 주목’이라는 양대 방향이 설정되었다면, 숙종 및 영조, 또 정조의 기자 및 단군 인식을 통하여 처음에는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다가 점차로 선도 전통이 주목되어 갔음을 알게 된다.
5. 원구단 제천 기능의 회복
조선초 유교의 도입 이후 제후는 제천할 수 없다는 유교례 논리에 따라 조선은 원구제에 대한 폐치를 반복하였고 결국 세조대 원구제가 폐지되었다. 이후 천제 원구제의 빈자리를 천신제天神祭인 풍운뇌우제風雲雷雨祭로 대신하려는 문제의식이 나타났고 점차 풍운뇌우제에 원구제의 의미가 부여되어 갔다.
조선후기 주자예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로 제후는 제천할 수 없다는 유교례 원칙이 더욱 강조되면서 풍운뇌우제의 의미가 약화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전기 왕실이 풍운뇌우제에 부여했던 의미는 어느덧 잊혀졌다. 그럼에도 조선초 이래 풍운뇌우제에 부여된 내밀한 의미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8세기 조선의 국왕 정조의 경우가 그러하다.
정조의 유교 원구제 기능의 회복을 위한 노력은 유교 제천 전통과 함께 선도 제천 전통에 대한 이해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미 원구제가 폐지된 지 수세기가 흘렀고, 원구제의 대안으로 주목된 풍운뇌우제의 의미조차 잊혀진 시점에서 유교 제천을 회복하려는 발상은 다소 특이하게 여겨진다. 조선후기 주자예학을 중심으로 유교례가 더욱 공고하게 조선사회에 뿌리내려 있는 상황에서 시대추세를 거스르는 발상을 하였을 뿐아니라 이러한 발상을 구체화하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정조가 유교적 사유에 고착되지만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러할 때 정조가 선도 제천 전통을 긍정한 부분에 주목하게 된다.
무엇보다 정조는 선도仙道 제천 전통을 고유의 전통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단군조선이 중국에 제후국으로 신속臣屬하지 않았으므로 단군조선의 제천은 참람한 예가 아니며 오히려 자주성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는 조선전기 이래 일부 유교 지식인의 입장이기는 하였지만, 조선후기 유교적 역사인식이 강화된 시점에서는 더욱 보기 드물어진 견해였다.
정조는 선도 제천의 전통을 긍정한 연장선상에서 비록 이와 계보를 달리하지만 유교 제천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하였으므로 선초 원구제가 폐기된 사정이나 자신의 당대에 원구제를 다시 복구하기 어려운 사정을 잘 이해하면서도 유교 제천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결국 정조는 성리학 국가의 국왕으로서 유교례 원칙을 준수하면서 유교례 체제내에서 원구제 회복을 모색, 천신제天神祭인 풍운뇌우제를 원구에 비정하고 지제地祭인 사직 기곡제를 강화함으로써 유교 천제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6. ‘조선중화주의’의 한계 인식
이러한 변화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정조가 선도 전통이나 단군에 주목하였던 데에는 개방적 삼교관과 같은 학문적인 배경도 자리하고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성리학 이념의 강화’라는 방식이 갖는 민족적 한계를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후기적인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양란 이후의 처절한 ‘민족적 각성’이었다고 한다면 ‘성리학 이념의 강화’라는 방식은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로 개념화되듯이 조선이 계승하고 있는 중화中華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의 자존의식을 회복하고 조선후기사회를 재조再造하는데는 기여하였지만,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 진정한 민족적 각성과는 큰 거리를 보였던 점 또한 분명하였다. 전형적인 성리학자들과 달리 조선의 국왕으로서 누구보다도 이러한 문제점을 민감하게 느꼈을 정조로서는 성리학 이념이라는 공식적인 노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선도 전통이나 단군을 강조, 성리학 이념의 한계를 메워가려는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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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희,2003「정조의 의리론에 대하여-사도세자 문제를 중심으로」『한국학보』110
정경희,2004「정조의 예학」『한국사론』 50 서울대 국사학과
정경희,2005「한국의 제천 전통에서 바라본 정조대 천제 기능의 회복」『조선시대사학보』34 조선시대사학회
정경희, 2007「정조의 한국선도 인식과 단군의 위상 제고」『조선시대 문화사』하 일지사
정경희, 2009「한국선도와 ‘단군’」『도교문화연구』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