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문:
기존의 고구려-발해말갈-몽골에 관한 견해
II. 본론:
1. 칭기스 칸 선조가 나온 ‘에르게네 콘’ 이야기
2. 두 사람의 생존자 키얀과 네쿠즈, 곧 일하(壹夏)의 아들 '간(澗)'과 도리행(都利行)의 아들 '님금'
3. ‘키야트’는 ‘클(乞)’ 씨, 곧 “대(大)’씨라는 뜻
4. “텡기즈 콘”은 ‘진국공’ 대야발
5.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은 사실은 당-신라 대 발해 사이의 대전쟁
6. 발해 大씨는 “퉁구스족”이 아니라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7.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과 발해에 대한 배신행위
8. 기존 학계의 관점과 다른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9. 모든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고향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바로 발해 서경(西京) ‘압록강-나(의)-군’
10. 원태조 칭기스 칸과 금 태조 아골타의 공통 선조 대야발 4세손 금행(今幸)
11.“황금항아리” “금행”의 발해 실지(失地) 회복
III. 결론
-역사가 되풀이된다면 우리가 할 일은?
I. 서문:
기존의 고구려-발해말갈-몽골에 관한 견해
칭기즈 칸(1162~1227년)이 세상을 떠난 지 한 세대가 조금 지난 1260년경의 일이다. 페르시아인 사가(史家) 주바이니(Ata^-Malek Juvayni·1226~1283)는 《세계정복자사(Tarikh-i Jahangushay-i)》라는 사서(史書)를 지었다. 이 책에서 그는 칭기즈 칸에게 역사상 그 어떤 이도 쓰지 않았던 ‘세계 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다. 2004년 미국의 역사가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현대세계를 창출한 칭기즈 칸(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이라는 책에서 칭기즈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나아가 1995년 21세기의 새로운 “밀레니엄(천년)”의 도래를 앞두고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가 20세기까지 지난 천 년 간의 역사 속에서 최고의 인물로 칭기스칸을 선정했다. 이 위대한 업적을 이룬 칭기즈 칸의 선조는 누구일까?
1240년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비사(蒙古秘史)》를 보면, 칭기즈 칸에서 위로 10대(代)를 올라가면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룬 고와가 나온다. 그녀에서 다시 10대를 더 올라가면 부르테 치노가 나온다. 우리는 이 부르테 치노가 당연히 몽골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칭기즈 칸과 그의 조상 역사를 기록한 《몽골비사》는 책 이름을 단지 《몽골사》나 《칭기즈칸사》라고 하지 않고 왜인지 ‘비밀스러운’이라는 말을 붙여 《몽골비(秘)사》라고 한다. 그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의문 때문에 필자는 이 글을 썼다.
그 결과 필자가 알게 된 결론은 바로 이 책이 칭기즈 칸 선조의 ‘비밀’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 비밀은 놀랍게도 칭기즈 칸의 직계 시조는 발표자의 저서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권-칭기스 칸 선조의 비밀스런 역사, 비봉출판사, 2015년》과 동서의 《2권》을 통해서 자세하게 밝힌 바와 같이, 발해(渤海)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칭기즈 칸은 그의 19대손(代孫)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의 비밀은 첫째 칭기즈 칸이 ‘칸(=왕=황제)’이 되기 전 어릴 적 이름 ‘테무진’이다. 이 이름을 두고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터무르-진”또는 “데미르-친”, 곧“철인(鐵人)”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 이름은 <원사>의 “태조기”가 보여주듯이 대무신(大武神), 곧 고구려 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테무진의 가족과 자신이 칭기스 칸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손임을 주장한 것이다.
둘째 이유는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몽골어나 투르크에 그런 비슷한 낱말조차도 없는데, 이 칭기스 칸이라는 말의 뜻을 “왕중 왕” 또는 “가장 위대한, 강력한 왕”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 주류학계의 견해와는 전혀 달리 이 칭기스 칸이라는 왕호는 발해 고왕 대조영과 그 아버지 걸걸중상 등의 호칭이었던 ‘진국왕(震國王)’또는 ‘진국공(震國公)’의 옛 소리인 ‘텡기즈 콘(Тenggiz khon=팅기즈 칸=팅궤트 칸)’에서 나온 것이다. 칭기스 칸의 손자 원세조 쿠빌라이 때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자신의 <동방견문록>에서 25회나 칭기스 칸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 가운데 딱 한 번만 제외하고 24번을 “칭기 칸”이라고 쓴다. 왜일까? “친기 칸”은 바로 원대 남인(南人)의 말로 “진국왕”이라는 소리이다. 곧 칭기스 칸은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뜻이다. 이는 곧 ‘세계 정복자’ 칭기즈 칸은 자신의 이름과 칭호를 통해 자신이 고구려 대무신왕의 후예이자, 발해국왕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자처한 것이다.
셋째 이유는 “몽골”이라는 종족칭 및 국명이다. <타리히 고지데(Tarikhi Gojide, 선별된 역사)>가 밝히듯이 칭기즈 칸은 자기 당시까지는 이름도 없던 그 땅의 여러 부족들을 통일하고 오늘날 “몽골(몽골리아)”라고 부르는 자신의 나라 이름을 처음으로 “몽골”이라고 붙이고, 자신의 종족을 ‘몽골’이라고 칭한 까닭은 무엇인가?
오늘날 학자들은 이 말을 보통 송나라인들의 기록 <흑달사략(黑?事略)> 등에 따라 “멍거(은, 銀)”라고 하는 몽골어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칭기스 칸 자신과 자신의 종족이 “몽골”이라고 그가 이름 붙인 이유는 그 말이 바로 발해-말갈이라는 ‘말갈(靺鞨)’, 곧 고구려-말갈어로 “말/몰(馬)키우는 마을, 고을”을 뜻하는 ‘말골(馬忽)/몰 고을’이라는 말이다.
테무진(대무신), 칭기 칸(진국 왕), 몽골(말골)이 바로 그가 고구려-발해인의 후손임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언어학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이상의 결론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문헌사학적 자료이다. 필자가 중앙아시아에서 획득한 한 중.고대 사서 <사국사(Arba’Ulus Tarikhi)>와 <집사>, <투르크의 계보(Shejerei Atrok)> 등에는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가 나온다. 이는 지금부터 705년가량 전 라시드 웃딘이 자신이 찬술한 방대한 사서 <집사>에서 말한 그 사라진 <황금의 책(Altan Daftar)>의 삽입판들인데, 그것은 놀랍게도 바로 칭기스 칸 가문의 선조를 밝힌 족보이다.
황금겉장으로 입힌 진국왕(震國王) 대조영과 대야발의 후손의 <황금의 책>, 족보
발표자는 이 족보의 계보를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 <고려사>, <요사> 및 <금사> 등 여러 동방사서와 대조, 교차하여 연구한 결과 그 계보 속에서 칭기스 칸은 놀랍게도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반안군왕 대야발의 제19세손임이 드러난다.
결국 “몽골제국”은 조선반도의 우리민족과 함께 사라진“말갈”의 나라, 곧 “발해왕국”의 계승자였던 것이다! 918년에 발해가 망한지 어언 1000년 중 3년이 모자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 와서 밝혀진 놀라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역사적 진실이 발견되었다. 오늘날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를 비롯하여, 국사편찬위원회, 동북아역사재단, 한국학중앙연구원 등 소속의 우리 주류 국사 학자들은 “말갈”을 이른 바 “퉁구스족”이라는 “말갈족”으로 부른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갈”이 우리 조선민족의 선조인 “고구려인”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심지어 국사교과서에서조차도 “발해는 지배층 고구려인과 피지배층 말갈인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서술하고, 송기호 교수 등 일부 주류학자들은 “발해는 퉁구스족 말갈족이 만든 나라이므로 고구려적 요소를 빼면 발해사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만주사”라고까지 보고 있다.
나아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른바 “동북공정”을 저지하라는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알려진 “동북아역사재단”은 왜 스스로가 인터넷에서 쓴 대로 “『구당서』의 ‘고려별종’이 바로 대조영과 그 건국주체가 고구려 유민”인지 제대로 밝히지도 못하고 그렇게 동어반복적으로만 되풀이하면서, 발해를 세운 “말갈”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모른 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상의 동북공정에서 보이는 중국 중심적 발해 인식을 우리의 시각과 대비시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학계는 발해를 당나라 시기 말갈인, 즉 중국 고대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 한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 멸망이후 고구려유민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고구려 계승국이다. 『구당서』의 ‘고려별종’이 바로 대조영과 그 건국주체가 고구려 유민임을 나타낸다. 또 일본에 보낸 발해국서에도 고구려의 옛 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전통을 이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명기한 것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동북공정은: 필자 보충] 발해 건국 초기의 정식 국호는 “말갈”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 사료에 엄연히 ‘진국’이 초기 국명으로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해석의 오류다.”
동북아역사재단은 발해의 건국주체가 “말갈”이라는 동북공정의 논리에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구당서』의 ‘고려별종’이 바로 대조영과 그 건국주체가 고구려 유민”이라고만 하는 정도의 엉성하고 취약한 논리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의 건국주체는 동북공정이 말하듯이 분명히 “말갈”이다. 또 우리측 학계가 동북공정측이 말하는 “말갈”에 대항해서 발해의 건국 주체가 “고구려인”이라는 것도 분명히 옳다. 그렇다면 양측은 다 옿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왜 양측은 자신들의 논리로 서로 상대방에게 대항하고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양측은 다 “말갈”이 바로 “고구려”와 거의 같은 말임을 모두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곧 좀 더 자세히 말할 것이나, 중화인민공화국과 우리 학계 사이의 이 논쟁에 관한 발표자의 견해를 한 마디로 표현해 보자. 발표자가 <무경총요>, <신.구당서>, 그리고 발해를 지극히 싫어했던 신라시대 최치원의 글과 서방사서 <사국사>가 전하는 칭기스 칸의 선조 계보, 그리고 조선시대 학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연구한 결과, “말갈”은 퉁구스어에는 그와 비슷한 소리조차 없는 낱말일뿐만 아니라, 나아가 그것은 우리 조선어로만 해석이 가능한 우리 고대어 낱말로 바로 “몰 골”, 곧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말갈 말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말 고을”, 곧 “말갈”의 수령 대조영 가문은 고구려왕가의 일족으로 그 서자가문이다.! 좀더 구체적인 것은 곧 말하게 될 것이다.
세계제국 “몽골”을 세운 칭기스 칸의 선조는 오늘날 “퉁구스”인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북지방 소수민족”으로 잘못 알려진 “말갈인” 대조영의 가계이다. “속말지방의 말갈 대조영” 가문은 간단히 말해 “고구려왕족의 서자가문”이고, 그들이 다스리던 “말갈 7부”는 고구려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조영 가문을 두고 한 말인 “고려별종”이라는 말은 마치 주몽이 부여 단군(북부여왕) 해모수의 서자 이기 때문에 “부여별종(부여에서 갈라진 씨앗)”이라고 불리고, 또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주몽의 서자이었기에 역시 “부여별종(부여에서 갈라진 씨앗)”이라고 불린 것과 꼭 같은 이치이다. 곧 대조영이 해모수와 주몽의 “부여왕가(부여인)에서 갈라진 무리”이기 때문에 발해가 망한 뒤 수 십 년이 안 되어 최초로 발해 대조영의 가문의 뿌리를 언급한 <무경총요>가 “부여별류”로 기록하고 또 그 뒤애 <구당서>가 그 가문을 “고려별종(고려에서 갈라진 씨앗)”이라고 기록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야 발표자의 연구결과를 통해 고구려 최후의 왕 보장왕이 당나라에 잡혀갔다가 요동(고구려)에서 지속되는 민중의 소요를 무마시키기 위해 당 황제가 보장왕을 다시 옛고구려 땅으로 돌려보냈더니 그가 고향 땅에 이르자 마자 말갈의 대조영 가문과 접촉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난다. 보장왕은 말갈의 대조영 가문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려다가 장안(오늘 날 서안)으로 다시 소환되어 그 곳에서 세상을 버린 것이다. 당시 보장왕의 네 아들들 가운데, 안승은 신라에 억류되어 있었고, 또 한 아들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두 아들은 당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 땅으로 돌아온 그가 믿을 수 있었던 이들은 오직 바로 대조영의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고구려왕족의 서자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또 보장왕이 다시 당나라로 잡혀가자 이제 다시금 고구려 옛땅에서 고구려 정실 왕족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걸걸중상이 “진국”을 건설하고 이어서 “아들 대조영이 “진국(震國)-고려(高麗)”, 곧 “발해(渤海)”를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밝혀진다. 대조영의 가문은 이제는 당나라, 일본, 신라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사라져버린 고구려 왕가 적계(嫡系, 적손) 가문을 차선으로 대표할 수 있었던 고구려왕족의 서자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구려 유민, 그 백성들은 이 왕족의 서자 가문이라는 근거 때문에 사라진 적자가문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새로운 왕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고구려”와 “말갈” 발해는 한 종족, 한 가문이고 당당한 우리 조선민족의 역사인 것이다.
발표자는 또 칭기스 칸의 선조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칭기스 칸의 15대 선조로 “모든 콩그라트(고구려) 종족의 시조”로 군주와 같은 지위에 있었다는 페르시아어 “황금의 항아리”, 달리 타타르-투르크어로 “황금의 칸”은 바로 <고려사>가 말하는 여진 아골타의 8대조 “금행(今幸, 金幸)=큰 칸/금 칸”이고, 그는 금(金)나라와 원나라를 세운 가문의 공동선조이자, 발해 반안군왕 대야발-->대일하-->대간(대-키얀)-->대-키얀의 아들-->금행의 계보 속에서 대야발의 4대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동시에 고려 태조 왕건의 외증조부이다.
결국 <금사>에 나오는 아골타의 7대 선조 함보의 아버지가 그이고, 그는 오늘날 사학자들이 “신라인 김-함보”라고 잘못 파악한 “대-함보”의 아버지이고, <금사>가 <세기>에서 금나라는 말갈의 후손”이라고 하고 아골타 자신이 발해인 양박을 시켜서 발해유민을 자기 밑으로 끌어모을 때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라”고 한 말의 참뜻과 <삼조북맹회편>이 아골타의 조신(女眞, 여진)이 “주몽의 남은 씨앗”이라고 한 뜻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우리 학자들이 신라왕가의 후손이라고 잘 못 대서특필해온 청나라 황가는 청나라 건륭제가 대신들에게 편찬하게 한 <흠정만주원류고> 속에서 청나라 태조 아이신교로 누르하치의 가문이 “금나라의 유부(남은 부락)”이고, “발해왕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이 말의 뜻도 이제 명백히 풀리는 것이다.
고구려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조영의 발해와 왕건의 고려, 아골타의 금나라, 칭기스 칸의 원나라와 세계적 대제국인 몽골4칸국 또 중원이라고도 부르는 지나 땅을 통치한 청나라로 이어진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볼 때는 오늘날 몽골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부랴티아 등을 말하는 “연연(燕然)” 지방을 아우른 말갈제국이었던 발해는 몽골제국, 차가다이 칸국 내에서 성장한 티무르의 티무르제국, 인도의 무갈제국으로도 발전했다. 전세계를 통치한 제국의 건설자들이 바로 우리 고구려-발해의 후손들이었다는 놀라운 이야기이다! 이제 우리 국사와 우리의 미래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볼 때이다.
발표자는 이제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어떻게 하여 밝혔는지, 그 근거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이 과연 무엇인지를 길고 자세한 본인의 2권의 저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요약한 말을 통해 이 자리를 통해 말씀 드리고자 한다.
II. 본론:
1. 칭기스 칸 선조가 나온 ‘에르게네 콘’ 이야기
칭기즈 칸의 손자 훌라구(Hulagu)가 기반을 잡은 일칸국(Il Khanate)의 재상(宰相)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은 1310년경 《집사(集史)》라는 역사책을 지었다. 이 사서의 한 부분에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타타르 종족의 기원 이야기’라고 하는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이 책은 특히 ‘투르크와 모골(몽골의 투르크-페르시아식 표현) 종족의 대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에르게네 콘(Ergenekun) 이야기’라고 한다.

이란에 서있는 라시드 웃딘 동상
티무르 왕조(Timurid Dynasty)의 4대 칸이었던 울룩벡(Ulugh Beg·1394~1449)이 집필한 《사국사(Tarixi arba’ ulus)》에는 ‘에르게네 콘’을 ‘아르카나 콘(Arkanaku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몽골이라고 부르던 종족은 지금부터 거의 2,000년 전(《집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기. 《집사》의 다른 부분을 보면 이 사건은 라시드 웃딘의 시대로부터 600년쯤 전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발표자 주)에 다른 투르크 종족들과 적대와 대립을 벌여, 그것이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믿을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다른 종족들이 몽골 종족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는데, 얼마나 많이 참살했는지 두 남자와 두 여자를 빼놓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두 가족은 적(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험준한 곳으로 도망쳤는데, 그 주변은 모두 산과 숲이었고 통과하기에 지극히 어려운 좁고 험한 길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방향에서도 (길이) 없었다. 그 산지 중간에는 목초가 풍부한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콘이었다.
… 그 두 사람의 이름은 네쿠즈와 키얀이었고, 그들과 그 후손들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혼인을 통해서 (숫자가) 많아졌다. … 몽골어에서 ‘키얀’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이다. 키얀이 대담하고 매우 용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키야트는 키얀의 복수형이다. 계보상 그와 비교적 가까운 후손들을 옛날에 키야트라고 불렀다.
그 산과 숲 사이에 사는 무리가 많아져서 공간이 좁아지자, 그들은 … 모두 함께 모여서 숲에서 수많은 장작과 석탄을 실어와 쌓고, 70마리의 소와 말을 죽여서 … 대장장이의 풀무를 만들었다. 많은 양의 장작과 석탄을 그 협곡의 아래에 쌓고, 계획에 따라 70개의 거대한 풀무를 일시에 불어대니 그 협곡이 녹아내려서 … 길이 하나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이동을 해서 그 협곡에서 넓은 초원으로 나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키얀에 소속된 지파가 그 풀무들을 불었다고 한다. 네쿠즈라고 알려진 종족과 그 지파인 우량카트 종족도 마찬가지로 불었다고 한다.〉

사마르칸드의 울룩벡(Ulugh Beg·1394~1449) 동상
2. 두 사람의 생존자 키얀과 네쿠즈, 곧 일하(壹夏)의 아들 ‘간(澗)’과 도리행(都利行)의 아들 ‘님금’
한편 《사국사》는 이 전쟁의 정황을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오래전 옛날 엘 콘(Elkhon)이라는 모골 종족의 통치자가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투르 이븐 파리둔(Tur ibn Faridun)은 타타르 칸(Totor Khoni)인 세빈치 칸(Sevinchkhon)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
엘 콘과 몽골인들은 이들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참패했다. 엘 콘의 아들 카욘(Kayon)과 엘 콘의 양자 누쿠즈(Nukuz), 그리고 그들의 두 아내와 이 두 사람의 간호자 외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카욘과 누쿠즈 두 사람은 적을 피해 아르카나 콘(《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라는 지방으로 도망해 살게 되었다.〉
나머지 이야기는 《집사》와 비슷하다. 《사국사》에 의하면, 이후 카욘의 가계에서 나온 후손을 키요트(Kiyot)씨, 누쿠즈의 후손을 다를라킨(Darlakin)씨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집사》가 말하는 모골 종족의 두 선조이다.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 둘 중 누가 칭기즈 칸의 선조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사국사》는 카욘의 후손 키요트(Kiyot)씨가 칭기즈 칸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사국사》가 칭기즈 칸의 직계 선조로 거명한 카욘의 아버지 엘 콘은 17세기 히바 칸국(Xiva xonligi)의 아불가지 바하디르 칸이 지은 역사책《투르크의 계보》 등 다른 사서들에서는 일 한(Il Han)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 콘(일 한)과 그의 아들 ‘카욘/키얀(Kiyan)’은 과연 누구인가?
발해 고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에게는 원기(元璣)와 일하(壹夏) 두 아들이 있었다. 일 한은 바로 일하이다. 일 한과 일하는 같은 소리이자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다.
물론 이것만 가지고 두 인물이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역사에 관한 문헌 기록을 통해 이들이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일 한이 대야발의 아들 일하라는 것은 그의 아들 키얀이 누구인지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키야트’는 ‘클(乞)’ 씨, 곧 “대(大)’씨라는 뜻
그렇다면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키야트(《사국사》의 ‘키요트’)’는 무슨 의미인가?
이 키요트씨는 1008년에 편수된 《송본광운(宋本廣韻)》을 참조하면, 놀랍게도 바로 ‘걸(乞)’씨의 옛 소리(8~9세기경 한자음)이다. 이 자전은 이 한자를 “去(거)-訖(흘)” 반절(反切), 곧 우리말 소리로 “걸”이라고 해두고 있고, 당시 남방 송인들의 소리로는 이를 라틴 문자로 표기하면 ‘khiot/qiot’로 기록했는데, 이 둘째 소리는《집사》 등이 말하는 ‘키야트’ 소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걸”과 “키요트”는 단지 우리말로 소리를 냈는가 당시의 남방송인들의 소리로 내었는가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고 둘은 사실은 같은 ‘걸(乞)’의 소리이다. 그런데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 또는 乞乞仲相)으로 아버지 때의 성씨는 ‘걸(乞)’ 씨였는데, 아들 대조영은 그 성을 고쳐 자신의 성을 “대(大)” 씨라고 썼다. 이것을 보면 원래 대조영의 아버지와 그 선조 때의 성씨인 ‘걸(乞)’ 씨는 고구려-말갈어, 곧 우리 말 ‘크다’라는 말의 ‘클(大)’씨를 원래의 한자의 뜻은 버리고 그 한자의 소리만을 빌려서 우리말 소리를 적는 표기방식인 고구려-발해식 이두(吏讀)로 적은 것이다. 아들 대조영은 원래의 자기 가문의 ‘클(乞)’ 성씨를 같은 “뜻”의 한자말로 바꾸어 ‘대(大)’ 씨로 쓴 것이다. 단, 이 ‘대(大)’ 씨 성씨를 한자의 뜻을 살려서 한자를 쓰되, 그 한자의 우리 말 뜻으로 그 한자를 읽는 표기방식인 고구려-말갈식 향찰로 쓰면 설사 ‘대(大)’ 씨라고 썼더라도 고구려-말갈어 구어로는 ‘클(대=걸)’로 읽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그 성씨는 여전히 “클(乞)” 씨였음을 말한다.
결국 키얀의 후손인 ‘키야트’ 씨족의 명칭은 ‘걸씨(乞氏)’, 곧 ‘클씨(大氏)’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키얀의 성씨도 ‘키요트’씨, 곧 ‘걸씨’, 달리 ‘클씨’라는 이야기이다.
라시드의 《집사》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몽골어”에는 그런 뜻을 가진 “키얀”이라는 말 소리는 전혀없다. 그렇다면 라시드가 말한 “몽골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몽골어가 아니라, 제3의 언어인데, 그것은 알고 보면 바로 고구려-말갈어가 자주 채용하여 쓴 한자 낱말 “澗(간)”의 옛소리이다. 이 고구려-말갈식 “澗(간)”자는 ‘[세차게 흐르는] 산골 물 간(澗)’이다. 이 말은 라시드가 “몽골어에서 ‘키얀(Qiyan, Kiyan)’은 ‘산 위에서 땅 아래로 흘러내리는 가파르고 빠르며 거센 격류’를 말한다고 한다”고 한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성씨를 붙여서 그 “키얀”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 그것은 ‘걸-간(乞-澗)’ 혹은 ‘대-간(大-澗)’이라는 성명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사국사》에서 ‘카욘’과 함께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했다고 한 ‘엘 콘(일 한)의 양자 누쿠즈’, 곧 《집사》가 말하는 ‘네쿠즈(Nequz)’ 또 《투르크의 계보》 등이 말하는 ‘니쿠즈(Nikuz)’)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그는 발해 제2대 왕 대무예(大武藝)의 맏아들 도리행(都利幸)의 아들인 ‘님금’이다.
《사국사》에서는 누쿠즈의 가계에서 생긴 씨족을 ‘다를라킨(Darlakin)’이라고 했다. ‘다를라킨’은 곧 무왕(武王) 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을 의미한다. 《송본광운》 등을 참조하면 ‘도리행’의 8~9세기경 한자음은 ‘도리캉’이다. 한자 ‘행(幸, 行)’은 ‘항’으로도 읽는데(‘行列’의 경우), ‘항’의 8~9세기경의 발음은 ‘캉(khang)’이었다.
몽골/퉁구스어나 북방 중국어에는 발음을 하면서 ‘r(ㄹ)’ 발음을 집어넣은 경우가 있는데, 이를 어중삽입(語中揷入) 소리라고 한다. 도리캉에 ‘r(ㄹ)’ 소리가 들어가면 ‘도리-ㄹ-캉’이 되는데, ‘다를라킨’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누쿠즈(니쿠즈/네쿠즈)’의 후손 씨족을 ‘다를라킨’이라고 일컬은 것은, 네쿠즈의 아버지인 ‘도리행의 후예’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16세기에 나온 《시바니의 서(書)(Shibani-name)》라는 책이다. 이 사서는 샤이바니 왕가(Shaybanids)가 타타르어로 자기 선조의 계보를 기술한 것이다. 샤이바니 왕가는 칭기즈 칸의 장자(長子) 주치의 후손들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네쿠즈를 ‘데르리긴 한(Derligin Han)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데르리긴 한’은 곧 ‘다를라킨 한’이다(‘한’과 ‘칸’은 같은 의미이다).
《집사》를 보면 〈…‘링쿰(lı?ngqu?m)’이란 말은 키타이어로 ‘대아미르’를 뜻한다. 그러나 몽골의 평민들은 ‘링쿰’이란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 운운하면서 오직 몽골의 황가 성원과 귀족들만이 그 말뜻을 알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미르(Amir)’는 사령관·총독이라는 의미로 이슬람 세계에서 왕족이나 귀족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에미르(Emir)’라고도 하는데, 아랍에미리트연방(UAE)의 ‘에미리트’는 ‘에미르(아미르)가 다스리는 땅’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보듯 바로 키타이어 ‘링쿰’은 ‘군주(임금)’라는 의미다. 키타이는 원래 ‘거란’을 의미했지만, 원나라 때는 양자 강 이북 지역을 의미했다. 오늘날 서양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캐세이(Cathay)’라는 말이 키타이에서 나왔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몽골인들은 북방 ‘한인(漢人)’ 지역을 ‘키타이(契丹)’라고 하고, 오늘날 양쯔강 이남의 남방 ‘한족(漢族)’ 지역을 ‘낭기아드’, 곧 ‘남인(南人) 지역’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원나라 때 ‘키타이’에는 거란은 물론, 고려, 여진, 발해가 포함된다. 따라서 《집사》에서 ‘키타이어’라고 한 것은 거란말일 수도 있지만, 고려, 여진, 발해어일 수도 있다.
‘엘 콘의 양자 네쿠즈’는 바로 발해 무왕(대무예)의 맏아들 도리행(데르리긴 한)의 아들이다. 그는 《사국사》에는 기록되었으나, 동방사서와 족보에는 기록되지 않은 ‘님금’이다. 그의 이름이 바로 “페르시아어로 링쿰”으로 기록된 것이다.
4. “텡기즈 콘”은 ‘진국공’ 대야발
그러면 《사국사》가 일 한(엘 콘)의 아버지라고 하는 텡기즈 콘(Tengizkhon)은 누구인가?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칭호였던 ‘진국왕’이라는 의미다. 《송본광운》에 따르면 ‘震國王’의 옛 한자음은 ‘팅궤트 칸’이다. 이것이 ‘팅기즈 칸/텡기즈 콘’으로 바뀐 것이다. 즉위 전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진국왕’과 유사한 ‘진국공’이라는 칭호도 썼다.
《사국사》는 일 한(엘 콘, 일하)의 아버지가 “텡기즈 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텡기즈 콘은 ‘진국왕(진국공)’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대조영이나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발표자는 텡기즈 콘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임을 발견했다. ‘동방사서(중국 등 동아시아의 역사서)’는 대야발을 발해 반안군왕(盤安郡王)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국사> 등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의 사서들이 팅기즈 칸이라고 하는 인물은 <신.구당서> 등과 《대씨대동보》를 통해 보면 분명히 대조영 가문의 계보상 대야발이다.

5.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은 사실은 당-신라 대 발해 사이의 대전쟁
이제 《집사》에서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대전쟁’으로, 《사국사》가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이라고 기록한 전쟁이 어떤 사건이었는지를 보자.
이는 바로 발해 말갈(몰골, 모골)과 당나라 사이의 동아시아 대전쟁이다. 바로 이 전쟁 때문에 칭기즈 칸의 선조인 키얀과 네쿠즈가 아르카나 콘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 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보자. 700년간 동아시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는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서방세계에는 ‘무크리(Mukri)’ 혹은 ‘코라이(Koorai)’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그 고구려가 나당(羅唐)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 마지막 왕 고장(高藏)과 그의 직계 가속은 모두 당나라 장안으로 잡혀갔다.
6. 발해 大씨는 “퉁구스족”이 아니라 “고구려 왕실의 庶子” 가문
고구려 땅 백산(白山)과 속말(粟末) 말-고을(靺鞨), 곧 ‘말 키우는 고을’의 지방 통치자 말골추(靺鞨酋) 대조영 일가도 포로로 잡혀 당나라 영주(營州·요녕골 조양·朝陽)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란추장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 걸걸중상과 그 아우로 추정되는 걸사비우(乞四比羽), 그리고 걸(대)조영은 이때를 틈타 동으로 빠져나왔다. 이들은 조상의 땅이던 동모산(東牟山)에서 말골과 구려(고구려) 백성을 규합하여 698년에 나라를 세웠다. 이 나라가 우리가 흔히 ‘발해’라고 하는 ‘진국(震國) 고려(高麗)’이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 등 우리 주류 국사학계는 ‘속말말갈’ 가문은 ‘고구려국인(高句麗國人)’, 곧 ‘고구려 왕족’ 또는 일반 ‘고구려인’과 전혀 다른 “물길계(勿吉系)”의 ‘퉁구스(Tungus) 종족’이라고 본다.
그러나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이다. 다만 이들은 고구려 왕실의 서자(庶孼·서얼)이기 때문에 ‘고씨(高氏)’ 대신 그와 유사한 의미의 ‘걸씨(乞氏=클씨=大氏)’를 성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대조영 때 “乞(클)”이라는 순수한 고구려-말갈어 성씨를 같은 뜻을 가지는 한자 “大”씨로 바꾼 것이다.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 왕족의 후예임을 알려주는 것은 그가 앞서 말한 대로 “부여별류(부여에서 갈라진 무리)”와 “고려별종(고려에서 갈라져 나온 씨앗)”이라고 한 것 등, 그가 고구려 왕족의 가닥족속임을 가리키는 기록 외에도 《삼국사기(三國史記)》 최치원(崔致遠) 열전(列傳)과 《당문습유(唐文拾遺)》 권 43에 수록된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이 있다. 이 기록은 “고구려(왕족)의 남은 서자들(高句麗殘?, 고구려 잔얼, 대조영)이 무리로 모여(類聚) 북의 태백산(太白山) 아래에서 나라 이름(國號)을 발해(渤海)라고 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서 보듯 대조영의 가계는 ‘고구려(왕족)의 서자’ 출신이다.
건국한 지 약 28년이 지났을 무렵, 발해는 대부분의 고구려 영토를 수복했다. 고구려 때의 국경 마을이던 말골(馬忽=말고을=馬郡), 즉 말갈칠부(靺鞨七部)도 대부분 수복했다. [참고로 “고구려”는 “고-구려”로 성(城)을 말하는 “구려(구루)”와 군(郡)을 말하는 “말 골(말키우는 고을)”로 이루어져, 구려, 구려, 구려, 수 많은 구려와 말 고을, 말 고을 그리고 7개 말 고을 이 합쳐져 크게 된 “커-구려”라는 순수한 우리 말의 한자 이두식 표기국명이다.]
이 사태를 지켜보던 당 현종(玄宗)은 발해를 약화시키기 위해 발해 무왕 인안(仁安) 7년(현종의 개원 13년), 곧 725년에 흑수말갈을 발해로부터 분리시키려 한다. 흑수말갈 부장(部長)을 회유하여 도독(都督)·자사(刺史)로 임명하고, 그 땅을 당나라의 흑수부(黑水府)로 삼았다. 당 조정은 현지 통치자들을 감독하는 장사(長史)를 파견하여 흑수 지역에 대한 직접 통치를 도모했다. 심지어 당은 흑수부장의 가계에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 성까지 주겠다고 꾀었다.
7.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과 발해에 대한 배신행위
이러한 발해 와해공작을 지켜본 무왕 대무예는 분개했다. 그는 다음해인 726년 당에 빌붙기 시작한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 정벌군 총사령관을 맡은 무왕의 아우 대문예(大門藝)는 친당파(親唐派)였다. 그는 “흑수말갈을 치라는 명령은 당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므로 그 명(命)을 거두어달라”고 청했다. 그는 흑수에 이르러서도 형에게 전갈을 보내 다시 같은 뜻을 전했다.
이를 받아본 국왕 형 대무예는 크게 노해 문예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대신 자신의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했다. 동시에 문예를 잡아 처벌하라고 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문예는 급히 당나라로 망명해 버렸다. 이 부분을 《사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 콘 통치 시에 그의 둘째 아들인 샤 오파리둔 투르 이븐 파리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병사와 대인(大人), 수없는 군대와 함께 모바라운 나흐르(Movarounnahr)와 튀르키스탄(Turkistan) 땅으로 떠났다. 그는… 모바라운 나흐르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머물며 살지 않고, 튀르키스탄 지역으로 말을 달렸다.〉
‘모바라운 나흐르’는 오늘날에는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라고 하지만, 원래 아랍어로 ‘강 건너의 땅’이라는 말로 실은 ‘흑수 너머의 말갈(黑水靺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투르키스탄’은 당시의 몽골고원에 자리 잡은 돌궐(突厥)과 실위(室韋·내몽골·당나라 때 만주 지역에 살던 몽골-퉁구스계 종족-편집자 주)를 가리키고 이 역시 흑수말갈을 말한다.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달아나자, 대무예는 당 현종에게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당 현종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얼마 뒤 대무예의 맏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아마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당나라 장안에서 당초 목적과는 달리 이른바 숙위(宿衛·중국 당나라 때 조공국 왕자들이 궁궐에서 황제를 호위하는 것-편집자 주)하다가 728년 4월 갑자기 병으로 죽었다. ‘도리행’이 죽은 직후 당나라는 예(禮)를 갖추어 그의 주검을 본국에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도리행이나 그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그로부터 4년5개월이 지난 732년 9월, 무왕 대무예는 대당(對唐) 전쟁을 선포한다. 압록강 하구에서 발해군을 출발시켜 당나라 등주(登州)를 치게 한 것이다. 바로 이 발해의 등주 진공(進攻)이, ‘동방사서’는 기록했으나 《사국사》는 생략한, 바로 그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의 서두 부분이다.
말갈(발해), 곧 모골 군사는 우선 압록강의 지류 포석하의 박작구에서 집결한 뒤 732년 9월 바다를 건너 당나라 등주에 상륙했다. 그리고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는 등주를 약탈하고 발해군을 맞이해 싸운 등주자사(登州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발해가 당나라 등주(登州)정벌을 한 길
이 소식을 들은 당 현종은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반격을 명했다. 이에 관한 전투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장문휴의 발해군은 갈복순의 군대에 의해 오히려 궤멸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발해의 등주 기습 다음해인 733년 개원 21년(무왕 15년) 봄 정월, 당 현종은 당나라 군대에 발해 본토 공격을 명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등이 이를 기록했다. 이때 당 현종은 대문예로 하여금 유주(幽州)로 가서 병사를 모아 발해로 진공하도록 했다.
대문예는 바로 《사국사》가 〈타타르의 세빈치 칸과 동맹하여 모골 종족에게 전쟁을 걸어왔다〉고 한 엘 콘의 둘째 아들 투르 이븐 파리둔이다. ‘투르 이븐 파리둔’은 ‘파리둔의 아들 투르(Tur)’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흑수말갈’의 다른 이름인 ‘파리땅(勃利州, 발리주)의 아들 투르’라는 말이다.
대문예의 발해 진공과 동시에 당 현종은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벼슬에 있던 신라인 김사란(金思蘭)에게 신라(新羅)로 돌아가서 10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발해 남쪽 국경을 치게 했다.

《집사》에 실린 몽골족의 전쟁 모습
8. 기존 학계의 관점과 다른 발해의 남쪽 영토 상실
이때 《자치통감》 및 《신당서》가 기록한 대로 남쪽에서는 신라군이 발해의 남쪽 주군(州郡)을 공격한 것으로 보인다. 10만명은 당시로 보아 대단한 수의 병력이므로 발해와 신라 간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을 것이다. 발해와 신라의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군은 큰 추위를 만나고 눈이 한 발이나 쌓여 전체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었다.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기록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앞서 본 《사국사》의 ‘타타르 종족과 모골 종족의 대전쟁’ 기록이다.
당나라 및 신라와의 전쟁이 끝난 후 대무예는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로 옮겼다. 현주는 오늘날 길림골(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서성진(西城鎭) 북고성촌(北古城村)이라고 추정된다.
발해-당 전쟁으로부터 5년이 지난 737년(무왕 19년, 개원 25년) 무예가 세상을 떠났다. 당에서 죽은 맏아들 도리행의 아우 흠무(欽茂)가 뒤를 이었다.
발해-당나라 전쟁의 결과에 관하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대백과》는 〈발해의 등주 공격은 당에 발해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나라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등주 공격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고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이라는 발해의 이칭은 당시 발해의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탄생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평가는 필자가 파악한 역사적 사실과는 매우 큰 거리가 있다. 《사국사》에서는 〈‘타타르 8대 칸 수윤지와 모골의 일 한 사이의 대전쟁’에서 모골군(말갈군)이 전멸당하고, 일 한이 전사하고, 그 가운데 오직 카욘(키얀, 간)과 누쿠즈(도리행 아들 님금, 링쿰)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갓 혼인한 그들의 아내들과 몇 명의 시종만 데리고 밤의 어스름을 틈타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고대(中古代) 사서의 기록을 정리한 청말(淸末)의 역사가 황유한(黃維翰)이 쓴 《발해국기(하)·渤海國記(下)》에는 “당 현종이 발해를 친 공으로 패강(浿江·대동강) 이남(以南) 땅을 신라에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당나라와 신라, 흑수말갈과 실위 기병대로 이루어진 4국 연합군이 남북에서 발해를 협공한 결과, 적어도 남쪽 전선에서는 발해가 패해 많은 영토를 빼앗겼음을 보여준다.
발해가 상실한 이 땅은 바로 《요사(遼史)》가 전하는 ‘발해 서경(渤海 西京) 압록군(鴨綠軍=鴨綠郡)’ 이남 지역이다. 압록군은 바로 ‘대전쟁’에 패한 후 살아남은 키얀(乞澗)과 네쿠즈(님금)가 적을 피해 숨어들어 갔다는 ‘모든 투르크 종족과 몽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알려진 ‘아르카나 콘(Arkanakun=Arqanaqun·《집사》의 에르게네 콘)’이다.
9. 모든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고향 ‘아르카나 콘’은 어디인가? ?바로 발해 서경(西京) ‘압록강-나(의)-군’
앞서 본 <집사>와 <사국사>, <투르크의 계보> 등 서방사서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 오늘날 터키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 민족들을 비롯하여 몽골 민족은 “에르게네 콘”을 “모든 투르크와 모골 종족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바로 이 지방은 어디인가?
몽골학자 빌렉트(L. Bilegt)는 “[키얀과 네쿠즈] 그들이 가서 목숨을 구한 곳은 에르군 콘(Ergun Kun)인데, 이 지방이 어디에 있는가에 관해 많은 학자들이 다른 생각을 내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보는 것은 오늘날 아르군(Argun’) 또는 에르구네 물(Ergu’ne mo’ro’n)에 가까운 땅, 특히 자세히 말한다면 오늘날 러시아연방공화국의 땅에 있는 아르곤 산맥이었다(3)고 한다. 이를 본 받은 부랴트(고려에서 간 말갈족 후예들이 세운 러시아의 한 공화국) 학자 조릭투예프(B. Zoriktuyev)도 같은 의견을 표명햇다. 또 자신보다 오래 앞서 이러한 견해를 밝힌 이들 학자를 인용도 하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의 독창적 학설이라도 되는 양 우리 학자 김호동 서울대 교수도 자기 번역서의 각주에서 같은 의견을 밝힌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페르시아어 본 《집사》가 ‘아르카나 콘’으로 기록한 것을 ‘에르게네 쿤(Ergenekun)’으로 읽는다.
그러나 《집사》가 말하는 ‘아르카나 콘(Arqanaqun)’은 오늘날 학자들이 생각하는 그 아르군(Argun’)이 아니라, 《요사》에 ‘발해서경(渤海西京) 압록군(鴨綠軍)’으로 적힌 지역이다. 곧 말갈(발해) 구어(口語)로 ‘압록강(鴨綠江)나/네(의) 군(郡)’이다. 이곳이 바로 ‘아르카나 콘’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 당시에 ‘아-ㅇ(ㅂ)-로군’으로 소리 났을 ‘압록군(鴨綠軍/鴨綠郡)’의 말갈 구어 형태를 복원해 보면, 이는 ‘아우로군(鴨綠郡)네(의) 군’ 또는 ‘아우로강(鴨綠江)나(의) 군(郡)’이다. 필자 등 몽골어·투르크어 등을 이해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리가 세월이 흘러 몽골-투르크어화하면서 그 소리가 ‘아로간나 쿤’을 거쳐 ‘아르카나 콘’으로 바뀌어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그 소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역사적 진실이다. 특히 《집사》와 《사국사》가 말한 그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구려-발해계 인물들이다. 일 한(=일하), 그의 아버지 텡기즈 콘(=震國公=대야발), 그의 아들 키얀(=걸간), 그의 양자 네쿠즈(=님금), 또 ‘다를라킨(=도리행) 등.
또 종족 이름인 ‘모굴’은 말갈-발해어(靺鞨-渤海語) ‘몰골(馬忽)’, 곧 ‘말 고을’이라는 고구려어의 ‘말갈’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말골인 키얀(澗)과 무왕의 맏아들 도리행의 아들인 ‘님금’이 발해-당나라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패하여 도망가 숨어들었다는 그 ‘아르카나 콘’은 당연히 발해-말갈 땅이다. 문어(文語)로는 《요사》의 ‘발해서경 압록군’이고 말갈 구어로는 바로 ‘압록강나/네(의) 군’이다.
칭기스 칸의 10대 여선조 “알란 고와”는 <원사>에 “아란 과화(阿蘭 果火)”라고 기록되었는데, “아란 (阿蘭)”은 바로 압록강네 군내의 한 지역, 곧 오늘날 함경북도 아란(阿蘭)이다.

혜산진과 백두산사이 압록강원(鴨綠江源)과 건너 울라계(烏喇界) 곧 쿨라(Qula) 강

아르카나 콘과 길주 僕幹水, 삼수와 갑산
《집사》는 ‘키얀’과 ‘네쿠즈’가 ‘에르게네 콘’ 계곡으로 들어간 뒤 세월이 흘러 그들의 후손이 불어나, ‘키야트’와, 또 원래는 몽골이 아니었던, 우량카트(우리 사서의 吾良哈=오랑캐) 등 및 몇 지파가 생겼다고 한다. 그 가운데 ‘키얀’의 후손인 ‘콩그라트(Qungrat) 종족’이 먼저 아르카나 콘을 뛰쳐나왔다. 이어 나머지 모골 종족이 그곳에서 나왔다고 한다.
《집사》가 말한 그 ‘콩그라트 종족’의 전설적인 시조는 ‘황금항아리(Bastu-i jarrin)’라는 인물이다. 《집사》는 그를 ‘군주(임금)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필자는 ‘황금항아리’가 누구인지 동서방 사서와 우리 역사를 통해 추적해 보았다. 그는 타타르어 사서인 《칭기스의 서》에 나오는 ‘알툰 칸(Altun Han)’, 곧 ‘황금의 칸’이었다.
10. 원태조 칭기스 칸과 금 태조 아골타의 공통 선조 대야발 4세손 금행(今幸)
이 ‘황금의 칸’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금행(金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금(金)’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황금’이고, ‘행(幸)’은 앞에서 ‘도리행’의 경우에 살펴보았듯이, 옛날 한자음은 ‘캉’, 즉 ‘칸(汗=군주)’이다. 금행은 《고려사》에는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今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아들 함보(函普)가 바로 후일 금(金)나라를 여는 아골타의 조상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황금의 칸’의 계보이다. 19세기 초 중앙아시아에 있던 몽골계 콩그라트 왕조의 역사책 《행운의 정원》은 ‘황금의 칸’을 《집사》에 나오는 키얀의 손자라고 한다. 곧 ‘금행’은 발해 대야발의 손자인 키얀의 손자라는 이야기이다.
일부 김운회, 윤명수, 김위현 등 우리 학자들은 《금사(金史)》 《대금국지(大金國志)》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등을 잘못 이해해 이 금행의 아들 함보를 ‘신라인(新羅人) 김함보’로 보고 완안부를 신라인 유민으로 보고있다. 심지어 동양대학교 교수 김운회는 “금은 신라인이 건국했다. 금사에 ‘우리 선조는 고려에 살던 신라인 김함보(金函普)’라고 써 있다”고 까지 하여 <금사세기> 자체에도 없는 새로운 텍스트를 그 사서에 써 넣고 있다. 게을러서 <금사>의 첫 장도 읽어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지식이 뛰어나서 <금사> 본문에 없는 글자도 그의 눈에는 보이는 것인지 모를 지경이다.
이들 가운데 재야사학자 윤명수는 조선 시대 김세렴의 잘못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고 함보의 아버지 ‘금행’을 ‘신라인 김행’, 곧 안동 권씨 시조 권행(權幸)이라고 하기도 한다.
심지어 우리 국민의 세금이나 다름없는 시청료를 모아 운영하는 공영방송 KBS도 전 명지대 교수 김위현,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성수 교수 등을 포함하여 이러한 잘못 된 학자들의 견해를 모아 KBS1 ‘역사스페셜’ 프로그램으로 방영했다. 상업방송도 아니고, 공영방송이 그 학설의 옳고 그름도 따져보지 않고 이 분야 연구를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이른 바 “교수”들- 국책연구기관인 이른 바 “한국학중앙연구원”관련 교수들을 모아두고 그들의 어줍잖은 잘못된 연구를 바탕으로 한 당치도 않은 거짓 역사지식을 우리 국민들에게 퍼뜨리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은 칭기즈 칸과 그의 부인 콩그라트 종족의 부르테 우진의 선조가 된 《집사》의 ‘황금항아리(=황금의 칸=알툰 칸)’이고, 대야발의 4세손이다.
<金史> | <大金國志, 卷一> | <고려사> | <고려사> | 비고 |
금행(今幸, 金幸, <고려사>) | | 작제건 아버지(발해시대, ?~*819년?) |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 | 금행=서해용왕 |
함보=큰바=큰가(函普) | 감복(龕福) (작제건 아내 용녀의 형제/작제건의 처남/ 용건 외삼촌) | 작제건 (발해시대, ?~*849년?) | 용녀(작제건 아내) | 아들(1대) 세대 |
오로(烏魯) | 胡來 (용건 외사촌 형제) | 용건(고려 세조 왕륭, 王隆, ? ~ 879년 5월)-후삼국시대 | *궁예 세대 | 손자(2대) 세대 |
발해(跋海) 신라인 김행(金幸) 세대 | (왕건 외6촌 형제) 918년 왕건의 고려 성립, 926년 발해 멸망 | 왕건(발해와 궁예의 고구려-마진-태봉 시대) (고려 태조, 877~943년, 재위: 918~943년) | 궁예 아들 세대 | 증손(3대) 세대 |
수가(綏可) 경순왕(909?~979년) 세대 | (안종 외8촌 형제) “[*발해가 망해] 거란을 섬기다(臣伏契丹)”<삼조북맹회편> -발해가 거란 치하에 들어간 시대 | -왕건의 맏아들인 고려 제2대 혜종(惠宗, 912~945 재위: 943~945) 세대 -[*셋째 아들] 제3대왕 정종(定宗, 923~949 재위: 945~949) -[넷째 아들] 제4대왕 광종(光宗) [925년(태조 8)∼975년(광종 26)/ 재위 949년∼975년/ 고려 제4대 왕] -안종(安宗, ? ~996년) | | 4대 후손 |
석로(石魯), 아내 고려여인 후비의 아들이 호실답(胡失答) 마의태자 세대 | (현종 외10촌) 북국 여진의 남국 고려에서 취한 아내 | 현종(顯宗, 992~1031년 고려 제8대 왕, 재위: 1009~1031년) -안종(安宗, ? ~996년) 아들 세대 | | 5대 후손 |
오고래(烏古乃, ? ~1074, 재위 1021~1074년) | 호래(胡來) (문종 외12촌) | 문종(文宗, 1019~1083년, 고려 제11대 왕, 재위1046~1083년 | | 6대 후손 |
핵리발(劾里鉢, 1039~1092년, 오고래 둘째 아들) 파랄숙(頗剌淑), 영가(盈歌) 형제 | 양할(楊割) (숙종 외14촌) *단,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 숙종(肅宗, 1054~1105년, 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년) | | 7대 후손 |
아골타(阿骨打) 1068~1123년, 핵리발 둘째 아들) | (예종 외16촌) 楊割生三子:長曰阿骨打 *단,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 예종(睿宗, 1079~1122년. 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년) | | 8대 후손 |
발해 왕가의 대야발의 4대손 금행과 그 둘째 아들 함보가 왕건 때 고려에 귀부한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나 왕건의 동시대인 김행(권행)이 아님을 보여주는 계보, 세대 도표
《집사》에 따르면, ‘황금항아리’에게는 삼형제가 있었다. ‘추를룩 메르겐(조선 말갈)’ ‘쿠바이시레(커가씨네=흘석렬·紇石烈)’, 그리고 ‘투스부다우(대씨부 대왕)’가 그들이다. 이 세 아들은 《고려사》 ‘금행’의 세 아들, 곧 《금사》에 나오는 금 시조 삼형제, 곧 카고라이(阿古?=아고래=고구려), 함보(=큰보=큰가), 그리고 보코리(보활리·保活里=무구리=고구려) 삼형제와 같은 인물들이다.
두 그룹으로 대조되는 이들의 이름은 얼핏 보면 매우 낯선 이름들이다. 그렇지만, 두 가지 각각 서로 다른 이름들은 다 위의 괄호 속 이름 풀이에서 보듯이, 우리말 말갈어에 기반한 퉁구스어(추를룩 메르겐)와 말갈어(쿠바이시레), 그리고 한자(투스부다우)로 된 칭호이다.
11.“황금항아리” “금행”의 발해 실지(失地) 회복
《집사》가 말하는 그 콩그라트의 에르게네 콘 탈출이야기를 우리 사서와 대조하여 그 이야기 속의 역사적 진실을 찾아보면, 발표자의 저서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 1과 2>에서 자세히 밝혔듯이, 그 이야기는 그 콩그라트 종족의 수령인 황금항아리(=금행)의 일족이 그들의 8촌 형제인 발해 10대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 때에 ‘발해서경 압록강네 군’을 뛰쳐나온 것을 말한다. 선왕이 90여 년 전 발해-당나라 전쟁에서 패해 잃어버린 흑수말갈 등 북방 영토와 남국(南國)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 영토를 회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집사>에 나오는 그림으로 콩그라트 종족이 아르카나 콘에서 나오는 장면
물론 황금항아리는 이에 적극 호응했다. 이때 황금항아리의 ‘콩그라트 종족’은 다른 모골(말갈) 종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골 종족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급히 전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는 발해 남쪽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이것이 《집사》에 나오는 ‘콩그라트 종족의 에르게네 콘 대이탈-대장정’ 이야기이다.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터키인이 그린 에르게네 콘 이야기에는 “투르크인들이 에르게네 콘에서 나오는 장면”이라고 적혀있다)
그 결과 황금항아리 일행은 신라와의 싸움에 이겨, 평주(平州), 곧 오늘날 황해도 평산 이남까지 회복했다. 어쩌면 경기도 개성은 물론, 한강 이북까지 진출했을 수도 있다.
황금항아리 금행은 그 공으로 평주에 눌러앉아 군왕(郡王)이 되었다. 이 때문에 《집사》는 그를 ‘군주(왕)와 같은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사》 예종 조 본문은 ‘우리나라 평주승 금행’이라는 비밀코드로 그를 기록했다.
《투르크의 계보》에 의하면, 황금항아리(=금칸=금행)의 큰아들인 아고래(=카고라이=고구려)에게는 ‘콩그라트(Konkirat)’라는 아들이 있었다. 이 아들이 《집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콩그라트 종족(지파)’의 소(小) 시조가 되었다. 칭기즈 칸의 부인 부르테 우진이 이 종족 출신이다. ‘콩그라트’는 ‘큰고려씨’, 곧 ‘고구려씨’라는 말이다.

발해왕족 황금항아리-황금 칸-금행과 칭기스 칸의 계보도
황금항아리의 둘째 아들 함보는 당시의 발해 반안군(길주)으로 들어가 발해 “반안군왕”이 되었다. 《금사》에서 함보가 “여진(女眞)”“완안부(完顔部)”로 들어가 “완안부인(完顔部人)”[혹은 다른 사서에서 완안부장(完顔部長)]이 되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이 사실이 후대에 <고려사> 예종조와 <금사> “세기” 편에서 각각 부분적으로만 기록함에 따라 이를 제대로 연구하지도 않고 부정확한 자신들의 공부결과를 저서와 논문, 인터넷 신문, KBS1방송 등을 통해 앞 다투어 발표한 이른 바 “학자”들이 잘못 파악한 사실이다. 위의 도표가 보여주듯이, 그의 생시에는 이른바 “여진(女眞)”은 없었고, ‘발해’만이 있었기때문이다.
함보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이 <금사>에 나오는 코로(烏魯·오로=胡來·코라이=高麗·호래)이다. 이 코로의 6세대 후손이 금나라를 세운 완안 카고리다(阿骨打·아골타)이다. 이 가계는 《집사》가 말하는 “예키라스 종족”이다.

완안아골타 초상화
조선시대의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놀랍게도 이 종족을 삼한(三韓)의 종족 ‘야크라씨(役拏氏·역라씨)’라고 기록했다. 이 가계는 분명히 우리 종족이다.
12. ‘모든 몽골의 어머니’ 알란 고와의 코를라스(고려나씨), 금나라 예키라스(역라씨), 부르테 우진의 콩그라트(큰고려)씨
함보의 아우 보활리(保活里)는 함보와 함께 고향 평주를 떠나 야라(耶懶·오늘날 함흥)로 들어갔다. 이 보활리의 3대손이 바로 《집사》의 투스부다우의 3세손 코를라스다. 이때부터 이 가계는 ‘코를라스 종족’으로 불린다.
‘코를라스 종족’은 《원사(元史)》와 우리 사서가 말하는 ‘카라로스/합란로씨(合蘭路氏)’다. 청대(淸代)에 나온 《황조통지(皇朝通志)》는 이들을 ‘고려나씨(高麗那氏)’라고 기록했다. 이들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집성부락을 이루어 살았다.
이 가계는 《몽골비사》에서는 ‘코리라르다이 메르겐(고려나라씨 말갈)의 코리-투마드(고려-주몽) 부’라고 한다. 부랴트족 사이에 전해지는 말로는 ‘코리 메르겐(고려 말갈)의 코리-부랴트(고려-부여) 종족’이라고 한다.
이 지파에서 나온 이가 바로 코를라스의 딸이자, 칭기즈 칸의 10대 선조로 ‘모든 몽골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알란 고와(함경도 阿蘭지방의 乞哥, 곧 걸씨 부인)이다.
지봉(芝峰)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후금(後金)’, 곧 청(淸)나라 태조 아이신지로 누르하치(愛新覺羅 努爾哈赤建)의 가문이 전조(前朝), 곧 고려(高麗) ‘왕씨(王氏)의 후손(裔)’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명(命)으로 지은 《만주원류고》에서 청나라 황실은 자신들이 “발해” “말갈”의 “대씨”와 금나라 왕가인 “완안”씨의 후손이라고 자처한다. 그런데 우리 학자들은 <금사>와 <흠정만주원류고>, <삼조북맹회편>등도 한번 읽어보지도 않고 송나라 사신이 쓴 <송막기문> 따위의 견문록이나, 조선시대 1636년 김세렴(金世濂)이 일본으로 사행 가는 배안에서 자신의 신라 김씨 종족에 관한 헛된 자부심과 상상에서 쓴 역사 왜곡적 글을 마치 역사의 진리라도 되는 양 잘 못 해석하고 풀이하고 과장하여 자기네들 이론을 저서와 방송에서 펼쳤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이와는 다르다.
이제 이러한 잘못된 관점을 극복하고 발표자가 밝힌 역사적 진실의 결과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고구려와 한 가문에서 나온 말갈의 발해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고려,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그리고 몽골제국, 아미르 티무르의 제국, 그리고 무갈제국, 그리고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땅에서 지난 세기에 망한 콩그라트 왕조 등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구려 왕가 서자가문 대조영 가계에서 나온 발해-고려(외손)-금나라-원나라와 4칸국-청나라와 콩그라트 왕조(그외 아미르 티무르제국 및 무갈제국 등등이 있다.)
III. 결론
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커부려 칸=고구려 칸)’의 시대에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Il Milione)》에서 ‘칭기즈 칸’을 ‘친기 칸(Cinghi Kane)’이라고 기록했다. 당시 ‘친구이 칸’이라고 발음하던 ‘진국왕(震國王=발해왕)’이라는 의미다.
칭기즈 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진(鐵木眞)’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쇠(터머르/데미르)를 다루는 대장장이’ 또는 ‘철인(鐵人)’이라고 해석했지만, 사실은 그와는 전혀 다른 뜻이다. 이 이름에 대해 《원사》 ‘태조기(太祖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태조(太祖)…의 휘(諱)는 테무진이고,성(姓)은 키얀씨(奇渥溫氏, 기옥온씨=키야트 칸씨)이고, 몽골부인(蒙古部人)이다. … 처음에 열조(烈祖·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타타르부를 쳤을 적에 그 부장(部長) 테무진을 사로잡았다. … 열조는 … 이로 말미암아 사로잡은 테무진의 이름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는데(名之),그 뜻(志)은 무공(武功)을 가리킨다.〉
여기서 보듯 ‘테무진’은 ‘위대한 무공(武功)의 신(神)’이라는 뜻인 고구려 3대 ‘대무신왕’이라는 말이다.

<집사>에 나오는 칭기스 칸과 네 아들들
테무진은 자기 시대까지는 그 이름조차 없던 땅에서 태어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그리고 페르시아인 사가 모스투피 카즈비니(Mostufi Qazvini·1281~1349)가 쓴 《선별된 역사(Tarikhe Gojide)》가 말하듯이, 처음으로 자신의 나라 이름을 ‘몽골(=말갈)’이라고 했다. 이는 당시 이미 우리 조선반도에 존재하고 있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진국왕(=발해왕)’을 뜻하는 ‘칭기즈 칸’을 자신의 왕호로 택했다. 결론적으로 “세계정복자” 칭기스 칸은 고구려-발해인이다! 그리고 고구려와 발해는 오늘날에도 우리 남-북 코레아로 이어져 오고 있고, 몽골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내가 밝히려고 수 백 권의 여러 언어로 된 고대. 중세 사서를 읽으며 수많은 밤들을 지세우며 밝히려 했던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고구려 발해의 역사에서 사라져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알려고 조차 해보지 않았던 그 부분을 밝힘을 통해 미래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고 그 방향을 제시해 보려고 한 것이다.
과연 이제 우리는 장차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우리의 역사도 잊고 이 조그마한 우리 조선 반도에서 두 개의 조국 남북으로 갈려 싸우고, 나아가 남한이나, 북한 내부에서 조차 지방과, 정파, 파벌로 싸움이나 하고 있다. 이러한 어두운 오늘날의 우리 그림자를 극복하고 우리가 알지도 못했던 우리 핏줄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다시 설계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에.
오늘날의 우리를 잠시 보자. 그 어려운 시절 다 잘 이겨내고 우리도 이 정도면 잘 사는 것 아니냐고 우리는 자주 말한다. 동시에 지금 우리보다 못한 약소국과 그 나라사람들은 깔보면서도 미국,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서는 사대자소(事大字小)하는 알량하고 노예적 태도로 그들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려는 무리들이 있다. 그러면서 우리 K-Pop이 세계를 주름잡고 있지 않느냐는 정도의 한심한 자만심으로 말이다. 과연 우리가 미래에도 이들처럼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비록 전쟁에 지고 사라져야 했던 선조의 역사이나마 결코 그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려고 하지 않고 고이고이 간직하며 미래의 승리를 꿈꾸며 마침내는 분열된 “말골(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통일하고 마침내 전세계 말 발꿉이 닿는 그 끝까지 말 달리며 세계정복자가 되었던 그러한 잊어버린 우리 핏줄의 역사를 거울로 두려움 없는 진취적 자세로 전세계로 뻗어나가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에 과연 어떤 역사를 되풀이해야 할 것인가?
-끝
참고문헌
몽골비사
1. 忙中兀侖紐察 脫察安’(Moŋγol-un ni'u?ato[b]?a'an), 四部叢刊三編第五十五~六十四?十卷,續集二卷,元抄本
2. Ц. Дамдинс?рэн , Монголын нууц товчоо, Улаанбаатар, 1970
3. Ш. Чоймаа, Монголын нууц товчоо, Улаанбаатар, 2011
족보
4. 태재은, 태재욱, <태씨대동보>, 대구, 2009
5. 대병남, <밀양대씨대동보>, 서울, 2010
동방사서
6. 舊唐書
7. 新唐書
8. 資治通鑑
9. 冊府元龜·
10. 武經總要
11. 元史
12. 三國史記
13. 遼史
14. 이계외집(耳溪外集)
15.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16. 宋本廣韻
17. 唐宴, 渤海國志卷二, 宋遼金元四史資料叢刊, 趙哲寒 敎授 主編 渤海國志, 文海出版社有限公司印行, 臺北, 中華民國六十六年
18. 黃維翰 渤海國記, 遼海叢書, 宋遼金元四史資料叢刊 趙鐵寒 敎授 主編 渤海國志 文海出版社 臺北 中華民國六十六年
19. 金毓? 渤海國誌長編, 千華山館, 宋遼金元四史資料叢刊 趙鐵寒 敎授 主編 渤海國志 文海出版社 臺北 中華民國六十六年
서방사서
20. Rashid AlDin Fadle allah, Rashid AlDin Fadle allah, Jami’ alTawarikh, Tarikh-e Moghul, Teheran, 1387h,
21. 김호동 역주, 라시드 앗딘의 집사, 부족지 칭기스 칸이기, 파주, 2005
22. 김호동 역주, 라시드 앗딘의 집사, 칭기스 칸이기, 파주, 2005
23. W.M. Thackston, Jami’ut-Tawarikh, Compendium of Chronicles, A History of the Mongols, Havard University, 1999
24. Marco Polo, Milione(동방견문록), Versione Toscana del Trecento Edizione, Adelhphi Edizioni, Milano, 1975
25. Мирзо Улу?бек, Т?рт улус тарихи(Тарихи арбаъ улус), Тошкент, Ч?лпон Нашриёти, 1994
25. Hamdulallah bin Abi Bakr bin Ahmad bin Naser Mostufi Qazvini, <Tarikh-e Gojide>(‘Abdaalhasiim Nawaa’i 편집), Mo’asses Enteshaarat Aamir Kabir, Teheran 1387h
26. Абуль-Гази-Багадур-ханРодословное древо тюрков, Москва-Ташкент-Бишкек, Международное изд-во Туркестан, 1996
27. Hive Hani Ebu’l-Gazi Bahadir Han, (Cagatay sivesinden Tu’rkiye sivesine ceviren Doktor Riza Nur, Gu’nu’miz Tu’rkcesine Sadelestiren Yunus Yigit) Tu’rk’un Soy Ag’aci, Istanbul, 2010
28. Yakup Karasoy-Mustafa Toker, “Tu’rklerde Shecere Geleneg’i ve Anonim Shibani-name”, Konya, 2005
29. Zu’hal O’lmez, Secere-i Turk’e Go’re Mogol Boylar, Istanbul, 2003
30. Shir Muhammad Mirab Munis & Muhammad Riza Mirab Agahi, “Firdaus al-iqbal, History of Khorezm”, edited by Yuri Bregel, Brill, 1988
참고단행본
31. Jack Weatherford,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Introduction, xix,xxiii,etxxivNewYork,2004
32. Harold Lamb(September 1, 1892 - April 9, 1962), Mogollarin Efendisi Cengiz Han, Istanbul, 2010
33. Mustafa Karnas, 에르게네 콘 이야기(Ergenekon Destani), 이스탄불, 2011
34. 빌렉트(L. Bilegt), “칭기스 칸의 계보의 신빙성에 관한 문제를 위해, 고고학 연구”, SA.T. XV, f-10.UB., 1995. 101~102쪽(몽골국과학학술원 역사학과, A. Ochir교수와 D.Tseveendorj 박사 등 9인 공저, 몽골국사 5권, 제1권, 울란바아타르, 2004
35. 러시아 과학학술원, 시베리아 분과, 몽골학, 불교학 및 티베트학, B.R. Zoriktuyev, 몽골과 부랴트인들의 종족사의 현제문제, 모스크바, 2011
36.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1, 2 -2억 쥬신이 알아야 할 진정한 한국역사, 해냄, 2006
몽골사료총서: “Монголын тvvхэн сурвалж бичгийн цуврал”(MUIS)
37. Монголын нууц товчоо, 1240 (1228 он)
논문 및 인터넷 게재물
38. 에르게네 콘 이야기는 무엇인가(Ergenekon Destanı nedir?) 글쓴이(Yazar): 하산 아르칸(Hasan Arıkan)
39. Woon-hoi Kim(Prof. Dong Yang University), The Origin of the Mongols and the Koreans- Discovering Their Common Root(2009년으로 추정)
40.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주공격 [登州攻擊]
41. 고동영(옮김), 반안군왕(盤安郡王) 야발(野勃), 檀奇古史(역사원전자료실)
참고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