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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8회 국민강좌] - 고려가 중시한 서경은 평양이 아니다 2017.07.12  조회: 3241

 

 

  

 <강의요약>

고려의 서북 국경에는 두 개의 압록강이 있었다. 국경선으로서의 압록강(鴨綠江)과 후방방어선으로서의 압록강(鴨綠江)이 그것이다. 또 국경선 압록강(鴨綠江)의 거점 도시는 보주(保州)였고, 후방방어선 압록강(鴨綠江)의 그것은 의주(義州)였으며, 보주는 의주방어사가 관할하고 있었다.

 

고려의 서북 국경선은 고려 전체시기를 통하여 변함없이 압록강(鴨綠江)이었지만, 이러한 서북 국방 방어체계가 성립한 것은 요와 금의 교대시기 보주가 고려에 재귀속된 12세기 초반이었다.

1084년 시점 압록강(鴨?江) 연안 요 수비병의 규모는 1, 1, 2, 70, 8영에 합계 정병 22천 명이었다.

 

종래 고려의 서북 국경을 후방방어선인 압록강(鴨綠江)으로 이해해 왔다. 그 일차적인 전거는 조선 초기 성리학자들이 편찬한 <<고려사>>였고, 근대에 들어서는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가 이를 기정사실화하였다.

이렇게 국경선 압록강()과 보주, 후방방어선 압록강(鴨綠江)과 의주가 혼동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는 그 음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국내외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으로도 보인다.

 

<<고려사>>, <<요사>>, <<금사>>를 비교하여 논증한 이런 결론에 따르면, 기존에 후방방어선인 압록강(鴨綠江) 아래쪽으로 비정되어 왔던 강동 6, 북경장성(천리장성), 서경 등이 모두 국경선 압록강(鴨?江)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국경선 압록강(鴨?江)은 현 요하의 철령 부근 지류로 비정된다. ......

 

 

 

 

 

< 강의자료 정리>

 

 

고려 서북 국경에 대하여
- 요·금 시기의 압록(鴨?)과 압록(鴨綠)을 중심으로
<<고려사>> 지리지 서문
1-1 그 사방 경계는 서북으로는 당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의 경우 선춘령을 경계로 삼았다. 대개 서북의 도달점은 고구려에 미치지 못하였고, 동북은 그것을 초과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북계 안북도호부 의주(義州)조
1-2 의주는 본래 고구려 용만현이다. 또 화의라고 부른다. 처음에 거란이 성곽을 압록강(鴨綠江) 동쪽 언덕에 설치하고, 보주(保州)라고 호칭하였다. 문종 조에 거란이 또 궁구문을 설치하고 포주(抱州)라고 호칭하였다. (달리 파주(把州)라고 한다.) 예종 12년에 요 자사 상효온이 도통 야율령 등과 더불어 금 병사를 피하여 바다에 떠서 도망가면서 우리 영덕성에 공문을 발송하여 내원성(來遠城) 및 포주를 우리에게 귀속시켰다. 우리 병사가 그 성곽에 들어가 무기·화폐·곡물을 수습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쳐서 의주방어사로 삼고, 남쪽 경계의 호구를 추쇄하여 채웠다. 이에 다시 압록강(鴨綠江)으로써 경계로 삼고,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다. 인종 4년에 금이 역시 州로써 그것에 귀속시켰다. 고종 8년에 반역하였으므로 강등하여 함신이라고 호칭하였다가 곧 예전대로 복구하였다. 공민왕 15년에 승격하여 목으로 삼고, 18년에 만호부를 설치하였다. 별호는 용만이다. 압록강(鴨綠江)이 있다. (달리 마자수(馬?水)라고 하고, 또 청하(靑河)라고 한다.)

<<고려사>>10 세가 10 선종 5년(1088) 9월
1-3 9월에 태복소경 김선석을 파견하여 각장을 혁파할 것을 간청하였다. 표문에서 말하기를, (중략) 통화 12 갑오년(994) (중략) 보좌하는 신하 서희가 경계를 관장하고 왕림하였으며, 유수 손녕이 조서를 받들고 상의하여, 각자가 양쪽의 경계에 당도해서 여러 성곽을 분배하여 축조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하공진을 안문에 파견하여 압록(鴨綠)에 구당사로 삼았습니다. (중략) 갑인년(1014)에 하천에 배를 축조하여 수로를 교통하였고, 을묘세(1015)에는 주의 성곽이 경계에 편입되어 군대를 설치하였으며, 을미(1055)에는 궁구를 설치하고 정자를 창건하였는데, 병신(1056)에 요구를 허락하고 옥사를 훼철하였습니다. (중략) 또 임인년(1062)에 의선군(義宣軍) 남쪽에 매매원을 설치하려고 하므로, 항의하였더니 수리 시설을 혁파하였습니다. 갑인세(1074)에 정융성의 북쪽에서 탐색·수비 암자를 처음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중략) 하물며 오늘에 미쳐 새로운 시장을 경영하려고 하니, (하략)

 

<<동문선>> 48 狀 (朴寅亮) 入遼乞罷??狀
1-3-1 (전략) 또 통화 13년(995) (중략) 보좌하는 신하 서희가 경계를 관장하고 왕림하였으며, 유수 손녕이 조서를 받들고 와서 논의하여, 각자가 양쪽의 경계에 당도해서 여러 성곽을 분배하여 축조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하공진을 선발·파견하고,압록수()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중략) 갑인년에 뜬다리를 축조하여 수로를 교통하였고, 을묘년에는 경계를 넘어 축성해서 군대를 설치하였으며, 을미년에는 궁구를 설치하고 정자를 창건하였는데, 갑신년에 미천한 자를 허락하여 옥사를 훼철하였습니다. (중략) 또 임인년에 선의군(宣義軍) 남쪽에 매매원을 설치하려고 하므로, 항의하였더니 경영 공사가 혁파되었습니다. 갑인년에 정융성의 북쪽에서 탐색·수비 암자를 처음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중략) 하물며 오늘에 미쳐 새로운 시장을 경영하려고 하니, (하략)


<<新唐書>>220 열전145 동이 고려
1-4 (전략) 마자수는 말갈 백산에서 나오며 모양이 오리머리와 같다고 하여 압록수()라고 부르는데, 국내성을 지나 서쪽에서 염난수와 합수하고, 또 서남쪽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그리고 평양은 압록()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로써 사람들을 건네주니, 기인해서 믿고 요새로 여긴다.

 

<<고려사절요>>2 예종2 예종 12년(1117) 3월 3일
1-2-1 김연이 긴급 상주하였다. “금 병사가 요의 개주(開州)를 공격·탈취하고, 내원성을 습격하였으며, 대부(大夫)·걸타(乞打)·유백(柳白)의 3군영을 정복하고 전함을 전소시켰습니다. 통군 야율령이 내원성자사 상효온 등과 더불어 그 대중을 인솔하고 선박 140척에 적재하여 강어귀에 나와 정박하였으며, 우리 영덕성에 통첩을 발송하여, 내원·포주 두 성곽을 우리에게 귀속시키고, 마침내 바다에 떠서 도망갔습니다. 우리 병사가 그 성곽에 들어가 무기 및 화폐·곡물을 수습한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주를 고쳐 의주방어사로 삼았으며, 압강(鴨江)을 경계로 삼아 관방을 설치하였다. 백관이 표문을 올려 경하하고, 두 성곽을 회복하였다.

 

<<고려사>>82 지36 병2 성보 예종 12년(1117)
1-2-2 12년에 의주(義州)에 축성하였다. 865칸이고, 문이 다섯이며, 성머리가 열일곱이고, 차단성곽이 일곱이었다.

 

<<동문선>> 19 七言絶句 鴨江西岸 望統軍峯 (김극기)
명종 23(1193) 경
1-2-3 용만(龍灣)이 감아 도는 곳 보주성을, 말 위에서 멀리 바라보아 눈이 다시 밝아지니. 진귀한 통군봉 한 송이를, 강을 사이에 두고 달려가 웃으며 서로 맞이하네.

 

<<元史>>149 列傳36 耶律留哥 고려 고종 6년(1219) 봄
1-2-4 병자에 걸노(乞奴)·금산(金山)·청구(?狗)·통고여(統古與) 등이 야사불(耶?不)을 추대하여 징주(澄州)에서 황제 호칭을 참칭하여 국호를 요(遼)라고 하고 연호를 천위(天威)라고 고쳤다. 유가(留哥)의 형 독랄(獨剌)을 평장으로 삼고, 백관을 설치하였다. 바야흐로 한 달이 지나 그 원수 청구가 반란하여 금에 귀속하고, 야사불이 그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 승상 걸로를 추대하여 국가를 감리하고 , 그 행원수 아아(鴉兒)와 더불어 병사·인민을 나누어 좌우익으로 삼아, 개(開)·보주(保州) 관문에 주둔하였다. (하략)

 

<<遼史>>36 志6 兵衛志下
1-5 변경의 파수병. 또 고려의 <대요사적(大遼事跡)>을 수집하였는데, 동쪽 경계의 파수병으로써 고려·여직 등 국가를 대비함을 수록하였다. 그 국가 수비 규모를 보아, 분포·설치가 간명·긴요하다. 하나를 들어 세 변방을 알 수 있다. 동경에서 압록(鴨?)서북봉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황룡부(黃龍府)의 정병(正兵)이 5천이고, 함주(咸州)의 정병이 1천이다. 동경에서 여직의 경계를 따라 압록강(鴨?江)까지 군사초소가 무릇 70개인데, 각각 수비 군사가 20인으로, 합계 정병이 1천 4백인이다. 내원성(來遠城) 선의군영(宣義軍營)이 여덟개인데, 태자영(太子營)에 정병이 3백이고, 대영(大營)에 정병이 6백이며, 포주영(蒲州營)에 정병이 2백이고, 신영(新營)에 정병이 5백이며, 가타영(加陀營)에 정병이 3백이고, 왕해성(王海城)에 정병이 3백이며, 유백영(柳白營)에 정병이 4백이고, 옥야영(沃野營)에 정병이 1천이다. 신호군성(神虎軍城)의 정병이 1만이다. 대강(大康) 10년(1084)에 설치하였다. 이상 1부, 1주, 2성, 70보, 8영에 합계 정병 2만 2천이다.

 

 

1084년 요 변경 파수병 현황

 

 

 

 

 

<<遼史>> 38 志8 地理志 2 東京道
현종 1년(1010) 5월 28일)
1-6 보주 선의군절도. 고려가 주를 설치하였다. 예전 현이 하나인데, 내원이라고 한다. 성종(聖宗)이 고려왕 순(詢)이 멋대로 즉위하였으므로 죄를 물었으나, 항복하지 않았다.

 

정리
압록강(鴨?江)변 보주는 고려가 설치하여 거란(요)과 국경으로 삼았고, 현종 6년(1015) 경 요에서 침범하여 선의군절도에 소속시키고 있다가, 예종 12년(1117) 다시 고려에 귀속되면서, 후방 방어거점인 압록강(鴨綠江)변 의주에 축성하여 의주방어사 소속으로 개편한 것

 


도1. 국경선 압록강(鴨江)과 후방방어선 압록강(鴨綠江)

 

 

 

 

 


<<고려사절요>>2 성종문의대왕 12년(993) 10월, <<고려사>>94 열전7 서희 동년
2-6 동10월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로 삼고,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삼았으며,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북계에 주둔하여 거란을 방어하였다. 윤월 서경에 행차하였는데, 전진하여 안북부에 머물렀다. 거란 소손녕이 군사를 거느리고 봉산군을 공격하여 우리 선봉군 사신 급사중 윤서안 등을 포획하였음을 듣고 왕이 전진하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중략) 희가 말하였다. “아니다. 우리나라야말로 바로 고구려가 고국이다. 그러므로 고려라고 호칭하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만약 토지 경계를 논한다면 위쪽 나라의 동경이 모두 우리 국경에 있는데, 어찌 침탈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압록강(鴨綠江) 내외 역시 우리 국경 안이다.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훔쳐 근거하며 완악하고 교활하니, 도로가 막힘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외교가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축출하게 해서 우리 옛 땅을 환속시키고 성곽을 축조하여 도로를 통하면 감히 수호하지 않겠는가.


<<遼史>>13 本紀13 聖宗4 統和十一年正月
2-6-1 고려왕 치(治)가 박양유를 파견하고 표문을 받들어서 사죄하였다. 여직(女直) 압록강(鴨江) 동쪽 수 백 리 땅을 취득하여 하사하게 하였다.

 


<<遼史>>115 列傳45 二國外記 高麗 (統和)
2-6-2 11년 왕 치가 박양유를 파견하고 표문을 받들어서 사죄하였다. 조서로 여직국(女直國) 압록강(鴨江) 동쪽 수 백 리 땅을 취득하여 하사하게 하였다

 

<<遼史拾遺>>7 本紀13 聖宗4 (統和))
2-6-3 11년 춘3월 고려왕 치가 박양유를 파견하여 사죄하였다. 여진(女眞) 압록강(鴨江) 동쪽 수 백 리 땅을 취득하여 하사하게 하였다.

 

<<遼史彙編>>4 補遼史交聘表2 統和十一年癸丑[淳化四年]
2-6-4 3월 병오 고려왕 치가 예폐사 시중 박양유를 파견하고 표문을 받들어서 사죄하였다. 조서로 여진(女眞) 압록강(鴨綠江) 동쪽 수 백 리 땅을 취득하여 하사하였다.(하략)

 

<<遼史彙編>>7 遼史紀事本末7 征撫高麗
2-6-5 (성종 통화) 11년 춘3월 고려왕 치가 박양유를 파견하고 표문을 받들어 사죄하였다. 조서로 압록강(鴨綠江) 동쪽 수 백 리 땅을 취득하여 하사하게 하였다. (이본 상고. <<통감집람>>에 이르기를, 강은 길림 오라 남쪽에 있는데, 수원이 장백산에서 나와 서남으로 흘러 조선과 분계선이 되고, 봉황성 동남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통전에서 이르는 바로 예전의 마채수(馬砦水)이다. 고려가 이것을 믿고 천혜의 요새로 삼는다.(하략)

 

(<<고려사>>3 세가 3 성종13년(994) 2월, <<고려사절요>>2 성종문의대왕 동년 동월, <<遼史拾遺>>7 본기13 성종4 (통화12년 춘3월))
2-7 13년 춘2월 소손녕이 문서를 보내 말하였다. “(전략) 압강(鴨江) 서쪽 마을에 계획하여 다섯 성곽을 창건·축조하려고 하며, 3월 초를 선택하여 축성 지역에 도착해서 수축을 시작하려고 하오. 엎드려 요청하건대, 대왕께서 미리 먼저 지휘하여 안북부에서 압강(鴨江) 동쪽까지 합계 2백 80리에 적당한 전지를 답사하고 지리 원근을 참작해서 아울러 축성하게 하고 작업 인부를 파견해서 동시에 착공하며, 그 합당한 축성 숫자는 조속히 회신하시오.(하략)

 

<<고려사>>3 세가3 성종 13년(994), <<고려사>>77 지31 백관2 외직 구당, <<고려사>>94 열전7 하공진, <<고려사절요>>2 성종문의대왕 동년
2-8 이승건(李承健)을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로 삼았다. 곧 하공진(河拱辰)을 파견하여 대신하였다.

 

<<고려사>>4 세가4 현종1 현종1년(1010) 11월 16일
2-11 신묘에 거란군주가 보병·기병 40만을 스스로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였다. 양규(楊規)·이수화(李守和) 등이 고수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遼史>>15 본기15 성종6 통화28년(1010)
2-11-3 11월 을유에 대군사가 압록강()을 건넜다. 강조(康兆)가 항거하여 싸웠으나 패배하였고, 후퇴하여 동주(銅州)를 보위하였다.

 

<<續資治通鑑長編>>74 진종 대중상부3년(1010) 11월
2-11-9 처음에 고려왕 송이 죽고, 그 동생 순이 국가사무를 임시로 통령하였다. 일찍이 여섯 성곽을 경계 상에 축조하였는데, 흥주, 철주, 통주, 용주, 귀주, 곽주라고 하였다. 거란이 자기에게 배반하였다고 여기고, 사신을 파견하여 여섯 성곽을 요구하였으나, 순이 허락하지 않았다. 거란이 마침내 거병하여 성곽 아래에 갑자기 도착해서 궁실을 분탕하고 거주민을 표략하였다. 순이 승·나주로 옮겨 피하였다. 군대가 후퇴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화평을 요청하였다. 거란이 견결하게 여섯 성곽을 언급하였다. 순이 즉시 군사를 발동하여 여섯 성곽을 수비하였다. 이에 미쳐 거란이 또 대규모로 와서 정벌하였다. 순이 여진과 연합하여 항거하니, 거란이 대패하였다. (중략) 고려가 또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성곽을 축조하고 내원성(來遠城)과 서로 바라보며 강을 걸쳐 다리로 삼았으며, 복병으로써 새 성곽을 고수하였다. (하략)

 

<<遼史彙編>>4 보요사교빙표2
2-13-2 개태 원년 임자(대중상부 5년, 1012) 8월 기미 고려왕 순이 형부시랑 전공지를 파견해 와 안부를 물었다. 또 표문을 받들고 질병을 핑계로 조회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서로 다시 흥화·통·용·철·곽·귀 등 6주 지역을 탈취하였다.

 

<<遼史>>15 본기 15 성종6 개태3년(1014), <<遼史>>115, 열전45 이국외기 고려 (개태3년) 5월
2-15 이해 여름 조서로 국구 상온 소적렬, 동경유수 야율단석 등에게 고려를 토벌하게 하여, 압록강(鴨江)에 뜬다리를 축조하고, 보·선의·정원 등 주에 축성하였다.

 

<<고려사>>4 세가4 현종1 현종6년(1015) 1월, <<고려사절요>>3 현종원문대왕 동년 동월 을묘(20)일, <<遼史拾遺>>8 본기 15 성종6(개태) 4년 춘정월 임인 東征 이하, <<遼史彙編>>7 요사기사본말7 정무고려 개태4년 하4월, <<續資治通鑑長編>>85 진종 대중상부8년 11월 계유
2-16 6년 춘정월 거란이 다리를 압록강(鴨綠江)에 제작하여, 다리를 끼고서 동·서 성곽을 축조하였다. 장수를 파견하여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고려사>>94 열전7 최사위, <<고려사>>94 열전7 곽원 현종20년, <<고려사절요>>3 현종원문대왕 현종20년(1029) 11월
2-18 거란 동경장군 대연림(大延琳)이 반란하여 자칭 흥요국이라고 하였다. 형부상서 곽원(郭元)이 기회를 타 압강(鴨江) 동쪽 언덕을 탈취하기를 청원하였다. 사위(士威)와 서눌(徐訥) 등이 상서해서 부당하다고 하였다. 원이 고집하여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이기지 못하였다.

 

<<고려사>>5 세가5 덕종0(1031), <<고려사>>94 열전7 왕가도, <<고려사절요>>3 현종원문대왕
2-19 공부낭중 유교(柳喬)를 파견하여 거란에 가서 장례에 참석하고, 김행공(金行恭)이 즉위를 축하하였다. 표문으로 압록(鴨綠) 성곽·교량을 훼철하고, 억류된 우리 사신을 귀환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도2. 사서에 기록된 강동6주 추정지

 


도3. 현 역사학계의 강동6주 위치

 


<<고려사>>94 열전7 류소, <<고려사>>82 지36 병2 성보, <<고려사절요>>4 덕종경강대왕 덕종2년(1033) 8월 25일
2-20 2년 소(韶)가 북경관방을 비로소 설치하였다. 서해(西海) 바닷가 예전 국내성(國內城) 경계 압강(鴨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흥화·정주·영해·영덕·영삭·운주·안수·청새·평로·영원·정융·맹주·삭주 등 13 성곽을 넘어 요덕·정변·화주 등 3 성곽에 이르렀다. (하략)

 

중희 4년(1035) 거란 흥종의 통치방도를 묻는 제서에 대한 소한가노(蕭韓家奴)의 답변
2-21 중희 초에 동지삼사사였고, 4년 (중략) 근년 이래 고려가 사신을 보내지 않으며 단절됨이 강고하고 전쟁의 수비가 진실로 용납하지 아니합니다. (중략) 그 압록강()의 동쪽 파수 사업이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하략) (<<遼史>>103 열전33 소한가노, <<歷代名臣奏議>>65 치도)

 

북경관방 농경
2-24 여름4월 신유삭 유선이 거란에서 돌아왔다. 조서에서 말하였다. “통고한 압강 동쪽 성곽보루가 농경에 방해가 될 듯하다는 사안을 살펴 잘 알았소. (중략) 지금 변경하기 어렵소. (하략) (<<고려사>>6 세가6 정종1 정종5년(1039), <<고려사절요>>4 정종용혜대왕 동년)

 

북경장성 축성 포상
2-26 교위 변유(邊柔)에게 중랑장을 초월해서 제수하였다. 처음에 유소(柳韶)가 압록(鴨綠)에 관방·요새를 축성하자 거란병이 와서 다투었는데, 유가 분투하고 선봉에서 사기를 진작하였다. 그러므로 이 명령이 있었다. (<<고려사절요>>4 정종용혜대왕 정종6년(1040))

 

북경장성 번방 호구
2-27 경신 서북로병마사가 압록(鴨綠) 이동 청새진(淸塞鎭) 관할 하 입석촌(立石村)까지의 번방 호구수를 작성하여 보고하였다.(<<고려사>>6 세가6 정종1 정종8년(1042) 1월 15일, <<고려사절요>>4 정종용혜대왕 동년 동월)

 

문종10년(1056), 11년(1057), 13년(1059) 최유선(崔惟善)이, 14년(1060) 오학린(吳學麟)이 작성
2-30 압강(鴨江) 동쪽 언덕을 반환해서 경계로 삼기를 간청하는 서장(하략)
2-31 압강(鴨江) 전면의 정자를 훼철한 것을 감사하는 표문 (하략)
2-32 압강(鴨江) 성곽·교량·궁구를 훼철할 것을 간청하는 표문 (하략)
2-33 압강(鴨江) 성곽·교량·궁구를 훼철할 것을 재차 간청하는 서장 (하략)

 

<고려사>>9 세가9 문종3 문종27년(1073) 6월 7일
기묘에 서경장군 유섭(柳涉)이 압록(鴨綠)수군을 파수하고 있었다. 거란인이 와서 투항하였는데, 그 추격·체포자가 장성을 넘어 들어와 정주(靜州)에 육박하였다. 섭이 방어하지 못하여 어명으로 파면하였다.

 

<<遼史>>23 본기23 도종3 대강4년(1078), <<遼史>>115 열전45 이국외기 고려 동년
2-38 여름 4월 신해에 고려가 사신을 파견하여 압록강(鴨江) 이동 지역을 하사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도3. 사료고증에 의한 고려 천리장성 위치도

 

 

 

 

도4. 현재 인식되고 있는 고려 천리장성 위치도

 


<<고려사>>11 세가11 숙종1 숙종2년(1097) 12월 13일
2-43 12월 계사 요가 야율사제(耶律思齊)·이상(李湘)을 파견해 와 (중략) 책봉해서 말하기를, (중략) 바다 귀퉁이에 사직을 세워, 북쪽으로 용천(龍泉)에 도달하고 서쪽으로 압록(鴨綠)을 극한으로 하였으며, (하략)

 

<<고려사>>11 세가11 숙종1 숙종6년(1101) 8월 16일, <<고려사절요>>6 숙종명효대왕1 동년 동월
2-44 도병마사가 상주하였다. “지금 요 동경병마도부서가 공문을 발송하고, 정주(靜州) 관내의 군영을 혁파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근래 대안(大安) 연간에 요가 압강(鴨江)에 정자 및 각장을 설치하려고 하자 우리 조정이 사신을 파견하여 혁파할 것을 요청하니 요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역시 마땅히 그 요청을 따라야 합니다.” 조서로 허락하였다.

 

<<고려사>>14 세가14 예종3 예종12년(1117) 3월 3일, <<고려사>>58 지12 지리3 북계 안북대도호부 영주 의주, <<고려사>>96 열전9 김인존, <<고려사절요>>8 예종2 동년 동월
2-46 신묘에 요 내원성(來遠城)이 통첩하여 말하였다. “작년에 생여진 및 동경 발해가 배반·반란하여, 밭벼를 널리 수확할 수 없게 되었소. (중략) 빌렸던 미곡 5만 석을 잠시 보류해 주어 (하략)”왕이 (중략) 판병마사 김연(金緣) 등에게 명령하여 통군(統軍)에게 전달·유시하기를, 만약 우리에게 두 성곽·인물을 귀속시키면 빌렸던 미곡을 보류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였다. 재삼 왕복하였는데 통군이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금 병사기 요 개주를 공격·탈취함에 미쳐 마침내 내원성 및 대부·걸타·유백 3군영을 습격하였다. (중략) 영덕성(寧德城)에 통첩하여 (중략) 내원·포주 두 성곽을 우리에게 귀속시켰다. (중략) 김연이 문서를 구비하여 긴급 상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고 포주를 고쳐 의주방어사로 삼고, 압강(鴨江)을 경계로 삼아 관방을 설치하였다. (하략)

 

<<고려사>>15 세가15 인종1 인종4년(1126) 12월 12일, <<고려사절요>>9 인종공효대왕1 동년 동월
3-3 계유에 (중략) 보주성(保州城) 지역을 고려에 귀속하도록 허락하고 다시 수복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구려(勾麗)의 본래 지역은 저 요산(遼山)을 위주로 하고, 평양(平壤)의 옛터는 압록(鴨綠)을 한계로 하였으며, 누차 변천을 거쳐 우리 조종에 이르렀습니다. (하략)

 

<<고려사>>100 열전13 조위총, <<고려사절요>>12 명종광효대왕 명종5년(1175) 10월
3-9 위총이 다시 서언(徐彦) 등을 파견하여 금에 가서 표문을 올려 말하였다. “전임 국왕은 본래 양위한 것이 아니고, 대장군 정중부와 낭장 이의방이 시해하였습니다. 신 위총은 절령(?嶺) 서쪽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기까지 40여 성곽으로써 내속하기를 청원하고, 군사를 원조하기를 요청합니다.” 금 군주가 언 등을 붙잡아 보냈다.(하략)

 

<<금사>>7 본기7 세종 중 대정 15년 9월
3-9-1 신묘에 고려 서경유수 조위총이 그 군주에게 반란하고, 자비령(慈悲嶺) 서쪽에서 압록강(鴨江) 동쪽까지 40여 성곽으로써 내부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拙軒集>> 送張仲謀使三韓
3-10 (전략) 압강(鴨江)의 복숭아 잎을 아침에 맞이하여 건너고, 절령(?嶺)의 송홧가루로 밤에 차를 달이노라 (중략) (고려는 중원의 사절을 호칭하여 모두 천자수레 모 관리라고 한다. 사안이 염자수(閻子秀)의 <압강행기(鴨江行記)>에 보인다.)

 

<<동국이상국집>> 동국이상국전집3 고율시 동명왕편명종23년(1193) 4월
3-11 (전략) 성곽 북쪽에 청하(靑河)[청하는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다]가 있고, 하백(河伯)의 세 딸(장녀는 유화 차녀는 훤화 계녀는 위화)은 아름다웠네. 압록 머리 파도를 가르고 나와, 웅심(熊心)의 물가에 가서 놀았네(청하에서 웅심의 연못 위에 나가 논 것이다) (중략) 남쪽으로 가 엄체(淹滯)[일명 개사수(蓋斯水) 지금 압록(鴨綠) 동북에 있다]에 이르러, 건너려 하나 배가 없었네 (하략)

 

<<동국이상국집>> 동국이상국전집39 佛道疏?醮疏 鎭江寺五佛齋文, <<동문선>>114 도량문 이규보) 진강사오불재문(희종3년(1207) 12월경)
3-17 (전략) 아득한 저 압강(鴨江)은 국경 요새에 끼어 있어, 만 사람을 사역하여 제방을 건축해도 가로 흐름을 막을 수 없으나, 다섯 부처의 자비를 투입하면 널리 구제할 자산이 되리라.(중략) 광폭한 파도를 진압하여 정제된 곳으로 우리 강역을 개척하고, 먼 지역을 회유하여 국왕의 교화를 무한한 곳으로 전파하소서.

 

<<고려사절요>>15 고종2 고종6년(1219) 1월, <<고려사>>22 <<세가>>22 고종 1 동년 동월 14일, <<원사>>149 열전36 야율유가
3-22 기묘 6년 춘정월 강동성 거란적이 항복하였다. (중략) 합진(哈眞)과 찰랄(?剌)이 충(?) 및 취려(就礪)와 같이 맹세하여 말하였다. (하략)

 

<<원사>>17 본기 17 세조 13 지원30년(1293) 2월 24일
4-1 조서로 연해에 항구[수역(水驛)]을 설치하였다. 탐라(耽羅)에서 압록강(鴨?江) 입구까지 무릇 11개 소이고, 홍군상(洪君詳)에게 감독하게 하였다.

 


김승용 묘지명 충숙왕16년(1329) 3월 17일
4-2 [김승용(金承用)] 천력 2년 기사 3월 갑술에 선무장군 관고려군만호 광정대부 밀직사 보문각 대제학 상호군을 제수하였다. 김공이 표문을 받들고 원에 조회하여 ??축하하였으며, 압록강(鴨江)을 건너자 질병에 걸려 신안여관(新安旅館)에서 훙서하였다.

 


<<동문선>>124 묘지 (이곡) 高麗國奉常大夫典理?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李君墓表
4-3 (전략) 이름이 달존(達尊)이다. (중략) 기묘 (중략) 명년 (중략) 6월 동쪽으로 귀환하며 질병을 얻었다. 상여가 압록수(鴨水)를 지났고, 29일 신해에 길에서 죽었다. 장림역(長林驛)에 빈소를 차렸다.(하략)

 

周向永 許超, <<鐵嶺的考古與歷史>>, 遼海出版社, 2010, 166쪽
4-5 개태 8년(1019) 군대 집결에 편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려와의 영역 경계인 지금의 개원노성(開原老城) 지방에 함주(咸州)를 건립하고, 지리의 도움을 빌려 고려에 대해 전개하는 신공세를 준비하였다.

 

도5. 개원(開元)지역 표시도

 

 

<<요사>>38 지8 지리지3
4-6 동경 요양부 (중략)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 (중략)가 있다. (중략) 관할하는 주·부·군·성이 87이고 통할하는 현이 9이다. (중략)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 (중략) 보주(保州) 선의군(宣義軍) (중략) 녹주(州) 압록군(鴨?軍) (중략) 함주(咸州) 안동군(安東郡)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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